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판의 전쟁

이제 취향을 고백하거나 무언가를 추천한다는 건 정치적인 행위에 가깝다. 취향으로 평판이 갈리는 시대, 우리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기 위해 까다로운 자기 검열 과정을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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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면 ‘올해의 책’ 또는 ‘올해의 저자’를 뽑아달라는 부탁을 여기저기서 받는다. 책 다섯 권과 저자 세 명을 따로 추천해달라는 식으로 요청해오는 곳도 있고, 그냥 딱 한 권만 찍어달라는 곳도 있다. 방식이 어떻든 추천인 입장에서 힘들긴 매한가지다. 추천하고픈 책을 고르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리고, 그 뒤에 한두 줄짜리 짧은 ‘추천 사유서’를 적는 작업에는 거의 시를 쓰는 것만큼이나 상당한 품이 든다.

왜냐하면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들에게 어떤 책을 권하면 좋을까’라는 처음의 질문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러하다. 결국에는 ‘나는 어떤 인간인가’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인간이라고 알릴 것인가’의 문제로 변질된다. 자칫 ‘책 통 안 읽는 사람이네’라는 비난을 받을까 봐 자기 검열을 하고, 어떻게 해야 ‘저 사람 책 좀 읽는구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바야흐로 우리가 사는 시대는 포스트-뭐라든가 하는 시대. 대부분의 사물이 비슷비슷하게 예쁘고, 대부분의 사상이 엇비슷하게 옳아서, 심지어 그게 돌고 돌아서, 진선미에 대한 진지한 헌신이나 변증법적 발전 따위는 당치도 않게 여겨지는 때다. 우리 시대에는 개인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그저 취향이 메운다. “난 어떤 영화를 좋아하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들어”라는 말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취향을 공개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실은 저스틴 비버를 좋아해’라는 고백이 ‘난 성격이 좀 까칠해’라든가 ‘동거 경험이 있어’라는 말보다 훨씬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이제 좋은 작품 추천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승부인지 이해하겠는가. 말하자면 칼 한 자루 들고 원형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네가 추천한 거? 나도 봤어, 그런데 X나 구리던데?’라든가, 반대로 ‘있어 보이려고 괜히 어려운 거 추천하네, 허세 쩌네’라는 반응이 한 인간의 고유한 개성과 존엄을 밑바닥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런 공격 앞에 나를 방어할 수 있는 무기는 한두 줄짜리 짧은 추천 사유서가 전부다. 그 한두 줄로 내가 추천하는 작품의 탁월함과 나의 뛰어난 안목을 모두 설명해야 한다.

포스트-뭐라든가 하는 시대에, 이 승부는 중학교 교실에서부터 노인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다.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싸우는 중이다. 사실 포스트-뭐라든가 하는 시대가 오기 전부터도 이런 개인 간의 결투는 모든 동네 골목 골목에서 늘 있었다. 거대 담론의 전쟁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을 뿐.

거대 담론이 증발했다는 사실 외에도 크게 바뀐 게 또 하나 있다. 누구나 정보와 매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는 점. 전문가를 지켜주는 권위 따위는 없다는 얘기다. 예전 같으면 원형경기장의 VIP석에 안전하게 앉아서 남들의 승부를 구경할 수 있었던 전문가들도 별수 없이 검투사 A, 검투사 B가 되어 경기장으로 내려와야 한다. 거기서는 수많은 준전문가와 딜레탕트와 힙스터와 덕후들이 전문가의 뺨을 때려보려고 벼르고 있다.

이제 대중문화 종사자에게 취향 고백이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인지 이해하겠는가. 이는 말하자면 그가 속한 취향 공동체에 하나의 어젠더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 어젠더는 공동체의 기존 관습과 적절히 불화해 도전적으로 보여야 하고(기왕이면 더 진보적이고 더 심오해 보여야 하고), 그러면서도 너무 멀리 나아가 취향 공동체 구성원들의 외면을 사면 안 된다. 그 추천은 그의 기존 취향과 일관성을 이루면서도 그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잘하면 ‘역시!’라는 감탄을 얻지만, 삐끗하면 ‘역시나…’ 소리를 듣게 된다.

이 절묘한 곡예에 비하면 진선미에 대한 진지한 헌신이나 변증법적 발전 따위는 얼마나 쉬운가. 참고할 책이나 이론도 많지 않은가. 우리는 육감에 의존해야 하는데. 진선미의 연구자들과 변증법의 수호자들은 자기 정체성을 놓고 승부를 건 것도 아니지 않은가. ‘틀렸다’는 말에는 반론을 펼 수나 있지, ‘구리다’는 말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나는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을 앞두고 스웨덴 한림원 회원들도 분명히 같은 고민을 했을 거라고 본다. ‘누구한테 상을 줘야 우리 안목이 뛰어나다고 다들 감탄할까? 어떻게 해야 노벨 문학상의 권위가 높아지고 화제성도 높아질까? 음, 밥 딜런한테 주면 다들 놀라지 않겠어요…?’ 내가 멋대로 상상하는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한림원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수상자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났고, “한림원이 문학의 경계에 대해 물었다, 그러니까 밥 딜런도 멋지지만 한림원도 멋져”라는 식의 분석 보도가 나왔다. 취향과 평판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몇 가지 편법이 있기는 하다. ‘내 취향은 싸구려 B급’이라고 선언한 뒤 당당하게 베스트셀러를 추천하고 이유를 독특하게 둘러대기, 마이너 장르를 하나 잡아 어느 정도 연구한 뒤 나의 추천작이 ‘그 장르는 아니지만 그런 장르적 요소가 있다’고 우기면서 넘어가기, 검증은 끝났으되 대세는 결코 아닌 과거의 고전을 몇편 골라 세상만사가 그 고전의 오마주라고 주장하기…

다만 이런 각각의 전술에는 치명적인 파해(破解)가 따른다는 점을 명심하자. 검증은 끝났으되 대세는 결코 아닌 과거의 고전을 들먹일 때 “그게 왜요? 과대평가된 1960년대 쓰레기 아니에요?”라는 핀잔을 들으면 당초 노렸던 효과는 휙 사라진다. 그 고전이 과대평가된 1960년대 쓰레기가 아니라는 점까지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될 수도 있다. 그 사태를 대비하겠다고 공부를 하면, 물론 그건 바람직한 일인데, 거기서부터는 쉬운 편법이 아니게 된다.

하여, 맥 빠지는 결론은, 내공과 정직이 최강의 무기라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포스트-뭐라든가 하는 시대에는 약간의 위장과 치장으로 내 취향을 가리거나 꾸밀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손쉽게 나를 포장하고, 손쉽게 좋은 평판을 얻고, 손쉽게 부와 인기를 누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전쟁터이고 원형경기장이다. 물론 운이 좋아서 승리하는 사람도 생기지만, 그건 모든 전쟁에서 다 그렇다. 나로 말하자면 지난달에 쏟아진, ‘올해의 책’과 ‘올해의 저자’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은 결국 모두 거절했다. “구간 위주로 읽기 때문에 올해 나온 책은 잘 모릅니다”라는 정직한 사유서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