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버린 사람들의 글쓰기

‘모바일 글쓰기’의 시대다. 특히 요즘은 익명으로 글을 쓰는 앱에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행복하지만, 여기엔 몇 가지 씁쓸한 이유가 있다.

드레스는 미스지 컬렉션 (Miss Gee Collection), 슈즈는 랄프 로렌(Ralph Lauren), 만년필은 까렌다쉬(Caran d’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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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콘텐츠 기획자인 차우진은 2016년 놓치지 말아야 할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으로 ‘씀’을 꼽았다. 씀은 ‘모바일에서 쉽게 글쓰기’라는 취지하에, 하루 두 번 주어지는 단어에 맞춰 글을 쓰는 앱이다. “하루 방문자 2만 명 중 1만 명이 글을 써요.” 지금까지 작성된 글은 100만여 개. 씀을 다운로드받으니 원고지 한 장이 뜬다. 최근 글쓰기 앱의 트렌드에 맞게 단순한 디자인이다. 그날의 단어는 ‘촛불’. 실명 대신 ‘루시’라는 가명으로 “꺼지지 마”라고 말장난을 썼다. 작성자만 볼 수도 있지만 공개할 수도 있다. ‘홍시’라는 사용자는 “촛불, 나를 태우고 너는 타든다”라고 시작하는 시를 지었다. 중학교 때 읽은 시집이 떠올라 닫아버렸다. 당연히 10만 사용자의 글쓰기 편차는 크다. 차우진은 독특한 컨셉의 필자를 정기 구독한다. ID ‘인스턴트 스릴러’는 아주 짧은 스릴러 소설을 쓰고, ID ‘유월에게’는 장거리 연애의 감정을 편지 형식으로 쓴다고(글감이 달라지는데 연재라니 대단하다). Mnet의 이예지 PD도 ‘씀’을 즐겨 사용한다. “글에 대한 갈망이 있어서 ‘글 쓰는 방법 100’ 같은 책을 사지만 여전히 새거예요. 이 앱은 내 삶이나 트렌드에 대해 쓰는 게 아니라 가벼운 글감을 던져주니까 부담 없어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는 허세처럼 보일까 봐 안 쓰게 되는 글이죠.”

이런 앱을 편하게 쓸 수 있는 이유는 ‘익명’이기 때문이다. 촛불 시를 올린 홍시도 익명이 아니라면 수차례 자기 검열 뒤에야 시를 올리거나,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씀에는 댓글 평가가 없고, 마음에 드는 글을 구독만 할 수 있다. 즉 긍정적 피드백만 받는 것이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이것이 이 앱의 존재 이유라고 했다. “글을 쓰는 행위는 비난과 칭찬의 줄타기에 있어요. 표현의 욕구가 있어도 함부로 실행 못하는 이유는 줄타기가 두려워서죠. 익명의 글쓰기 앱은 여기서 좀 자유롭죠. 만약 여타 익명 게시판처럼 비난이 가능해진다면 그 앱의 수명은 짧아질 거예요.“ 기획자 차우진은 다른 관점에서 앱의 수명을 얘기했다. “이제 플랫폼을 옮기려고요. 씀도 구독자(팬)를 확보하면서 내 글의 매력을 가늠할 수 있지만, 칼럼니스트인 저로선 익명보단 나를 드러내고 브랜딩하고 싶은 욕구가 있거든요. 일기장 역할(남들이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나 글쓰기 연습의 툴, 자신을 가린 채 커뮤니티 하고 싶은 이들에겐 이런 앱이 유용할 거예요.” 커뮤니티 기능은 무척 중요하다. 플로우스테이트(Flowstate)는 타이핑을 5초만 멈춰도 원고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맥 전용 앱이다. 카톡 메신저에 신경 쓸 새 없이, 두려움 없이 글을 쓰라는 취지의 비슷한 앱이 많다. 하지만 하다못해 씀의 구독자 숫자처럼 어떤 반응, 커뮤니티를 원하는 이들에겐 크게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다.

숨어서 쓴 글로 커뮤니티케이션 함에 있어 선두 주자는 ‘어라운드’라는 앱이다. 익명으로 글이나 고민을 올리면 익명의 누군가가 댓글을 다는, SNS와 다이어리가 결합된 형태다. 얼마 전 합정에서 관련 전시를 열고 <오늘, 내 마음을 읽었습니다>란 책도 출간했다. 사실 이러한 익명 앱은 2년여 전부터 미국에서 굉장한 각광을 받았다. 위스퍼(Whisper), 이크야크(Yik Yak), 시크릿(Secret) 등은 수백억의 투자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지만, 지금은 아예 문을 닫거나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 예상했듯 19금, 언어 폭력 등으로 형편없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국내도 어라운드를 비롯한 모씨, 블라인드 등 몇만 살아남았다. 청정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유지한 덕분이다. 초기 어라운드는 초대된 사용자만이 쓸 수 있었고, 남의 글에 단 댓글이 공감을 얻어 ‘버찌’를 획득해야만 자신의 글도 올릴 수 있다. 악플은 버찌를 얻지 못하니 자연스레 퇴출된다. 전문 카운슬러도 없는데 내 고민을 올려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었는데, 많은 사용자가 “이별하고 하루도 안 빼놓고 들어오네요. 여기서 위로와 공감, 힘을 얻어요”라는 식이다. 나도 언제부턴가 고민을 친구보다 여기에 털어놓는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고민은 친구나 친한 동료처럼 상호 간의 신뢰가 있어야 털어놓죠. 이는 책임감을 수반해요. 일방적인 의존이 아니라 나도 다음엔 상대에게 힘이 돼줘야 하는 사회적 의무가 있죠. 거기에서 스트롱 타이(강한 유대)가 나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스트롱 타이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내 이야기는 털어놓고 싶은데 책임은 지고 싶지 않죠. 이런 앱에선 서로가 익명이니 그런 의무를 행할 이유도, 할 수도 없어 많이들 찾는 거 아닐까요?”

씀, 어라운드를 비롯한 익명 글쓰기 앱의 선전에 대해,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김공회 연구위원은 세 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째, 한국은 유독 자기 신원이 노출되는 사회다. 이름, 고향, 학력을 전부 드러내거나 아예 익명을 선택하는, 모 아니면 도 체제다. ‘중간적’ 태도로 글쓰기란 어렵다. 둘째, 감시 체계가 일상화되어 있다. 입사 면접을 앞두고 SNS 게시물을 왜 지우겠는가. SNS에 글을 쓸 때도 부담감에 자기 검열을 한다. 퇴근 후에도 울리는 상사의 카톡이 말해주듯 우리 사회는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으며, 감시 체제가 일상화되어 있어 익명을 선호한다. 셋째, 출신 지역, 집안, 특히 대학이 그 사람의 인격까지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스펙의 필자는 신뢰가 급감한다. 익명은 이런 가치 판단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이다. 한 익명의 사용자는 “<복면가왕> 같아서 좋아요. 내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고, 읽는 이는 편견 없이 읽어주니까요”라고 말했다. 김공회는 아이러니하다고 덧붙인다. “글쓰기는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인데 우리 사회는 그러기 힘든 위의 조건들로 인해 익명 글쓰기 앱에 대한 수요는 늘어날 거예요.”

이들 앱을 꾸준히 사용하면서 특징을 하나 더 발견했다. 하나같이 자기방어적 글이다. 어라운드의 고민에는 낙태나 범죄, 살인 욕구처럼 수위 높은 고민은 없다. 다른 글쓰기 앱도 마찬가지다. 다들 교양 있고 지적이며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이다. 무명의 세계에선 새롭게 리셋한 나를 표현하는 글을 쓸 수 있다. 그것이 진짜 내가 아닐지라도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글을 쓰는 시간이 위로가 된다면 요즘 같은 세상에선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