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삼킨 예술가

양혜규 만큼 전 세계를 누비며 활약하는 미술가도 없지만, 그녀만큼 ‘창작’의 포부 아래 묻혀버릴 수 있는 사유와 과정을 ‘공식적 사건’으로 만드는 사람도 없다. 미술의 경험을 무한대로 확장하는 양혜규를 언급하기 위해 작품보다 먼저 그녀의 행위를 눈여겨보고 싶었다. 그러므로 이건 양혜규의 현재에 대한 매우 주관적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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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gue YangxGaleries Lafayette, Quasi-Pagan Modern, Courtesy of Galeries Lafayette, 2016

Haegue YangxGaleries Lafayette, Quasi-Pagan Modern, Courtesy of Galeries Lafayette, 2016

올여름, ‘세계 최고의 마가장(Magasin)’인 파리의 라파예트에서 펼쳐진 양혜규의 현재는 매우 다이내믹했다. 패션 중심지 파리 8구 오스만 대로, 상업과 세상이 만나는 가장 첨예한 경계로서의 쇼윈도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라파예트에 가본 이들은 ‘기이하다’는 말로 감상평을 전하기도 했는데, 이건 아름답다는 것보다 훨씬 성공적인 뉘앙스로 들렸다. 라파예트가 어떤 상업적 이득을 취했는가 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가장 이상적인 패션, 예술 협업의 예로 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갤러리 라파예트 재단으로부터 처음 제안을 받았어요. 웬만한 미술관 못지않은 훌륭한 드림 팀이죠.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한 대안까지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어요.” 미술관이 아니라는 점에서 자유를 찾은 그녀는 급기야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양혜규가 누군지 상관도 안 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싶어졌다. 그렇게 양혜규는 수십 개의 쇼윈도, 돔 형태의 천장, 15만 개의 쇼핑백에 이르기까지 라파예트를 완벽하게 활용했다.

화이트 수트는 김서룡(Kimseoryong).

화이트 수트는 김서룡(Kimseoryong).

“의사(Quasi)라는 게 말하자면 ‘~에 근접한, ~ 같은, ~에 유사한 그렇지만 ~는 아닌’ 이런 뜻이죠. 그 말에 권한을 위임하고 싶었어요. 어떤 것의 나머지라고 할 수도 있고, 거기에 비친 상이라고도 할 수도 있는데, 어쨌든 사이비 같은 것들에 애정과 관심이 많았어요. ‘쿼지’라는 말을 붙임으로써 그것과 유사하지만 하이브리드에 가까운 그런 것들을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역사를 읽는 방법도 그래요. 정사가 있다면, 주관적인 해석도 있죠. 이것을 축적하고, 누리고, 질을 높이는게 우리 세대가 할 일이자 미래라 봐요. 그걸 다 소화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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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예트 작업이 철거될 무렵, 퐁피두 센터에서는 양혜규의 아티스트 토크가 열렸다. 지난봄부터 퐁피두의 입구에 전시된 블라인드 작품 ‘좀처럼 가시지 않는 누스(Lingering Nous)에 대한 이야기와 양혜규의 조형 언어로서 가장 결정적이고도 대표적인 역할을 한 블라인드 작품을 일별한 책 작업을 위한 자리였다. “이 재료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복잡한 걸 넘어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처음엔 순전히 빛을 가리고 투사된 영상을 다른 작품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사용했어요. 분리되면서도 다른 설치 작품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길 원했지요. (중략) 블라인드에 둘러싸인 이 공간에 있으면 아주 이상하면서도 편안한 기분이 들고, 그러면서도 외부와 잘 연결되도록 해줍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저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테일러드 롱 코트는 조셉(Joseph), 슬립 드레스는 클루 드 클레어(Clue de Clare), 로퍼는 렉켄(Rekken).

테일러드 롱 코트는 조셉(Joseph), 슬립 드레스는 클루 드 클레어(Clue de Clare), 로퍼는 렉켄(Rekken).

퐁피두 센터 현대미술 큐레이터인 니콜라스 루치-구트니코브의 말은 좀더 쉬운 예가 될 것이다. “아주 흥미롭네요. 토머스 맥도너도 그의 에세이에서 같은 내용을 묘사하며 뒤라스의 <연인(L’amour)>이라는 글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뒤라스가 연인과 함께 중국에 있었을 때, 방에서 블라인드로 보호된 채 거리 위의 사람들 그림자를 바라보는 순간을 언급합니다. 두 사람은 거리의 다양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거리 위의 목소리와 다른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외부로부터 보호 받는 느낌을 받으며 둘만의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죠.”

원석 네크리스 장식 슬리브리스 톱은 캘빈 클라인 컬렉션(Calvin Klein Collection).

원석 네크리스 장식 슬리브리스 톱은 캘빈 클라인 컬렉션(Calvin Klein Collection).

“소통의 기본은 이해가 아니라 무지, 무시, 무관심, 낯설음과 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관적으로만 들리는 이 모든 소통의 출발점은 새로운 미술적 ‘수사학’을 통해서 개인들에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일말의 느낌 정도만 제공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일일 겁니다.”

An Opaque Wind Park in Six Folds, 2016, Clay bricks, mortar, aluminum turbine vents, steel, soil, stone, cork, various plants, 318x1350x1306 cm, Serralves Museum of Contemporary Art, Porto, Portugal, Photo: Filipe Braga ⓒ Fundação de Serralves

An Opaque Wind Park in Six Folds, 2016, Clay bricks, mortar, aluminum turbine vents, steel, soil, stone, cork, various plants, 318x1350x1306 cm, Serralves Museum of Contemporary Art, Porto, Portugal, Photo: Filipe Braga ⓒ Fundação de Serralves

현재 세할베스 뮤지엄의 야외 조각에 있는 ‘불투명 바람이 부는 육각공원’은 샤르자에서 불던 ‘불투명 바람’과는 또 다른 하이브리드다. 세할베스 미술관의 야외 정원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아르데코식의 아름다운 빌라, 티하우스, 프렌치 스타일 정원, 과수원, 농장, 온갖 희귀종 식물이 있는 자연 그대로의 정원… 문화적 열망에 가득 찬 어느 귀족이 일생에 걸쳐 가꾼 이 정원과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지은 미술관이 그 자체로 예술이다. 양혜규는 이 정원 한쪽에 서로 다른 세 가지 색조를 띤 벽돌로 지은 다섯 개의 탑을 지었다.

“공공 미술이라 생각하고는 크리스티컬한 몇 개의 안을 준비해 막상 장소에 가봤어요. 그런데 완전히 잘못 짚은 거예요. 이 정원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죠. 그 후로 네 번 더 갔는데, 솔직히 쉽지 않더라고요. 이 아름다운 데에 굳이 무슨 대단한 아트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저 응원해주고 아껴주면 되는 곳이었거든요.”

양털 바이커 재킷은 조셉 안 by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 (Joseph Ahn by Seoul Fashion Creative Studio).

양털 바이커 재킷은 조셉 안 by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 (Joseph Ahn by Seoul Fashion Creative Studio).

“12월 안에 다음 전시 공간에 다 들러봐야 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요. 변명하자면 소위 말해 ‘이슈’라고 하는 것을 그대로 일러스트레이션 하지 않는 게 제가 하는 저항이에요.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걸 하지 않는 것만도 어마어마한 일이에요. 일종의 다른 방법론을 만들고 싶어요.”

Lingering Nous, 2016, Aluminum Venetian blinds, aluminum hanging structure, powder coating, steel wire, LED tubes, cable, 933.5x963x1086 cm, Centre Pompidou, Paris, France, Photo: Florian Kleinefenn KUKJE

Lingering Nous, 2016, Aluminum Venetian blinds, aluminum hanging structure, powder coating, steel wire, LED tubes, cable, 933.5x963x1086 cm, Centre Pompidou, Paris, France, Photo: Florian Kleinefenn KUKJE

“이 재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복잡한 걸 넘어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처음엔 순전히 빛을 가리고 투사된 영상을 다른 작품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사용했어요. 분리되면서도 다른 설치 작품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길 원했지요. (중략) 블라인드에 둘러싸인 이 공간에 있으면 아주 이상하면서도 편안한 기분이 들고, 그러면서도 외부와 잘 연결되도록 해줍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저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 퐁피두 아티스트 토크 중 양혜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