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 of Elegance

우아함과 여성스러움의 전도사 캐롤리나 헤레라(Carolina Herrera)가 패션 인생 35주년을 맞았다. 뉴욕 상류사회의 자존심을 〈보그〉가 뉴욕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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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 at you!” 우아함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하던 캐롤리나 헤레라가 갑자기 던진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패션계의 거장을 만나기 위해 정중히 차려입었지만, 내 옷차림은 그녀가 사랑하는 ‘엘레강스’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칭찬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려던 차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 말은 한국의 패션을 보라는 거예요.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 영화를 본 뒤 그 우아함에 푹 빠져버렸어요. 그 색채와 여자들의 우아함. 그래서 저는 2011년 봄 컬렉션을 ‘한복’에 바쳤어요. 그 모자와 묶음 장식. 그 장식을 뭐라고 하죠? 고~름~? 저~고~리? 비~우티풀!”

뉴욕에 자리한 디자이너의 사무실. 위는 73년 당시 헤레라의 모습. 왼쪽은 35주년을 기념해 CH 캐롤리나 헤레라에서 선보인 ‘인시그니아’ 컬렉션.

뉴욕에 자리한 디자이너의 사무실. 위는 73년 당시 헤레라의 모습. 왼쪽은 35주년을 기념해 CH 캐롤리나 헤레라에서 선보인 ‘인시그니아’ 컬렉션.

뉴욕 패션계의 여왕이 고름과 갓 그리고 저고리를 발음하기 위해 노력하던 곳은 맨해튼 미드타운에 자리한 그녀의 사무실이다.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17층 코너 오피스는 깊은 연륜의 디자이너와 꼭 어울리는 곳이었다(앤디 워홀이 그려준 초상화부터 마호가니 책상을 비롯한 오래된 가구까지). 그 공간 속 소파에 앉아 있는 헤레라 역시 우리가 상상하는 ‘미세스 헤레라’의 모습 그대로였다. 주름 하나 가지 않은 실크 셔츠 드레스에 완벽한 메이크업 그리고 단정히 빗어 올린 머리. 하루 전 업타운에서 새로운 쇼를 선보였지만 지친 기색은 없었다.

올가을 출간할 35주년 기념 화보집 속 이미지. 아카이브 속 오래된 드레스를 젊은 사진가와 모델들이 재해석했다.

올가을 출간할 35주년 기념 화보집 속 이미지. 아카이브 속 오래된 드레스를 젊은 사진가와 모델들이 재해석했다.

“지난 35년은 아름다운 여행이었어요. 여성들이 원하는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이었다고 말할까요?” 컬렉션 라인을 비롯해, CH 캐롤리나 헤레라, 향수, 브라이덜 라인 등 헤레라 제국을 건설한 디자이너의 여행은 올가을 출간할 단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 아트 디렉터 파비언 바론과 함께 마리오 테스티노, 패트릭 드마쉴리에 등이 촬영했던 패션 화보 속 그녀의 옷을 한데 모은 책. 여기에 아카이브 의상을 꺼내 젊은 사진가가 새로 촬영한 이미지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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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인스타그램과 스냅챗으로 패션을 접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세대의 패션 아닌가? “물론 그렇죠. 하지만 패션 속 미스터리는 사라진 것 같아요.” 유명인이 캐롤리나 헤레라의 옷을 입었을 때, 그 옷을 사고 싶어 하는 고객들도 있지 않을까? “요즘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유명인이 입으면 오히려 주문을 취소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리고 팝스타가 입었다고 그 옷을 사고 싶어 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지금 패션계가 애용하는 방식이지 않나? “물론 그래요. 저 역시 그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거죠.” 한동안 패션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녀에게 몰래 숨겨둔 인스타그램 계정은 없냐고 물었다. “하우스 오브 헤레라를 위한 계정은 아주 중요해요. 고객들에게 우리 세상을 열어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먹는 음식까지 알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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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마흔두 살의 나이에 패션 디자이너로 데뷔하기 전까지, 그녀는 패션을 즐기기만 했다. “미국, 프랑스, 이태리 디자이너들의 고객이었어요. 제가 원하는 건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다른 여성들을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그녀의 생각을 바꾼 건 당시 미국 <보그> 편집장이었던 다이애나 브릴랜드. “사실 커튼을 비롯해 인테리어용 패브릭 브랜드를 시작하고 싶어서 그녀에게 조언을 구했죠. 다이애나가 그러더군요. ‘그건 지루해요. 패션을 하세요!’” 70년대 스튜디오 54에서 파티를 즐기던 사교계 스타의 운명이 바뀐 것도 그때다. “제가 그리던 여성을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때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 속 여주인공이 생각났어요. 기다란 담배를 들고, 얼굴을 가린 모자를 쓰고, 매혹적인 모습의 40년대 영화 속 악녀(Vamp). 지금도 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성의 모습이에요.”

뉴욕의 아름다운 미술관, ‘프릭 컬렉션’에서 열린 2017 S/S 컬렉션. 지난 35년 동안 선보인 스타일을 새롭게 변형한 디자인이 많았다.

뉴욕의 아름다운 미술관, ‘프릭 컬렉션’에서 열린 2017 S/S 컬렉션. 지난 35년 동안 선보인 스타일을 새롭게 변형한 디자인이 많았다.

정작 그녀가 꼽은 최고의 패션 아이콘은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정말 대단한 아이콘이에요.” 재키 오나시스, 르네 젤위거 등 당대의 스타들 대신? “물론 그들도 환상적이에요. 하지만 9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중 앞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꾸준히 지켜내는 건 멋있지 않나요? 전 꾸준히 무언가를 지켜내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화려한 80년대, 엄숙한 90년대 그리고 혼돈의 21세기를 지나면서도 자신만의 멋을 잃지 않은 것 역시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점 중 하나다. “후회는 없어요. 전 진짜 제가 좋아하는 것만 선보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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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우아함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아함은 타고나는 것이라 믿는 그녀가 말했다. “엄청나게 돈이 많아도 우아할 순 없어요. 또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도 우아하진 않았죠.” 그렇다면 적어도 우아함을 ‘연기’하기 위한 그녀의 조언은? “단순히 옷으로 완성되진 않아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웃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집을 꾸미느냐,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있느냐, 어떤 책을 읽느냐 등등. 이 모든 것이 당신을 우아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예요.” 그리고 그녀가 덧붙였다. “누가 제게 패션에 대한 조언을 달라고 하면 늘 똑같이 말해요. ‘전신 거울을 사세요’라고. 꼼꼼히 자신의 옷차림을 거울에 비춰 보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거든요. 이렇게 정의해볼까요? ‘전신 거울이야말로 최고의 액세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