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수화물의 누명

비만의 주범, 대사증후군의 공범, 기승전 탄수화물은 유죄? 법정에 선 탄수화물의 변호를 위해 종합병원 내과 전문의, 비만 클리닉 한의사, 안티에이징 클리닉 가정의학과 전문의 3인을 증인으로 신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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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GUE(이하 V) 일명 ‘저탄고지’ 다이어트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하지만 이미 영국 정부가 ‘연구 & 논문 중 유리한 결과만 취사 선택한 위험한 다이어트’라 비난한 방법인 데다 국내 대한비만학회를 포함한 5개 전문 학술 단체는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KIM YOUNG SUN(이하 KYS)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나친 고지방 식이를 하면 포화 지방 섭취가 늘 수밖에 없다. 혈액 내에 나쁜 지방의 양이 늘어나면 심혈관계 질환이 우려되는 건 팩트다. 게다가 산화적 스트레스 반응이 늘어나 몸속 염증 반응을 초래할 수도 있다.

KIM JUNG GUK(KJG) <MBC 스페셜> ‘지방의 누명’을 오해하면 안 된다. 지방이 다이어트에 좋다는 게 아니고 ‘비만의 주범은 아니다’로 이해해야 옳다. 방송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례자들이 먹는 음식량 자체가 적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지방을 많이 먹어도 다이어트를 할 수 있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V 지방의 무죄를 밝힌 것은 인정. 하지만 이 때문에 대신 누명을 쓴 영양소가 있다. 바로 탄수화물이다. 요즘 분위기로는 거의 무기징역감이다.

KJG 여간 억울한 게 아닐 거다. 탄수화물이라고 다 같은 탄수화물도 아니니까. 감자, 쌀 같은 소화성 탄수화물도 있지만 비소화성인 채소도 탄수화물이다. 다이어트를 얘기할 때 늘 도마에 오르는 것은 전자인데, 이 역시 우리 몸에 직접적인 에너지원이라 일정량 정도는 반드시 섭취해야 한다. 문제는 너무 많이 먹어서 몸이 잉여분을 지방으로 바꿔 저장하면서 시작된다. 필요한 만큼의 당분만 공급한다면 이론적으로는 살이 찌지 않는다.

 

V 사람이 유죄인 것이지 탄수화물 자체는 죄가 없다는 건가.

KYS 심지어 오래 안 먹으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특히 뇌는 포도당을 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기관인데 탄수화물 섭취를 극단적으로 제한할 경우 저혈당 증상, 피로감, 신경과민, 불면증 등이 올 수 있다. 과도한 운동 후 근육통이 왔을 때 몸을 회복시키는 것도 당분이다.

 

V 모든 음식이 단일 영양소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 꼭 탄수화물군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BAE JEE SUN(이하 BJS) 단언컨대 탄수화물은 가장 효과적인 에너지원이다. 부족하면 다른 영양소가 형태를 달리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러면 힘이 낭비된다. 단백질은 대사성 기능과 손상으로부터 세포를 보호하고 몸을 구성해야 하는데 다른 용도로 돌려 사용해버리고 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V 하지만 동시에 지방도 연소되지 않을까? 어쨌든 살은 빠지겠지.

BJS 물론 포도당을 좋아하는 뇌도 당이 부족하면 지방을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지방은 산화를 위해 미토콘드리아로 직접 들어가 케톤이라는 대사 물질로 바뀐다.

 

V 케톤? 과하면 몸이 산성화되고 종국엔 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그것 아닌가.

BJS 케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면 신장에 부담을 주고 신체 항상성 유지가 힘들어진다. 원래 케톤 다이어트, 즉 고지방 저탄수화물 다이어트는 체중 감량이 아니라 간질, 치매 등의 신경성 질환이나 당뇨병을 예방하고 개선하기 위한 식이요법이다.

 

V 역시 모든 것은 과유불급. 고지방 다이어트의 핵심 메커니즘은 탄수화물을 제한함으로써 인슐린 분비를 컨트롤하는 데 있다고 들었는데 이 역시 나비 효과로 이어지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

KJG 나도 이 점이 궁금했다. 사실 나는 처방하지 않는 다이어트법이기에, 내과전문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랬더니 환자 중에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를 하고 나서 피부 트러블이 생기고 혈당 관리가 잘 안 되는 케이스가 종종 발견되고 있다고 귀띔하더라. 당뇨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혈당을 안정시키는 것인데 변동 폭이 커지니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었다.

BJS 인슐린만의 문제가 아니다. 탄수화물이 부족하면 포만과 섭식에 관련된 호르몬 분비도 영향을 받는다. 탄수화물을 더 많이 섭취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거다. 실제로 마라톤 선수들이 이러한 리바운드 현상을 이용해 탄수화물을 몸에 축적한다. 대회 15일 전, 처음 9~10일은 단백질만 섭취하고 이후 5~6일 동안은 탄수화물만 먹는 ‘카보로딩’을 하는 거다. 요요라고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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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도리어 살이 찌기 쉬운 체질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 아닌가! 단기적인 체중 감량 효과는 있겠지만 결국 더 슬픈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군. 듣고 보니 탄수화물, 너무 억울한 누명을 썼네!

KYS 탄수화물을 섭취해도 어떤 탄수화물을 어떻게 섭취하느냐에 따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확연히 다르다. 설탕, 꿀, 초콜릿, 케이크 등의 단순당이 탄수화물 전체에 오명을 씌우고 있다. 통곡물, 잡곡 등의 복합 탄수화물은 오히려 비만 예방에 도움이 된다.

BJS 식이섬유 등의 영양분이 풍부한, 좋은 탄수화물을 적정량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제된 탄수화물인 흰쌀밥, 국수, 파스타, 빵 같은 당분 덩어리는 식욕 촉진제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장내 세균총 이상을 일으킨다.

 

V 그래도 ‘밥심’이라는 얘기가 있지 않나. 농경 사회 후손인 동아시아인, 우리의 유전자형은 고지방 다이어트 효과가 낮다고 하는 기사를 읽었다. 게놈을 살펴봐도 침팬지에게는 두 개에 불과한 녹말 소화효소가 인간에게는 5~7개나 있다. 인류가 탄수화물을 잘 먹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KYS 아직까지 이런 내용을 정확하게 뒷받침할 만한 연구와 근거가 부족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공감하고 동의한다. 조상이 누구냐에 따라 영양 흡수와 대사가 다르다는 연구도 있다. 한민족의 조상은 곡물과 채소 위주로 식사를 해왔기에, 우리도 이에 맞게 소화기관을 비롯한 대사 시스템이 발달돼 있다. 특히 장내 세균은 인종마다 다르다. 재미있는 예로 미국으로 건너간 일본인 이민자들이 서양인들과 동일한 식습관 패턴에 동일한 칼로리로 음식을 섭취했지만 결국 미국인보다 심장병, 동맥경화, 비만이 늘었다는 연구가 있다.

KJG 아무리 그래도 요즘 우리가 먹는 탄수화물 양은 좀 많다. 밥도 먹고 빵도 먹지 않나.

 

V 하긴 가공식품을 먹으면 기본적으로 당을 같이 먹는다고 봐야 한다. 단백질 덩어리인 것 같은 소시지나 스모크 베이컨도 조미하는 과정에서 이미 당이 첨가되니까. 조상들처럼 고봉밥을 먹지 않아도 반찬으로, 간식으로, 음료로 이미 충분한 당을 섭취하는 셈이겠지. 하지만 포기가 쉽지 않다. 너무 ‘땡기니까’.

KYS 탄수화물을 갈구하는 것은 뇌에서 허전함이나 우울함을 느끼는 것과 연관돼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V 심리적인 문제라는 건가. 경계해야 할 것은 나의 허한 마음이라는 뜻?

BJS 상대적으로 맛있고, 구하기도 쉬우며, 먹으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니 자꾸 찾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쁜 탄수화물, 단순당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슬프다.

 

V 최화정 말마따나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일 순 없는 걸까? 당의 종류를 꼼꼼히 따지거나 양을 측정하며 먹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KJG 비만 클리닉을 운영하다 보면,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이상적인 섭취 비율(탄수화물 55~60%, 단백질 20~25%, 지방 15~20%)이 공허한 외침이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얼마나 먹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단백 저칼로리 음식으로 알려진 ‘연어’도 많이 먹으면 살이 찌니 뭐든 양을 줄이는 게 답이다 싶어서다. 초콜릿 같은 단순당도 먹는 양에 따라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V 조리법도 영향이 있을 것 같다. 굽고 찌는 것이 튀기는 것보다 좋겠지.

KJG 물론이다. 건강한 재료라도 말린 과일이나 고구마 말랭이처럼 말린 음식은 체중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친다. 무게는 반이지만 칼로리는 건조 전의 두 배가 되니까.

 

V 최후 변론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듣다 보니 탄수화물은 집행유예 정도의 구형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잠재적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건 단백질, 지방 모두 마찬가지 아닌가? 진짜 유죄는 굳이 나쁜 탄수화물만 찾아 먹는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사회생활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혹은 불가항력으로 단순당을 먹게 될 거다. 하지만 일부러 찾아 먹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훈방되고 싶다. 앞으로 착하게 살 수 있게 선처의 한마디를 부탁한다.

KYS 다이어트에 왕도가 없다. 가장 좋은 다이어트는 소량씩 골고루 먹되 가공되지 않은 음식, 첨가물이 적은 음식, 튀기거나 타지 않은 것, 짜거나 맵지 않은 신선한 음식을 먹는 것뿐이다.

KJG 비만의 원인은 결국 과식이다. 이는 당뿐 아니라 단백질, 지방 등 모든 음식에 해당된다. 먹고 배부른 것뿐만 아니라 배가 고프지 않을 때 먹는 것도 과식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배가 고프지 않다면 전날 과식했다는 증거니 ‘오늘은 조절을 해야겠구나’ 생각하면 쉽다.

BJS 다이어트를 위해서라면 탄수화물을 줄이긴 해야 한다. 그러기에 앞서 탄수화물을 잘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탄수화물인지 생각보다 무지하다. 맹목적 비난보다는 좋은 탄수화물에 입맛을 들이고 양을 줄여 다이어트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