우리가 도시에서 산다는 것

건축가들의 선배 조성룡 선생이 생애 첫 책을 낸다. 아름답고 의미 있는 책을 만들기로 유명한 수류산방에서. 선생과의 오랜 교감을 책으로 펴내는 편집자 심세중이 직접 그간 그와 나눈 건축 그리고 서울의 이야기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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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가 무슨 뜻이에요? 유행요? 유행 얘기부터 할까요. 요즘 건축계의 유행은 ‘도시 재생’입니다. 뭐든지 재생이래요. 유럽에서 유행이니까 우리도 그렇죠.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도시 재생을 얘기할 만큼 도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을까요? 작년 가을에 〈서울건축문화제>라는 게 열렸는데 그 주제도 ‘도시 재생’이었어요. 나도 어쩌다 참여하게 되었는데, 과정이 힘들었어요. 전시 현장에 가보니 건물을 철거하면서 1층 기둥 몇 개만 남겨뒀는데… 아, 저런 게 도시 재생의 유행을 따르는 건가 보다, 하고 생각한 걸까요? 요즘 동네 카페 화장실도 페인트칠하다 만 듯한 빈티지로 하는데 말이에요.”

성북동 덴뿌라, 잔의 막걸리가 조금씩 가라앉아 말개진다. 건축가 조성룡 선생은 5년 전부터 토요일 저녁이면 얼추 여기 앉아 계시곤 했다. 성균관대 대학원생, 연구원들, 스태프도 있었고 건축과 상관없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덴뿌라 없는 덴뿌라의 사장님은 청국장을 끓이고, 문어를 썰어 내거나 과메기를 다듬는다. 덴뿌라는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삼청터널 방향으로 뻗은 성북동길의 터줏대감이다.

이 길에서는 얼마 전 작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성북동길 초입의 오래된 플라타너스 두 그루를 어느 날 구청에서 말없이 잘랐다. 좌회전 차도를 확보한다는 명분이었다. 길가의 젊은 예술가, 활동가들이 그날로 일어섰다. 포클레인을 랩으로 감싸는 설치미술을 행하는가 하면, 잘려나간 둥치에 간절한 글귀를 써 붙이기도 했다. 고작 나무 두 그루가 아니었다. 온 동네가 술렁였다. 어르신들까지 뜻을 모으면서 구청에서는 사과를 하고 더 자르려던 것을 멈추고 교통 계획을 조정하기로 했다. 나는 이야말로 올해 서울에서 일어난, 진정 짜릿한 사건이라고 여긴다. 조성룡 선생은 오늘도 그 나무둥치에서 밤송이처럼 작은 잎이 다시 오르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 써놓은 글귀들을 응원하고 올라오는 길이다.

“서울역 고가도 똑같아요. 뉴욕 가니까 하이라인이 멋있더라, 우리도 그걸 흉내 내보자고 했죠. 하이라인하고 서울역 고가는 상황도, 쓰는 사람도 달라요. 지금 인구 1,000만이 넘는 도시 서울에서 그렇게 해야 하나.” 조금 격앙된다. 그럴 것이다. 조성룡 선생이 한강의 버려진 공장을 재활용해서 선유도공원으로 재탄생시킨 것은 하이라인보다 더 전의 일이다. 그러나 서울역 고가는 그 선선한 선유도공원이 아니라 하이라인을 벤치마킹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쩌다 이루어낸 근사한 스타일을 드러내는 데 늘 주춤한다. 그보다는 뉴욕, 파리나 도쿄에서 들여와야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태가 나지 않는 것은 당당하지 못해서다. “좌절을 많이 했어요. 이제 뭘 해야 되지? 적어도 이건 유행은 아닌 것 같아. 짝퉁이지. 안전하지 않아서 폐쇄한다는 고가 위에다 무거운 화분을 올리고, 물을 땅에서 퍼 올려서 거기다 나무를 가나다 순서로 심는다니….” 당선된 네덜란드의 위니 마스 팀은 한글에 대한 오마주라고 했다. 나무가 별처럼 빛날 거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나무는 땅에서 자라는 거잖아요. 왜 나무를 못살게 굴어요.” 100년 된 서울역 앞을 가로지르는 50년 된 고가는 내년 수목원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개장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잊고 즐겁게 나들이를 갈 것이다. 청계천 때도, DDP 때도 그랬듯이.

성북동 사람들은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두 그루를 살린 것에 기뻐하지만 조성룡 선생의 뜻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저기 밖에 성북동길 잘 봐요. 왜 이쪽 길에는 가로수가 있고 저쪽 길에는 없는지 알아요?” 그러고 보니 그렇다. 생각도 못했는데 이제야 보인다. “성북동길은 원래 계곡인데, 천을 복개한 거죠. 쌍다리 쪽은 마침 복개되지 않은 채 남은 곳입니다. 여기를 메워 주차장을 만들겠다는 게 성북구청의 아이디어였어요. 안 된다. 이거야말로 성북동의 보물이거든요. 쌍다리를 잘 보면, 예전 물길 뒤로 마을이 있고, 마을 초입으로 좁은 길이 나 있어요. 조선시대부터 있던 길이에요. 옛 마을 어귀 물가에 포플러 나무가 서 있던, 그런 오솔길이야. 지금도 동네 노인네는 항상 그 길로만 다녀요. 차가 안 다니고 마을에서 가장 순순히 내려오는 길이니까요. 물길의 흔적도 보존하고, 사람 사는 길도 살려야죠.” 무얼 하지 말자고 3년을 설득했다. 관광지를 조성하면 동네가 살 거라는 장밋빛 구호보다, 동네가 멋있어지면 사람들이 알아서 모이는 법이다. “지겨울 거예요, 맨날 똑같은 이야기. 구청에 들어갈 때마다 옛날 물길에다 지금 지도 겹쳐서 보여줬어요. 물은 똑바로 흐르지 않아요. 이쪽저쪽 굽이치며 내려가죠. 이편은 도로 아래 물이 흐르지 않으니까 나무가 자라요. 물이 저쪽으로 굽어 흐르는 구간인 거죠. 공무원들에게 물은 이해시켰는데 나무는 아직 이해를 못했나 봐….” 잘려나간 플라타너스는 이 길이 아스팔트가 아니라 강둑이었을 때부터 자라던 나무들이다. 성북동길을 따라 이쪽저쪽 울창한 가로수들은 검은 아스팔트 밑에 지층처럼 남아 있는 물길을 살아서 증언해왔다.

조성룡 선생은 언제나, 설계한 건축물보다 주변 풍경 이야기와 앞뒤 역사 이야기가 먼저고 더 길다. 의재미술관과 선유도공원이 그랬고, 어린이대공원 꿈마루도, 홍성 이응노의 집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는 풍경의 건축가라고도 하고 요즘은 인문 건축가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인문 건축가라니, 어불성설이다. 이 우주에 인문 아닌 건축이 어디 있는가. 아니, 현대건축만큼 사람 살냄새와 사람의 욕망에 철저히 봉사하는 분야가 없다. 중력과 풍화의 자연법칙을 거스를수록, 계절의 순환을 막아낼수록, 도시는 더 빛나며 유행의 숭앙자들을 꼬드긴다. 반짝이는 초고층과 휘황찬란한 쇼윈도야말로 인문, 곧 인류 문명의 등대라고 말이다.

그러나 조성룡 선생은 옛 지관처럼 땅을 읽고, 물길을 살핀다. 사람 손이 닿은 길이 아니라 물이 흘러서 내는 길, 그것은 바람이 흐르는 길이고, 나무들이 이어지는 길이다. 그 방향에 인간과 생명이 순순하게 포개어지도록 그는 건축을 한다. 풀이 다 스러진 겨울날의 선유도공원이 황량하게 아름다운 까닭도, 입장객 하나 없는 한밤 별빛 아래 이응노의 집이 장관인 것도 그래서다. 그러니까 조성룡의 작업은 당연히 인문 건축도 되지만, 그보다 천문 건축, 지문 건축도 아우른다. 테이블 냅킨을 한 장 척 놓더니 가슴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동그라미를 하나 쓱 그린다.

“이 동그라미가 서울 성곽. 북쪽부터 돌아가면 북악, 인왕, 남산, 낙산이지.” 가운데를 가로로 그어 종로를 낸다. 그 위에 경복궁, 오른쪽에 창덕궁, 종묘, 성균관, 왼쪽에 사직을 둔다. 얼굴에 눈, 코, 귀가 난 것 같아진다. “여기가 종각이에요. 종각에서 남쪽으로 길이 이렇게 휘어서 나요. 그 끝이 남대문. 지금 똑바로 난 길은 일제시대에 뚫은 거예요. 네 방향의 산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은 게 서울 성곽이지. 가장자리에 산이 있으니까 종로 위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물이 흘러내리고, 남산에서는 물이 북으로 흘러요. 그게 청계천으로 모여서 한강으로 빠지지.” 오늘도 어김없이, 술자리에 모인 모든 눈동자가 일제히 만년필 끝을 따라 움직인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한 지도다. 성북동은 그 산의 너머, 성 바깥으로 흘러내린 물길 이야기다. “그래서 성북동 계곡에는 성 안 사람들을 도와주고 사는 마을이 생겼어요. 서울의 형성 원리를 잘 보여주는 동네죠.”

모두 이 지도 이야기에 반해서 시작된 것이다. 지난 몇 년, 우리의 술자리는 늘 그렇게 시작했다. 이 이야기 안에서는 우리가 여기 이 도시에서 지금 사는 모양, 걷고 마시고 쇼핑하고 떠들고 화내고 지루해하는 모든 일이 어느 하나 이 땅과 하늘, 이 땅의 역사와 연결되지 않음이 없어진다. 그러나 무게에 짓눌려 어깨를 추레하게 굽힐 필요는 없다. 조성룡 선생이 작업한 건축 공간은 그 연결을 억지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의 연애사 애틋하던 밤에 한강 물이 어떻게 찰박거렸는지, 하늘에 손톱 같은 달이 보였는지, 눈이 내리던 날 그 골목 모퉁이에서 잠시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지, 그런 기억을 담을 따름이다. 그 어쩔 줄 모를 만큼 낭만적이고 시크하면서도 외로운 도시의 라이프스타일 그대로 자연이며 전통일 수도 있다고, 그래야 한다고, 조성룡 도시 건축은 유일하게 그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건 건축이나 도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다. 일흔넷이 되어서도 도무지 젊은 남자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롱 오버코트와 끈이 반쯤 헝클어진 컨버스를 멋지게 소화해낼 수 있는 그 스타일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조성룡 선생이 요즘 가장 마음을 기울이는 작업 중 하나는 소록도다. 나환자 격리 수용소에서 병원으로 100년의 아픈 역사가 오롯이, 그리고 가장 멋지게 기억되고 기억될 방법을 찾아내는 데 그만큼 적격이 없을 것이다. 그가 소록도 입구 주차장에 버려진 자그만 옛 건물을 고쳐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건 그의 평생 가장 작은 작업이고, 또 가장 큰 작업이다. 이번에는 조성룡 선생의 행보가 어떤 정치에도 휘둘리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겨울로 들어설 무렵, 우리 술자리의 이야기가 책으로 묶여 나온다. 세상에, 조성룡 선생의 평생 첫 책이다. “건축가가 돈 받고 설계해준 작업 모아서 자기가 서문 쓰면 그건 책이 아니라 회사 소개 브로슈어잖아요.” 오늘의 술자리 이야기는 외국인에게 서울을 가장 멋지게 보여주는 법으로 끝났다. “공항에 오후 늦게 도착하는 비행기 편으로 해요. 일단 북한산이나 인왕산 바깥 기슭에 재워요. 그리고 아침 일찍 그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요. 네 산하고 성곽에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겠지. 아, 저기를 가보자, 그리고 시내로 들어가는 거야. 경복궁 옆에 호텔을 둘 게 아니라, 성 밖에 호텔을 두는 게 낫다고.” 플라타너스 낙엽이 버스럭거리며 뒹구는 성북동의 밤, 첼시가 부럽지 않을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책 제목은 아마 <우리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