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백패킹

캠핑장에서 떠들썩하게 고기를 구워 먹는 오토캠핑이 가족 단위의 여름 레저라면 조용히 떠나는 백패킹은 쌀쌀한 계절에 어울린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요즘처럼 추운 겨울엔 더 낭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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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다닌 건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다. 정초부터 홀로 눈 덮인 한라산을 오른 것을 시작으로 틈날 때마다 가까운 산을 찾아 한나절을 보내다 오곤 했다. 특별히 산이 좋아서라기보단 딱히 할 일이 없어서였다. 줄곧 남이 정해준 일과에 맞춰 살아오다 갑작스레 뭉텅이의 시간이 내 손에 쥐여지자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출근도 퇴근도 없는 그 모호한 공백의 지루함과 왠지 모를 불안감을 털어내고자 무작정 산에 올랐다. 땀 흘리고 난 후의 상쾌함도, 혼자 산길을 걸을 때의 적요함도 좋았다. 산의 정적은 도시의 적막과 달리 푸근한 온기가 있다. 낙엽이 떨어질 때의 부스럭거림, 다람쥐의 날쌘 발걸음 소리,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오색딱따구리의 규칙적인 나무 울림, 살짝 언 개울물에 떨어진 고드름의 맑은 파열음. 밤의 숲은 더욱 아름답다.

등짐을 지고 떠돌다 원하는 장소에서 하룻밤 이상 야영하는 백패킹은 자동차로 여행하는 오토캠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캠핑장에서 떠들썩하게 고기를 구워 먹는 오토캠핑이 가족 단위의 여름 레저라면 조용히 떠나는 백패킹은 쌀쌀한 계절에 더 어울린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특히 요즘처럼 추운 겨울엔 더 낭만적이다. 맨손으로 불을 피우는 베어 그릴스나 ‘정글’의 김병만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동계 장비는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오토캠핑과 비교한다면 백패킹은 거의 맨몸으로 움직이는 거나 다름없다. 초경량을 자랑하는 헬리녹스 의자조차 백패커에겐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니까. 갈런드나 꼬마전구 같은 장식 소품은 말할 것도 없다. 배낭의 무게가 15kg을 넘으면 일단 걷기가 힘들다. 따라서 꼭 필요한 물품을 신중히 선별해야 한다.

우선은 물이다. 1박의 경우 1인당 최소 1.5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식수대는커녕 화장실도 없는 산꼭대기에선 커피 한 잔도 귀하다. 세수와 양치질은 선택 사항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위해 물티슈와 손 소독 티슈 정도는 챙겨도 좋다. 여기에 영하 10℃까지 사용 가능한 침낭이 약 2kg. 매트리스, 텐트, 코펠, 핫팩까지 보태고 나면 배낭은 이미 어린아이만큼이나 묵직해진다. 별것 아닌 것 같은 핫팩도 일곱 개면 1kg이 넘는다. 그리고 약간의 음식과 갈아입을 티셔츠, 헤드램프, 밥숟가락. 화기 사용이 금지된 곳만 아니라면 휴대용 우드스토브도 요긴하다. 잔가지와 솔방울을 태워 불을 지피면 은은한 솔 냄새가 찬 공기 속에 스며든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바라보는 불의 움직임은 또 얼마나 평화로운지. 파도와 불꽃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원시의 춤이다.

이 정도면 준비는 충분하다. 장비에 돈을 쓰겠노라 마음먹으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캠핑의 세계지만 전생의 업보만큼이나 묵직한 배낭을 메고 산을 올라보면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다. 매번 짐을 꾸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치도 않다. 단 한 가지 고민거리는 화장실인데, 가급적이면 미리 볼일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여의치 않다면 휴대용 화장실 키트를 준비해가는 것도 방법이다. 장담컨대 대자연 속에 궁둥이를 들이미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난 30년간 잊고 살던 색다른 시원함이랄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NLT(Leave No Trace) 원칙만 명심하자. 배변물과 음식물 쓰레기는 물론 양칫물도 반드시 페트병에 담아 갖고 내려와 처리해야 한다. 사유지 및 국공립 공원의 불법 야영과 더불어 이 부분은 상당히 예민한 문제인데, 잣나무 숲으로 유명한 호명산, 간월재와 더불어 백패킹 4대 성지로 꼽히던 굴업도 개머리언덕과 선자령 바람의 언덕은 일부 캠퍼들의 몰지각한 행동으로 현재 야영이 금지된 상태다.

굳이 멀리 떠날 것도 없다. 이번 겨울에만 두 차례 오른 불암산도 매력적인 야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불암사에서 출발해 깔딱고개, 거북바위를 거쳐 정봉에 오르는 코스 자체는 짧은 편이지만 바위산이라 제법 산을 타는 기분이 난다. 체력만 허락한다면 인근 수락산의 명물 기차바위까지 도전해볼 수도 있다. 경사가 70도쯤 되는 바위인데 오직 밧줄에만 의지해 30여 미터를 올라가야만 한다. 초보자라면 아마 배낭의 무게 때문에 짜릿함 따위는 패스하고 싶어질 것이다. 사실 짐을 짊어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동안엔 기분이고 뭐고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저 한 걸음을 옮기고 나면 또 다른 한걸음이 있을 뿐. 다행스러운 건 하산은 다음 날의 몫이라는 것이다. 다른 등산객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일몰 무렵 적당한 박지에 텐트를 치고,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면 본격적인 야영이 시작된다.

어둠이 발끝까지 검은 옷자락을 펼치고 나면 산 아래 작은 도시는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불빛으로 반짝인다. 사방이 고요하다. 마치 우주 한가운데에 있는 듯하다. 산꼭대기에서 맞이하는 동트는 아침은 또 어떤가. 느긋한 새벽안개 속에서 청초한 숲과 능선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한낮의 기개나 밤의 우아함과는 또 다른 산의 얼굴이다. 등산객이 몰려들기 전에 서둘러 텐트를 정리하고 산을 내려와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나면 하산의 피로도 싹 가신다.

불암산 정상 다람쥐광장엔 고양이가 몇 마리 산다. 몇 해 전 누군가 버리고 간 임신한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것이다. 처음엔 미처 사료를 준비하지 못해 배낭에 있던 편육과 과메기를 조금 나눠줬는데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다. 밤을 같이 보내며 정을 쌓은 이 고양이들도 산을 다시 찾게 하는 이유가 됐다. 물론 내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서 만난 한 사진작가는 팔공산에서 멧돼지를 만난 후 혼자 하는 야영은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장엄한 브로모 화산을 보며 만약 가능하다면 다음번엔 백패킹으로 저 산을 오르고 싶다고 했으니, 한번 경험한 사람은 여간해선 백패킹의 매력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음 목적지는 경기도 이천의 원적산이다. 원적봉에서 천덕봉까지 좁은 능선길을 따라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걷는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이웃집 요정 토토로와 원령공주가 사는 야쿠시마 섬, 제주도, 하와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백패킹 일정은 벌써 내년까지 빼곡하다. 폭설이 내리거나 날씨가 너무 추운 날엔 산속 야영 대신 남산이 보이는 지인의 집 옥상에 화롯대와 텐트를 설치하고 밤을 보내기도 한다. 장작 한 박스를 다 태우는 데 3시간이 걸린다. 우리의 밤도 딱 그만큼이다.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지루할 틈이 없다. 누군가는 멀쩡한 집 놔두고 고생이라며 고개를 젓겠지만, 모험 대신 안전한 이불 속을 택할 사람이라면 애초에 회사는 왜 그만뒀겠나. 좀 불편하고 그보다 더 많이 불안할지라도 일단 배낭을 짊어지고 대문을 나섰다면 나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혹시 아는가. 어쩌면 정말 멋진 일이 생길지. 멋없는 이 사회와는 별개로 이미 자연은 충분히 멋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