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한잔의 힘

돈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같이 마실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다. 혼술을 하는 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다지기 위함이다. 드라마 〈혼술남녀〉 PD가 보내온 자발적 혼술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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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방송된 후 주변인들로부터 뜻하지 않은 ‘혼술 커밍아웃’을 자주 듣게 된다. 집에 갈 때 매일 500ml짜리 맥주 한 캔 사서 들어간다는 고시 준비생 후배의 이야기부터 집에서 ‘소맥’을 말아 부대찌개를 곁들여 먹는다는 ‘프로 혼술러’ 기자 후배의 고백도 있었다. 중국에 있는 가족을 그리며 매일 밤 소주 한잔에 잠든다는 외주 업체 이사님도 떠오른다. 평소 혼자 술 먹는다는 이야기 한마디 없던 그들이 ‘혼술러’임을 적극적으로 커밍아웃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집에서 혼자 술 먹는 것을 은근히 부끄럽게 여기던 정서 때문일까? 혹자는 ‘혼술’이 곧 알코올중독의 시작점이라며 ‘혼술러’들을 문제아 취급하기도 한다. 사실 술로 인해 부끄러운 순간도 많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술에 취해 같이 일하는 팀원들에게 닭살 돋는 카톡을 보냈다거나, 있는 안주 없는 안주 모두 꺼내 먹어 소화불량에 걸린 경우라거나, 전날 밤 마신 맥주 캔이 책상에 상시 나뒹군다거나. 하지만 나는 근 5년 넘게 혼술을 해오고 있다. 돈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같이 마실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다. 방송 일을 해서 시간이 없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저 술 한잔 마시고 나서 딱 기분 좋게 몽롱한 그때, 그 환상이 가득 찬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다. 술에 취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혼자만의 시간에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PD 시험을 준비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늘 마지막 전형에서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취업에 곤란함을 겪는 청춘들이 느끼는 그 감정(자괴감 또는 자책감)으로부터 나의 ‘혼술사’는 시작되었다. 술은 ‘취업도 못한 내 주제’를 잊기에 제격인 치료제였다. 그 시기 드러내놓고 집에서 술을 마시기엔 눈치가 보였기에 혼술하자마자 맥주 캔과 술병을 정리하곤 했다. 술도 맘 놓고 못 마시는 현실도 스트레스이긴 했지만, 당시 술은 심리적 자양 강장제 같은 것이었다.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그동안 전형에 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M본부 최종 면접에 낙방했다는 친절한 문자를 받은 그날도 집에서 소맥을 마셨다. 꽤 많이 마셨고 갑자기 친구의 전화가 걸려왔다. 술 한잔하자는. 약속 장소까지 자전거로 5분. 나는 핸들을 잡았다. 내리막길을 달렸다. 가속도가 붙은 상황에서 작은 돌 조각을 피하지 못하고 붕 날아버렸다. 얼굴에서 얼얼한 느낌이 나기에 손으로 만져보니 시뻘건 피가 흐르는 게 아닌가. 집으로 도로 올라가 거울을 보니 눈 옆이 찢어진 채 왼쪽 볼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직접 119에 전화를 걸어 앰뷸런스에 자력으로 몸을 실었다. “아저씨, 저 심한가요?” “네, 결코 가벼운 부상은 아닙니다. 잘못하면 성형수술까지도…” ‘그래, 이참에 성형수술 받으면 합격에 더 가까워질지도 몰라.’ 머릿속은 시험 합격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3시간 동안 치료를 받고 있는데,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응급실로 찾아왔다.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부모님이 계신 대전으로 향했다. 부끄럽고 미안한 감정이 나를 감쌌다. 그리고 보름 동안 아버지 차를 타고 통원 치료를 받으며 다짐했다. 다시는 혼술하지 않겠노라고.

그러나 그 다짐도 잠시,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서 맥주 캔을 쥔 채 졸고 있었다. 단, <혼술남녀>의 진정석이 혈중 알코올 농도에 제한을 두듯, 나 역시 맥주 500ml 두 캔으로 흡입량을 정한 뒤 혼술하기로 했다. 혼술 타임은 더 이상 내게 괴로움을 잊으려는 사투의 시간이 아니다. 노하우가 생겼달까. 이젠 혼술을 즐기는 방법을 조금은 알겠다. 내게 혼술 타임이란, 조용히, 신경을 날카롭게 하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영화를 내 뜻대로 해석하고, 하루의 일을 아주 솔직히 곱씹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색의 시간으로 정의 내리고 싶다. 완벽에 가까운 자유 시간. 촬영장에서 배우, 매니저, 소품팀, 의상팀 등 여러 스태프들과 하루 종일 부딪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면 갑작스러운 적막이 어색할 때가 있다. 하루 종일 풀가동 중이던 귀가 실업 상태에 빠져버린 상실감이랄까. 이럴 땐 듣고 싶은 노래 한 곡 틀어놓고,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린 채 맥주를 한잔한다. 1시간이나마 모든 긴장을 내려놓다가 스르르 잠드는 기분이 꽤 좋다. 그 시간을 기다리는 건 몽롱한 가운데 오로지 나만이, 원하는 것만 할 수 있는 ‘풀어헤쳐진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드라마 <혼술남녀>에 대한 관심은 ‘혼술’이라는 낯선 단어의 영향도 컸다고 생각한다. 기획 과정에서 참신한 단어를 선택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단어로 규정되지 않았을 뿐, 혼자 술 마시는 행위는 꽤 오랜 시간 봐온 모습이다. 순댓국에 소주 한잔 마시던 김 부장의 모습이나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 마시던 이별남의 모습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었던 건 애잔하고 슬픈 감정에 기인한 것만이 혼술의 시발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귀찮음, 외로움, 공허감, 자유로움, 자기 주도 등 여러 가지 솔직한 감정을 마음대로 풀어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혼술 타임이 아닐까. 거창할 수도 있지만 소란스럽지 않게, 조용히 마시는 혼술 타임은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분기점 같은 것이다. 혼자 사는 세상에서 자신과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혼술 타임은 그 관계를 다시 한 번 곱씹어보며 자가발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촬영이 없는 날이면 촬영장 부근 돈가스집에서 생맥주 한잔과 함께 혼술을 해본다. 이런저런 개인적 고민을 혼잣말처럼 쏟아낸다. 혼자 먹고 마시는 것이 익숙해진 시대라지만 식당에서 혼자 술 마시는 것은 아직 내게 익숙지 않다. 극중 진정석이 혼자 소주에 곱창을 쩝쩝거리며 먹고, 대하구이에 맥주를 콜콜콜 따라 흡입하는 장면은 연출진인 나조차도 가끔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근 1년 동안 이 프로그램에 몸담고 있으니 어느새 나만의 혼술 타임이 확장됨을 느낀다. 잠시나마 몸과 마음이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일까. 나뿐만 아니라 우리 프로그램이 다른 누군가에게 조금은 편안하고 솔직하며 떳떳한 혼술 타임을 제공했길 바라며… “후…(음주 측정기 불며) 이 정도면 딱 괜찮군. 그래, 이 정도면 딱 좋다!”

술기운이 사라지니 불현듯 두렵다. 혼자만의 자유롭고 편안한 혼술 타임도 아주 잠시, 불과 2시간 후면 또다시 난 소란스럽고 왁자지껄한 현장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