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문화 지형도 새로 쓰기

제주에 책방과 문화 공간이 신나게 들어서고 있다. 이제 ‘미식 제주’가 아닌 ‘문화 제주’를 찾아 떠나게 될 것이다.

세로_무색

장난삼아 본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고 했다. 내 운명을 알려준다는 한자 여덟 개 중에 역마살을 상징하는 게 세 개나 들어 있다고. 그러고 보니 한 지역에 한두 달 머물면 좀이 쑤셨다. 그래서 여행을 꽤 다녔다.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못 견디는 불안함이 날 지배했다고 해도 좋다. 생각해보니 가장 오래 머문 도시 두 곳, 서울과 뉴욕에선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순간이 꽤 많았다. 그런데 고향 제주로 돌아오고 나서는 신기하게도 역마살이 희미해졌다. 바다가 보고 싶거나 산에 오르고 싶으면 1시간 거리 내에서 해결됐으니까. 이젠 도시에서처럼 예쁜 카페에서 책을 읽고, 좋은 전시를 보고 싶다는 희망도 제주에선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제주에서만 가능한 일이 더 많아졌다. 더 양질의 공간에서 독특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제주에 왔다. 바야흐로 자연과 공존하는 ‘문화의 섬’이다. 2016년 11월, 제주의 기획자, 디자이너와 함께 제주 책방 지도와 제주 문화 공간 지도를 만들었다. 책방 지도에는 2017년 오픈 예정인 공간까지 총 열세 곳이 포함됐다. 시골의 작은 동네 책방 컨셉으로 종달리에 처음으로 문을 연 ‘소심한책방’부터, 농사를 짓는 주인이 가게 문을 늦게 여는 헌책방 ‘책밭서점’ , 우도에 생기게 될 ‘우도서점’까지. 공간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있다. 내가 독립 출판 형식으로 운영하는 켈파트프레스에서 나온 신간 <뉴욕 생활 예술 유람기>의 출간 기념회에 부쳐 기획 · 배포한 제주 책방 지도는 반응이 후끈했다.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 한 달이 채 못 되어 1,000부의 지도는 소진됐고, 금세 재쇄를 찍었다. 독립 출판사의 프로젝트에 문화계가 보여준 많은 관심, 책방 지도의 소진 속도 등을 고려했을 때, 지금 소규모 출판과 서점에 대한 관심은 꽤 높아 보인다. 거기에 문화 예술의 섬을 꿈꾸는 제주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더해져 이야기는 풍성해져갔다. 지도를 가져가신 분들이 직접 서점 투어를 다닐지, 서점에서 책을 살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슈퍼마켓 하나 없는 시골 종달리에 오도카니 위치한 책방을 찾아 택시를 타고 나섰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오는 택시를 잡을 수 없어 고립된 관광객을 목격한 적이 있다. 원도심의 ‘라이킷’이라는 아늑한 독립 서점엔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위미의 ‘라바북스’는 동네 청년들의 아지트가 됐고, 책방 지도의 소진을 가장 먼저 알려준 곳이기도 하다. 단편적일지도 모르지만, 난 그렇게 서점이 살아 숨 쉬는 현장을 목격하고 체험한다. 제주 문화 공간 지도에 대해 말하려면 2016년 11월 18일에 시작해 2017년 1월 29일까지 열리는 제주도립미술관의 ‘비영리전시 공간 및 창작공간 아트 페스티벌 2016 AR TOWNS: 와랑와랑 모다드렁’전을 얘기해야 한다. 전국 대안 공간 20여 개가 모인 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 주최로 2012년부터 매해 전국을 돌며 ‘AR TOWNS’라는 행사가 열린다. 바로 2016년 행사 개최지가 제주였다. 내가 제주에서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기 때문에, 협회로부터 프로젝트 디렉터를 맡았다. 전국의 대안 공간이 제주로 오는 기본 행사에 더해, 제주의 문화 공간을 엮어 행사에 지역적 의미를 더하기로 했다. 제주의 문화 공간을 소개하는 아카이브룸을 빈티지 나무 감귤 박스로 연출하고, 그곳을 직접 찾아가는 프로그램이 더해졌다. 리플릿에 공간의 위치를 표시한 약식 지도도 만들었다. 기쁜 소식은 도립미술관의 아카이브 전시와 리플릿의 지도를 보고, 문화 공간을 찾는 이들이 늘어났다. 제주 거로마을에서 ‘문화 공간 양’이라는 전시장과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큐레이터가 직접 전한 소식이다.

공교롭게 제주의 책방과 문화 공간 지도를 만들면서 도구의 필요성을 알았다. 정보가 많은 시대다. 이제는 정보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를 잘 편집해 전달하는 능력을 높이 산다. 덕분에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고 선별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기획하는 일, 즉 큐레이팅 혹은 큐레이션이 주목받는다. 전시 기획자를 지칭하던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다양한 영역에서 재해석되며 조명받고, 많은 이들이 이 직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제주 역시 같은 맥락에서 큐레이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젊은 기획자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기획자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고, 외부 기획자 영입도 열심이었다. 2010년을 전후해 관과 민이 협력이라도 한 듯 다양한 문화 공간을 폭발적으로 만들어낸 데 반해, 전문 기획자의 존재가 부재하다는 게 큰 문제점이었다. 이젠 이마저도 달라질 모양이다. 젊은이들이 재미있는 일을 해보겠다고 제주에서 신나는 판을 부지런히 벌이고 있다. 애월읍 봉성로에 있는 ‘재주도 좋아’라는 예술가 그룹은 비치코밍을 주제 삼아 공예품을 제작하고 작가 레지던시를 이어간다. 수줍음 많은 작가 부부가 꾸리는 ‘지구방문자’는 조천에 위치한 아기자기한 작업실을 대중에게 개방하고 작품을 판다. 제주 원도심의 문화재 향사당은 예술가들이 전시와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모든 공간이 특색 있고 의미 있어, 마음먹고 들러도 손색없다.

이런 생각이 든다. 놀이터가 생기니 저절로 큐레이터가 양성되지 않겠나 싶은 거다. 어린애들처럼 놀이터에서 놀면서 저절로 노는 방식을 찾고 실패도 하면서, 한 명 한 명의 귀한 전문가들이 양성될 듯하다. 뉴욕에서 급작스레 제주로 이주한 나의 경우, 시골에서 즐겁게 일할 거리가 없을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제주는 이제 놀면서 일할 거리로 가득하다. 문화 기획이란 기본적으로 남이 잘 놀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일이고, 그래서 일하는 나도 잘 놀아야 한다. 2016년 11월은 개인적으로 유난히 잘 놀았던 달이고, 지난 1년 내내 돌아봐도 역시 대체로 즐겁게 놀았다. 이 즐거운 놀이에 대한 공은 제주에 돌려야 한다. 제주에 ‘2017년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를 전해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