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공포의 8할은

최근 〈공포의 세기〉라는 장편을 펴낸 소설가 백민석에게 직접 물었다. 왜, 어째서, 어떻게 이렇게 무시무시한 작품을 쓴 건가요? 백민석식 도발과 공포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James Ensor, ‘My Portrait Surrounded by Masks’(1899).

James Ensor, ‘My Portrait Surrounded by Masks’(1899).

내가 살던 서울 서대문구 홍제4동의 재래시장을 막 벗어난 길목 어귀에 만화방이 있었다. 겨울이면 발갛게 달아오르는 연탄난로를 지피던 곳인데, 형광등이 한둘밖엔 달려 있지 않아 늘 어둠침침했다. 나무틀과 유리로 엮어 짠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면 냉기가 밀려들면서 눈 덮인 길목 풍경이 언뜻 눈 시리게 번뜩였다. 그때는 참 눈도 많이 왔다. 나는 만화방에서 소설을 더 많이 읽었다. 존 카펜터 감독의 <더 씽>의 원작 소설인지도 모르면서, 존 W. 캠벨 주니어의 소설을 읽기도 했다. 눈보라 치는 남극기지에 연구원들이 외계인의 사체를 발견해 기지로 가져온다. 그리고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신체 약탈자 서사의 전개대로 흘러간다. 외계인은 인간의 육체를 감염시키고, 숙주로 삼고, 몸과 정신을 먹어 치운다. 외계의 존재가 인간의 영혼을 지배한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연구원들이 외계인에게 감염되었다며 서로가 서로를 의심할 때 드러나는, 인간의 어둡고 착란에 사로잡힌 심리이다.

덧붙여 살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남극의 추위, 눈뿐인 세상 풍경. 난로가 있는 만화방의 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그런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내가 뭘 읽었는지는 사실 정확한 기억이 아니다. 정확한 것은 남극기지 사람들의 그 광란에 빠진 심리에 대한 내 공포뿐이다.

제대로 된 번역본을 읽기나 했는지도 의심스럽다. 아마 추측하건대, 그 문고판 소설은 나 같은 어린아이도 읽을 수 있게끔 축약되고 쉽게 고쳐 쓴 요약본이 아니었을까. 80년대에는 원작가도 분명치 않고 번역도 제대로 되지 않은 소설이며 만화가 많았다. 무협지의 작가는 대개 중국 협객풍의 필명이었고, 만화는 대개 일본 만화를 베낀 것들이었다. 존 W. 캠벨 주니어의 소설도 그렇고 그때 내가 읽은 다른 SF나 공포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그런 책을 읽는 재미가 반감되는 건 아니다. 원작을 읽기 쉽게 고치면서 작품성의 훼손은 일어나겠지만, 이를테면 <투명인간>의 결말부에서 느껴지는 그 끔찍한 공포까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허버트 조지 웰스의 <투명인간>도 작가도 모른 채 문고판으로 읽은 소설이다. 아마도 마지막 장면에서 투명인간은 그를 잡으려는 사냥꾼들이 거리와 지붕에 뿌려놓은 유리 조각을 맨발로 밟으며 도망갔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도 뚜렷한 공포의 내용은 유리 조각에 맨살이 베이고 찢길 때의 마치 내 것 같은 고통과 끔찍함, 뚝뚝 떨어지는 피를 눈앞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혐오감이다.

다른 책도 있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도 마르셀 에메라는 멀쩡한 작가가 있는 줄도 모르고 읽었던 소설이다. 한 남자가 어쩌다 보니 벽을 드나들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을 갖게 된다. 기억나는 건 벽을 통과하다가 한순간 벽 속에 갇히는 마지막 장면이다. 벽을 드나드는 남자는 탐욕을 부렸을 수도 있고 교만했을 수도 있다. 탐욕과 교만은 서양 문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인간의 죄악이다. 그렇다면 그는 벌을 받았을까. 하지만 어린 나는 권선징악의 교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머리에 가시처럼 지금도 박혀 있는 것은 벽에 갇히고 벽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 순간에 주인공이 느꼈을 공포, 산 채로 벽 속에 묻히는 공포다. 사방에서 벽이 조여오는 느낌, 심장을 압박하는 시멘트의 물성, 죽음보다 더 두렵게 결박해오는 갑갑함,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부자유.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소설가가 되어 한 번 더 읽었다. 만화방에서 읽었을 때는 그토록 무서운 공포 소설이었는데, 성인이 되어 예전의 그 공포의 맛을 다시 느껴볼까 하는 마음으로 다시 들춰 보니 글쎄 그게 공포 소설은 아니었다. 공포라기보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풍자소설에 더 가까웠다.

홍제4동 만화방은 어릴 때를 돌이키면 꼭 떠오르는 공간이다. 늘 어둠침침했지만, 그 어둠침침은 기분 나쁜 어둠침침함이 아닌, 약간 슬픈 기운에 젖어 있고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어둠침침이다. 그리고 늘 한겨울이며, 늘 가운데는 난로가 있다. 누군가 미닫이문을 열면 잠깐 열렸다 닫히는 문틈으로 눈 쌓인 골목 풍경이 시리게 비쳤다.

어째서 그 만화방이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늘 같은 계절 속에서 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는 병적인 어떤 기억, 붙들림, 고착이 아니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나름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기억이다.

그때 읽은 책 중에 제목이나 줄거리가 기억나지 않아 지금 말할 수 없는 작품도 읽었다. 얼어붙은 숨결을 내뿜는 여성 유령이 나오는 소설도 읽은 듯하고 늑대인간이 등장하는 소설도 읽은 듯하다. 펜으로 세밀하게 묘사된 삽화가 포함된 그 문고판 소설들은 깔끄러운 촉감이 나는 비닐에 표지가 덮여 있었다. 삽화가 많이 실려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상당히 정교한 실력으로 그려진 그 삽화가 20페이지나 30페이지에 한 장씩 나올 때마다 감탄이 섞인 눈길로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때로는 소설 내용보다 삽화가 더 무서웠다. 얼마 전에 장편소설 <공포의 세기>를 펴냈다.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고 충분히 독자의 공포심을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이니 공포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물론 장르의 규칙을 따르고 있지 않으니 장르 소설로서의 공포 소설은 아니다. 공포가 주된 정서인 소설이라고 해두자.

나는 어떻게 공포가 주된 정서인 소설을 쓰게 됐을까. 앞서 만화방에서의 독서 체험을 얘기했으니, 어릴 때 그런 소설만 들입다 읽어서 다른 건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달달한 사랑 이야기나, 가슴 먹먹한 애잔한 상실이나, 위로와 위안이 되는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는 쓸 줄 모르는 게 아닐까.

물론 그렇지 않다. 어릴 때의 독서 체험이 소설가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정말로 공포를 느꼈던 순간은 책하고는 무관하다.

만화방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릴 때부터 인간의 마음속 일에 관심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화방에서 읽었던 소설에서 내가 정말로 보았던 것은 외계인한테 뜯어 먹힌 인간의 사체나, 투명인간의 존재를 드러내는 지붕 위의 핏빛 발자국이나, 벽 속에 매장되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기이한 남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 자극은 공포라기보다는 잔혹함이나 그로테스크함이라고 불러야 한다.

만화방에서 내가 보고 매혹된 것은 아침에 함께 밥을 먹었던 동료 연구원을 외계인이 아닐까 의심하며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인물의 광란에 빠진 마음속이었다. 고통에 찬 번민 끝에 유리 조각이 가득 깔린 지붕 위를 맨발로 뛰어 달아나야 했던 투명 인간의 참혹한 마음속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바람처럼 드나들던 벽 속에 문득 손발이 묶여버린 순간 그 사내의 마음속에 요동쳤을 당혹감이었다.

공포란 눈에 보이는 피 튀기는 장면만은 아니다. 공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읽고 있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는 전쟁에 나가 처음 사람을 쏘게 된 저격수의 진술이 나온다. “손이 덜덜 떨리고, 온몸에 전율이 흐르면서 오한이 나기 시작했어. 무섭고…” 이 저격수의 공포는 마음속에서 일기 시작해, 피부로 체온으로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공포는 심리의 영역에 속하므로, 마음 바깥에 있지 않다. 시각이나 청각 같은 외부 자극에 의해 촉발될 수는 있어도 외부의 것이 아니다. 외부 자극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 공포도 흔히 있다.

내가 옛날 만화방에서부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지금 <공포의 세기>를 써내면서 항상 관심을 가졌던 것은 공포만이 아닌 인간의 심리 작용 전반, 인간의 정신 작용 전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세상의 흐름과 부딪혀 갈등하고 영향을 주고받고, 때로는 폭발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공포는 그저 인간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한 여러 경로 중 하나다.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우리가 흔히 열등감이라고 알고 있는 콤플렉스는 애초에 프로이트가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복잡하고 복합적인가 하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썼던 말이다. 인간의 어떤 말, 어떤 행동은 한두 가지 단순한 원인에 의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말이나 행동은 콤플렉스라는 말을 써야 설명이 가능해질 만큼 여러 가지 원인과 동기를 갖는다. 공포도 마찬가지다. 공포는 단순히 ‘무섭다’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마음과 행동, 그리고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의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공포를 통해 인간의 복잡성을, 세상의 복합성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