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5년 전 <보그>코리아와 나눈 프랑카 소짜니 인터뷰

2016.12.23

by VOGUE

    5년 전 <보그>코리아와 나눈 프랑카 소짜니 인터뷰

    프랑카는 파워풀하다. 패션계에서 파워풀하고 세계적으로 파워풀하며 신체적으로 파워풀하다. 인터뷰하고 사진 찍고 쇼핑하는 뒤를 쫒아다니느라 완전히 탈진 상태에 이르렀을 때도 그녀는 가뿐했다. 6시간 동안 한끼도 먹고 않고 계속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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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로.” “헬로, 카를라 소짜니와 통화할 수 있을까요?” “…프랑카에요.” 이런 젠장. 시작부터 불길한 징조다. “이런, 제가 실수를… 저, 저는 보그 코리아의 보라라고 해요. 지금 로비에서 당신을 찾고 있는데요.” “오케이, 오케이 지금 내려가요.” 인터뷰를 준비하느라 밤새 그녀에 대한 기사를 읽고 이탈리아 보그를 뒤적인 시간들이 전부 휴지통에 처박힌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12시에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고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가 정확하게 12시 10분이었으며 2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불현듯 기분 나빠진 그녀가 인터뷰를 거절하려는 게 아닐까라는 걱정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5분의 시간이 더 흐르고 모든 걸 내려놓은 체념의 상태에 이르자 마음도 평정심을 찾는 듯 했다. 그때 카를라, 아니 프랑카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싱긋 웃으며. “안녕!” 라파엘전파 그림 속 여인들처럼 플래티넘 블론드의 물결치는 머리카락과 투명한 하늘색 눈, 작고 마른 몸매, 늘 코트 호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두 손. 듣고 보던 바 그대로였다. 핵폭탄 윈투어에 대적할 지구상의 유일한 인물 프랑카의 첫인상은 솔직히 말해서, 새침하고 예쁜 여자아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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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GUE KOREA(이하 VK) 정말 미안하다. 긴장해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제발 잊어주기 바란다.
    FRANCA SOZZANI(이하 FS) 괜찮다. 사실 자주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늘 나와 언니 이름을 헷갈려 해서 나를 카를라, 언니를 프랑카라고 바꿔 부르곤 한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이런 일이 더 자주 생기는 것 같다.

    VK 그렇다면 다행이다. 여행은 어땠나?
    FS 어제 상하이에서 서울로 왔다. 패션 나이트 아웃 재팬 행사에 갔다가 중국에 머물렀다가 한국으로 왔다. 거의 2주째 아시아에서 머무르는 중이다.

    VK 한국은 전에 와본 적이 있나?
    FS 이번이 처음이다.

    VK 방문 목적에 대해 설명해 달라.
    FS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에 대해 알고 싶어서다. 중국은 대량생산과 모조품으로 유명하지만 며칠간 머문 상하이에서 목격한 젊은 로컬 디자이너들의 제품은 퀄리티가 좋고 디자인도 고상해서 놀랐다. 동리앙(Dong Liang)이라는 멀티숍에서 본 우마 왕(Umma Wang), 베가 자이시 왕(Vega Zaishi Wang), 리코 만치트 아우(Riko Manchit Au)의 리코스트루(Riscostru) 등. 요즘 한국이 세계적으로 관심의 대상인 만큼 한국 디자이너의 작품들만 모아놓은 숍에 가보고 싶다. 요즘 패션지를 보면 늘 똑같은 유럽 레이블들 뿐이다. 다음 세대를 책임질 디자이너를 발굴할 때다. 아까 말한 상하이의 디자이너들은 모두 이탈리아와 미국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한 이들이라는 점이 다소 아쉬웠다. 이제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향유하며 자란 디자이너 세대를 수출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유엔 산하 패션 기구인 ‘발전을 위한 패션(Fashion 4 Development)’의 첫 번째 홍보 대사로 서울에서 최초로 열리는 월드 패션 그랜드 프라이즈 시상식을 위해 왔다.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패션의 발전에 공헌을 한 개인과 기업을 선정, 수상할 예정이다.

    VK 패션 4 디벨롭먼트는 어떤 단체인가?
    FS 구호의 손길이 필요한 나라에 패션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민속품은 그들이 가진 훌륭한 수작업 기술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곳에 전문가를 보내 여성들을 교육시키고 자립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지원한다. 동시에 어린이들이 교육 받을 수 있는 환경과 기반을 마련하여 우리가 그 곳을 떠난 후에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VK 역시 당신은 사회 현상에 관심이 많다. 대학 때 전공도 영문학과 철학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FS 나도 패션계에서 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에 가서 공부를 할 계획이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 덜 똑똑하고 러시아어도 다 잊어버렸지만 재능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능력 발휘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지금의 일에 만족한다.

    VK 일을 시작한지 4년 만에 편집장 자리에 올랐다. 초고속 승진의 비결은?
    FS 난 정말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사람이다. 어떤 것도 미리 생각하거나 계획하는 법이 없지만 일을 분명하게 하고 생각나는 즉시 실행에 옮기는 편이다. 나는 매사가 확실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일을 잘하려면 좋고 나쁜 것을 볼 줄 아는 본능적인 감각을 갖추는 것 또한 중요하다.

    VK 처음 보그에 합류했을 때의 상황은 어땠고 어떤 방향으로 바꾸고 싶었나?
    FS 1988년 당시 이탈리아 보그는 패션 카탈로그였다. 아르마니나 페라가모 같은 주요 이탈리아 디자이너만 다뤘으며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당시 새로운 디자이너였던 프라다와 돌체 앤 가바나의 옷을 찍기 시작했고 광고주들 중에 그들을(혹은 이런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무리가 있어서 초기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 광고 수입은 줄어들었지만 꾸준히 세계적인 수준에 맞는 책을 만들었고, 성공적인 결과가 나오기까지 2년이 걸렸다.

    VK 이탈리아 보그는 사회적 이슈 뿐 아니라 철학과 과학까지 다룬다. 특별한 기준이나 이유가 있나?
    FS 오늘날의 패션 매거진은 단지 패션에 대한 것만 다루지 않는다. 독자들은 성형과 몸매에도 관심이 많고 패션은 음악이나 영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현실적인 내용을 싣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매거진은 애티튜드 즉, 삶에 대한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블랙 이슈를 만들게 된 계기는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미의 기준은 전혀 글로벌하지 않다는 사실이 넌센스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종과 국가에 따라 각기 다른 미의 기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데도 여전히 모두가 북유럽 출신 모델 같은 하얀 피부와 마르고 긴 팔 다리를 미의 필수조건으로 친다. 매거진은 현실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슈들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VK 이탈리아 보그 패션팀은 사회 이슈에 대한 화보를 다룰 때 주로 스티븐 마이젤과 자주 촬영을 하던데.
    FS 그는 천재다. 스티븐 마이젤 같은 포토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뿐이다.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으며 패션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는 놀라울 정도다. 그와 함께한 성형 수술 이슈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가진 판타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것을 비판하는 데 성공했다.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삶은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80살의 여성이 얼굴의 주름을 전부 당겨서 자신의 나이 답지 않게 보이는 것도,(여기서 프랑카는 자신의 얼굴 피부를 직접 당겼다) 요즘 10, 20대 젊은 여성들이 어린 나이에 보톡스를 맞기 시작한다는 것도 전부 충격적이다. 많은 이들이 그 화보에서 영감을 얻고 컨셉을 따라 했다.

    VK 화보의 컨셉이나 스토리를 정할 때도 그가 아이디어를 내는 편인가?
    FS 우리는 함께 아이디어를 내고 구상 한다. 블랙과 커비 이슈는 나의 아이디어였고, 성형수술 이슈는 공동 아이디어, 파파라치 이슈는 그의 아이디어였다.

    VK 늘 화보에 사회 현상을 반영하는 이유는 패션 피플들이 현실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해서인가?
    FS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는 건 순전히 내 아이디어일 뿐 누군가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머리를 쓰면 더 아름답고 더 글래머러스하고 더 매력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남들과 똑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VK 지난 9월호 아방가르드 이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FS 그런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물론 스텔라 테넌트도 실존 인물이지만!) 1940년대 이델 그레인저라는 여성으로 가는 허리에 대한 남편의 페티시 때문에 허리를 점점 조여서 가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녀의 몸매는 일반 여성과 다를 바 없었지만 허리만 집중적으로 줄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신체에 변형이 왔다. 내 허리가 60센티미터 정도인데 그녀의 허리는 34센티미터였다고 하니 얼마나 이상할지 상상해 보라! 나는 그녀가 똑똑한 여성임에도 남편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화보는 그녀의 진짜 삶에 대한 것이었다.

    VK 패션 매거진은 저널리즘보다 비주얼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FS 완전히 반대다. 저널리스틱한 관점을 비주얼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 물론 어떠한 시사적인 관점이 개입되지 않고도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사진을 볼 때 즉각적인 감정을 일으킬 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다. 컨셉이 이미지에 반영될 때 스토리는 훨씬 흥미로워지고 사람들은 컨셉 없는 비주얼에 대해 나쁘진 않지만 지루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VK 당신이 ‘시크하고 모던한 것은 때때로 지루하다’라고 말한 기사를 읽었다. 시크하지만 지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FS 지루하다는 것은 패션쇼에 갈 때 그 디자이너의 옷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고 가는 거다. 누가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한다면 난 그 대가로 돈을 요구할 거다. 내가 그의 옷을 홍보해 주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레이블을 신경쓰기 보다는 어떻게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느냐가 중요하다. 자신한테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을 줄 알고 한 브랜드의 옷을 다른 브랜드의 옷과 믹스매치할 줄 아는 센스. 그렇게 하면 당신의 룩은 훨씬 화려해질 거다. 레이블은 신경 쓸 필요 없다. 나도 디자이너 레이블을 자라나 유니클로와 함께 입곤 하니까.

    VK 자라와 유니클로에서 어떤 옷을 사는가?
    FS 자라에는 베이식한 것부터 트렌디한 것까지 모든 게 다 있다. 내가 가진 캐시미어 니트와 티셔츠는 전부 유니클로에서 샀다.
    VK 어제 명동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유니클로 매장이 오픈했다.
    FS 서울에? 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엄청나겠는걸! 꼭 가보고 싶다. 어제에 이어 또 쇼핑을 하게 되겠군.
    VK 어제 쇼핑을 했다고?
    FS 10 꼬르소 꼬모 서울에 가서 니나리치와 꼼데가르송 코트, 매리 카트란주의 로맨틱한 드레스를 샀다. 이 곳의 셀렉션은 밀란과 완전히 다르다! 같은 레이블의 옷을 팔지만 10 꼬르소 꼬모 밀란에는 없는 디자인이 정말 많다. 밀란은 하이엔드 레이블 위주의 블랙 의상이 많은데 반해 서울은 색감이 화려하고 구성이 다채롭다. 어제 본 10 꼬르소 꼬모 서울은 그 동안 내가 알고 있던 10 꼬르소 꼬모가 아니었고 그 덕분에 신나게 쇼핑을 즐겼다.

    VK 당신은 온라인 문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편이다. 당신의 블로그와 최근에 오픈한 보그 엔사이클로를 봤다.
    FS 온라인은 잡지의 확장이고 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 곳은 커뮤니티를 만들지 않아도 저절로 커뮤니티가 생긴다. 블로그를 오픈하기 전엔 모두들 나를 어렵고 멀기만한 존재로 느꼈다면 이제 지구상의 어떤 인물도 나와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내가 글을 올리면 그들이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고 내가 다시 댓글을 달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논쟁을 벌이곤 한다. 블로그를 연 이후로 전년도 대비하여 이탈리아 보그의 판매율이 40퍼센트나 증가했다.
    VK 그럼 인터넷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는 건가?
    FS 도구라기 보다 아주 좋은 기회라고 하겠다. 인터넷은 항상 에너지와 즉각적인 반응으로 넘쳐난다. 참, 중국판 페이스북인 weibo.com 에 가입했더니 금새 많은 사람들이 친구를 맺었다.

    VK 패셔니스타와 옷 잘입는 남자들을 싫어한다는 당신의 말에 완전히 동감하다. 그들은 마치….
    FS 마치 사진 찍히려고 옷 입는 거 같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옷을 입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서 옷을 입는다. 그 날 하루를 위해 옷을 입는 게 아니라 그 날 하루를 옷을 위해 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고 나가서 하루 종일 사진 찍히는 것만 신경 쓰고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신경 쓴다.

    VK 그들은 마치 옷에 압도 당한 듯이 보인다.
    FS 바로 그거다. 옷은 컴퓨터와 같다. 잘 사용하면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 패션 빅팀이 되고, 모든 것의 빅팀(희생자)이 되고 만다. 당신에게 맞는 옷을 선택하는 거지 당신을 옷에 맞춰서는 안된다. 패션은 자신의 히스토리다. 자신이 읽히고 싶은 대로 입는 거다. 나는 내면이 없는 ‘매거진’이 되고 싶지는 않다.

    VK 사람들은 당신과 미우치아 프라다가 패션계에서 보기 드문 전형적인 상류층 출신 엘리트라고 생각한다.
    FS 우리는 남들이 뭐라든 신경쓰지 않는다. 남들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당신의 생각과 자유는 속박당한다. 그녀와 나의 공통점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는 거다. 프라다는 매 시즌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나 또한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한다. 그리고 한 발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또한 필요하다. 너무 내 생각에만 빠지게 되면 그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 발 물러서면 전체를 볼 수 있고 그 비전을 잃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VK 최근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슈와 가장 실패라고 생각하는 이슈에 대해 말해달라.
    FS 최고의 이슈는 두 말할 것 없이 블랙 이슈다. 최악의 이슈는 리햅 이슈. 그때 당시 나오미 캠벨과 도나텔라 베르사체, 유명 록스타들이 전부 리햅에 가자 리햅에 가는 게 마치 유행처럼 번졌다. 내 지인 중 한 명도 리햅에 가볼까 생각 중이라고 하길래 마약하냐고 물어봤더니 그건 아니지만 그냥 좀 몸을 정화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그래서 스파에 가라고 말해줬다. 실제로 마약을 한 사람이 많았던 게 아니라 유명인들이 리헵에 가니까 리헵에 가는 게 하나의 유행이 된 거였다. 나는 그런 상황을 비꼬고 싶은 의도였지만 사람들은 내가 리햅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비하했다고 비난했다.

    VK 그럼 혹시 다음 호를 위해 계획 중인 쇼킹 이슈가 있나?
    FS 글쎄, 늘 그렇듯 이슈는 늘 그때 이슈가 되는 것들을 즉각적으로 다루다보니 미리 생각해둔 건 없다.

    12시부터 2시 반까지 할애해 주겠다던 시간이 거의 지나고 사진 촬영을 위한 30분이 남았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나랑 가고 싶은 곳이 어디죠?” 원래는 그녀에게 청담동이나 동대문 중 한 곳을 구경시켜 줄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인터뷰 진행 확인 차 메일을 주고 받는 동안 그녀가 약속한 시간이 점점 짧아졌기 때문에 인터뷰 만으로도 빠듯한 상황이었고, 한정식 대접은 커녕 코리안 패션 마켓 구경은 물 건너간 듯 했다. 그랬던 서울 구경 프로젝트는 인터뷰 도중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모를 그녀의 엄청난 추진력으로(일곱 번째 문답을 다시 읽어보길)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한 통의 전화로 뒤의 일정을 모두 취소한 그녀가 물었다. “아까 말했던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유니클로 매장은 어딘가요? 동대문 시장과 먼가요?” 어이쿠, 아주 가깝답니다. 인터뷰 도중 동양 최대 규모의 유니클로 매장이 오픈했다는 말에 순식간에 커다래진 파란 눈을 반짝이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하이엔드 매장은 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젊은 디자이너들과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이 입는 옷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명동 유니클로에 들렀다가 동대문 두타로 이동하기로 결정. 그녀의 친구이자 이탈리아의 유명 브랜드 컨설팅 회사 아틸라 앤 코의 안드레이나 롱기, 패션 4 디벨롭먼트 대변인인 사우스 사우스 뉴스의 에비 에반젤루가 동행했다. 토요일이기도 했지만 명동역은 오픈 이틀 째인 유니클로 매장에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관계자에게 부탁해서 건물을 몇 겹으로 둘러싼 사람들보다 먼저 매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프랑카의 쇼핑 타임 시-작! 그녀의 주위에는 너댓살 꼬마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모두 하나씩 바구니를 옆에 끼고 그 자리에서 입고 벗기를 반복하며 빛의 속도로 옷을 주워 담고 있었지만 그녀는 갤러리 구경하듯 느릿한 걸음으로 슬로우 쇼핑을 즐겼다. 함께 온 친구들과 라이트 다운 패딩(TV에서 가수 이적과 이나영이 광고하는 바로 그 제품)을 만지작거리며 이탈리아 어로 수근거리는 모습을 보자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아주 얇고 가벼워서 날씨가 추울 때 코트 안에 입으면 정말 따뜻하겠더군요.” 그러나 사지는 않았다. 분명 그녀에게 어울리는 옷은 아니다. 4층에 이르자 짐작대로 +J 라인이 걸려있는 곳으로 곧장 가더니 본격적으로 옷을 입어보기 시작했다. “색이 좀 어둡네요.” 칼라가 동그랗고 포켓이 사선으로 달린 자주색 울 패치 포켓 쇼트재킷을 입고서 한참 거울을 노려보던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회색이 도는 브라운 색으로 갈아입더니 마음에 든 표정. 허리에 귀여운 리본이 달린 같은 색의 울 하이웨이스트 턱스커트도 골랐다. “어떻게 입을 건가요?” “검은 스타킹에 고급스러운 힐과 함께 신을 거에요.”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자 그 옷을 입고 있는 파파라치 컷이 언제쯤 인터넷에 뜰지 궁금해졌다. 조밀한 와플 조직의 올리브색 크루넥 카디건과 검은색 비니까지 계산을 마친 그녀는 그때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엑설런트 쇼핑!” 친구들은 어제까지 중국에 있더니 옷도 메이드 인 차이나를 산다며 놀려댔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처음에 걱정했던 것과 달리 성공적으로 쇼핑을 마친 프랑카와 그녀의 친구들(!)은 쇼핑백을 하나씩 들고 유유히 유니클로 매장을 빠져 나왔다.

    동대문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프랑카에게 물었다. “그 코트는 어디서 샀어요?” “이거 어제 10 꼬르소 꼬모 서울에서 산 거에요. 꼼데 가르송. 안에 입은 건 돌체 앤 가바나의 별무늬 시폰 드레스. 이것 봐요, 두 브랜드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지만 이렇게 잘 어울리잖아요? 이런 게 옷을 입는 재미죠!” 참고로 신발은 로저 비비에의 파이톤 소재 키튼힐, 시계는 자그마한 케이스와 다이얼 전체에 다이아몬드와 유색 스톤이 파베 세팅된 예거 르꿀뜨르의 리베르소 오뜨 조아이에(리미티드 에디션임이 분명하다)를 차고 있었다.

    드디어 두타 도착. 안드레이나가 관광객 답게 두타 외관을 블랙베리 카메라로 찍어주는 센스를 발휘한다.(프랑카는 절대 찍지 않을 테니까) 확실치는 않지만 딱딱한 프랑카의 표정이 백화점 같은 외관에 실망한 듯도 하다. 입구에 들어서자 다닥 다닥 붙은 매장의 수에 다들 약간 질린 표정. 잠시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더니 “갈만한 곳을 좀 추천해줄래요?” 라고 내게 물어왔다. “글쎄… 여긴 다 비슷비슷한 수준이라… 일단 다 둘러봐야 할 것 같아요.” 잠자코 특유의 걸음 걸이로 매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의외였던 건 거의 모든 매장을 아주 꼼꼼히 둘러봤다는 것. 조용히 들어가서 볼만한 옷이 있는지 둘러본 다음 옷걸이를 잠시 관찰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거나 프린트가 화려하거나 디테일이 있는 옷들을 하나 하나 보고 다시 걸어 나오는 식. 물론 누구나 쇼핑할 때는 이런 순서를 거치지만 프랑카는 아주 주의 깊고 착실하게 순서에 따라 매장을 둘러봤다. 그녀가 유심히 봤던 것은 자잘한 꽃 프린트의 페전트 풍 드레스, 갖가지 화려한 프린트 의상들, 영국의 빈티지 샵에서 볼만한 아이보리 색의 레이스 장식 블라우스들, 부드러운 곡선 실루엣의 니트와 카디건을 좋아하는 듯 했다. 그리고 레오파드 인조 모피가 장식된 벙어리 장갑을 껴보거나 컬러풀한 가죽 가방이 가득한 매장에서 한참 머물더니 언제부턴가 카키색 밀리터리 파카를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걸 골랐나요?” 드디어 그녀는 후드에 라쿤털이 풍성하게 달린 카키색 파카 한 벌을 골라 입었다. “괜찮지 않아요? 편한 차림으로 나가거나 운동하러 갈 때 입기 좋잖아요!” 그리고 그녀의 친구도 모피처럼 보이도록 털실을 늘어뜨린 짧은 볼레로를 사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이럴 수가! 이게 100달러도 안한다구요!” 1층과 지하 1층을 둘러보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고 그녀의 친구 중 한 명은 힘이 들어서 먼저 차에 가 있겠다며 먼저 나간 상태였다. “어떤 것 같아요?” “글쎄, 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고 싶지도 않구요.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스타일을 즐기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아요.” 프랑카는 칭찬도 악평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원했던 젊은 한국 디자이너들의 특별함을 보기에는 부족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당장 저녁 식사 약속 때문에 떠나야할 시간이었고 일요일과 월요일까지 투어와 행사 스케줄로 일정이 빡빡했다. 오전에 그녀와 첫인사를 나눈 후로 벌써 6시간이 흘러있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나는 괜찮아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 1층으로 올라가면서 그녀는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혹시 배고프지 않게 해주거나 먹으면 하루를 거뜬히 견딜 수 있는 비밀의 알약을 먹는 건 아닐까? 나보다 30년이나 나이 많은 할머니한테 체력적으로 뒤졌다는 패배감에 말도 안되는 상상에 빠져있을 때, 프랑카가 갑자기 어느 신발 가게 앞에 멈추더니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기댄 하얀 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패션은 변해야 한다. 새로운 무언가가 일어나야만 하고 모두가 그 것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의 패션은 너무 지루하다.” 어쩌면 프랑카 소짜니는 여태껏 거의 음식에 의존하지 않은 채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건 패션 하나면 충분했을 테니까.

    * 이상 이 기사는 2011년 12월호에서 발췌했습니다.

    에디터
    송보라
    포토그래퍼
    CHO YOUNG 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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