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binet of Curiosities – ① 손야비

중세 귀족들은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진귀한 물건을 한 방에 차곡차곡 모아뒀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패션 수집가 2인도 오래전부터 ‘호기심의 방’을 만들었다. – ① 손야비

Raf and I

라프 시몬스 컬렉션의 아카이브 피스를 모으는 컬렉터 손야비. 2000 S/S 피라미드 재킷, 2002 F/W 스타디움 재킷, 2005 F/W 영화 《폴터가이스트》 그래픽이 그려진 코트는 물론 마르지엘라, 헬무트 랭의 희귀한 제품도 수집한다.

라프 시몬스 컬렉션의 아카이브 피스를 모으는 컬렉터 손야비. 2000 S/S 피라미드 재킷, 2002 F/W 스타디움 재킷, 2005 F/W
영화 《폴터가이스트》 그래픽이 그려진 코트는 물론 마르지엘라, 헬무트 랭의 희귀한 제품도 수집한다.

지난해 26세의 스타일리스트 데이비드 카사반트는 라프 시몬스와 헬무트 랭 옷의 박물관급 컬렉션으로 패션계에 이름을 알렸다. 스타일리스트 케이티 그랜드, 카린 로이펠트는 그의 옷으로 화보를 찍고 칸예 웨스트와 리한나, 레이디 가가는 옷을 빌려갔다. 그런데 카사반트에게 옷을 빌려주는 ‘또 다른 컬렉터’가 있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 주인공은 또래의 한국인이다. “카사반트가 요즘 래퍼 트래비스 스캇을 스타일링해요. 트래비스 스캇이 입는 컬렉션 피스의 반이 제 것이라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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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야비가 라프 시몬스 2000 S/S ‘숨마 쿰 라우데’ 컬렉션 MA-1 재킷을 입고 촬영장에 나타났다. 얼굴을 칭칭 두른 두건은 2002 S/S 컬렉션 아이템. 모두 당시 컬렉션을 대표하기에 ‘아카이브 피스’로 지칭된다. 현재 이 옷을 구하려면 인터넷에서도 찾기 힘들거니와, 가격을 듣고 나면 찾아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 재킷은 이베이 경매에서 낙찰받아서 약 7,000달러(약 843만원)에 샀어요. 싸게 산 거예요. 평균가는 1,000만원이 좀 넘죠.” 이렇듯 고가의 제품을 무료로, 그것도 장기간 카사반트에게 대여해주다니!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카사반트가 진짜 열정이 있는 인물 같아요. 그를 통해 멋진 사람들이 멋진 옷을 입으면 좋은거 아닐까요? 그 옷의 가치도 점점 올라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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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야비의 직업 역시 스타일리스트다. 혁오, 장기하와 얼굴들, 카 더 가든의 스타일링을 담당했으며 자신이 모은 60~70년대 밴드 티셔츠를 종종 뮤지션들에게 입히곤 했다. “당시 활동하던 밴드들의 투어 상품을 모읍니다. 좋아하는 영화의 티셔츠도 구입하죠.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가 1971년 개봉할 당시 나왔던 티셔츠도 있어요.” 40년이 훌쩍 넘은 이 셔츠는 현재 900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그의 티셔츠 컬렉션 중에는 1994년 슈프림이 뉴욕에 첫 매장을 냈을 당시 20장 한정으로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이미지를 인쇄해 팔았던 것도 있다. “잡지 <콤플렉스>에서 400만원 주고 이 티셔츠를 사겠다고 한 적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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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난만하게 “입을 옷을 살 뿐”이라고 말하는 손야비가 본격적으로 옷을 수집한 건 중학교 때 이베이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 “아버지가 옛날부터 기계를 수집하셨어요. 몬스터카라고 한국 도로법상 일반 도로에서는 주행할 수 없는 차인데, 그걸 모으셨죠. 저는 옷에 관심이 많아 옷을 샀어요.” 처음 꽂힌 디자이너는 디올 옴므의 에디 슬리먼. 2001년부터 에디가 브랜드를 떠나는 2007년까지 옷을 수십 벌 사들였다. 2007년에는 고등학교 2학년. 그때까지 모은 디올 옴므 블레이저와 디스트로이드 진은 집 안에 설치된, 10m는 족히 되는 특수 제작 행어에 고이 걸려 있다. 학생 용돈으로 디올 옴므를 사는 게 가능할까? “구글 블로그 광고 수익료를 모아 샀어요. 당시 구글 블로그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제 나이대에 비해 큰돈을 벌었죠. ‘데일리 오퍼레이션’이라는 패션 블로그였는데 패션 카테고리에서는 꽤 높은 랭킹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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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슬리먼의 친필 편지까지 수집할 만큼 수년간 에디 슬리먼만 바라보다가 라프 시몬스로 ‘갈아탄’ 건 에디의 은퇴가 결정적 계기였다. 현재 그가 지닌 컬렉션 옷 중 라프 시몬스는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손야비가 생각하는 시몬스의 황금기는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이 기간에 나온 아이템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2003 F/W 시몬스가 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새빌과 함께한 컬렉션의 모든 옷을 입어봤어요.” 후드 코트 등판에 꽃 그림과 사진 콜라주, 조이 디비전의 <Unknown Pleasures> 앨범 커버가 인상적이었던 바로 그 컬렉션! 하지만 단순히 돈이 많다고 지금 수준의 컬렉션 피스를 모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손야비는 다년간 이베이와 개인 거래를 통해 전 세계에 포진한 판매자들을 알게 됐고 오프라인 패션 매장까지 뚫을 정도로 친구를 사귀었다. 예를 들면 희귀한 물건이 유럽에 매물로 나오면 오스트리아에 있는 친구가 좋은 가격에 구해주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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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매물’의 기준은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데까지 미친다. 라프 시몬스가 과거 연인이었던 베로니크 브랑키노와 함께 만든 여성복 브랜드 ‘루포 리서치(Ruffo Research)’도 모았다. 여성복이라 입지 못해도 시몬스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루포 리서치의 아이템이 인터넷에 떴을 때 사지 않으면 영원히 그걸 가질 기회는 없다고 생각해요. 잘된 브랜드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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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모으는 것은 옷에 한정되지 않는다. 라프 시몬스의 책 <Isolated Heroes>, <Raf Simons Redux>, <The Fourth Sex>는 물론 컬렉션 당시 제작된 룩북, 유튜브가 없던 시절 DVD로 남아 있는 컬렉션 동영상, 시몬스와 관계된 건 모조리 수집한다. 그와 오랫동안 같이 작업했던 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드 포터의 홈페이지는 리뉴얼을 대비해 매번 이미지를 미리 다운로드해둔다. 이 정도까지 들으면 ‘뭘 그렇게까지?’라는 빈정거림이 아닌 놀라움과 경외의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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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8,700km나 떨어진 이역만리 벨기에 디자이너의 흔적을 수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라프 시몬스 2001 F/W ‘Riot Riot Riot’ 컬렉션의 탄띠 벨트를 구입할 때가 힘들었어요. 벨트에 모형 총알이 달려 있었는데, 세관에서 검시관들이 총알 모양이니까 펜치로 총알을 뜯은 거예요. 세관에 걸려 증빙 서류만 일주일을 준비해갔어요.” 컬렉션이 망가지는 것보다 더 골치 아픈 건 따로 있다. “총알이 ‘무기류’로 취급되니 이렇게 한 번 걸리고 나면, 이후 제가 해외에서 들여오는 물건이 대부분 세관에서 검사를 받아요. 배송이 늦어지는 것만큼 싫은 것도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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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보증서를 발급해주는 매장에서 사는 것도 아니기에, 인터넷을 통한 직거래는 위험부담도 크다. “지난해 중순에 600만원어치 사기를 당했어요. 중복된 아이템을 해외에 팔려고 내놨는데, 페이팔 시스템 때문에 손해를 봤죠. 구매자가 제 계정에 카드 결제를 하고 제가 물건을 보냈는데, 그 사람이 물건을 받지 않았다고 카드 회사에 항의해 구매가 취소됐어요. 저는 공짜로 그 사람에게 옷을 준 셈이 된 거죠. 그래서 진짜 믿을 만한 사람, 대개는 지인과 거래해요.” 그중에는 어렵게 사들였지만 되판 아이템도 있다. 아이템이 중복되거나,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두 가지 상황에 한정된다. 가격이 천문학적으로 올랐다고 되팔진 않는다. ‘리셀러’들이 들으면 펄쩍 뛸 수도 있지만, 전시에 비유하자면 그의 컬렉션은 기획전보다 진득하게 축적한 소장품 상설전에 가까운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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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프 시몬스가 나오는 영화 <디올 앤 아이>는 스무 번도 넘게 봤어요.” 다가오는 2월 뉴욕 캘빈 클라인 컬렉션으로 돌아오는 라프 시몬스의 소식은 그에겐 좋아하는 가수의 컴백만큼 반갑다. “솔직히 2005년 이후의 라프 시몬스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이후의 옷은 잘 모으지 않았죠. 질 샌더와 디올에서 일할 때도 그가 만든 옷은 멋있지 않았어요. 시몬스는 기성복에 적합한 인물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그는 시몬스가 만들 캘빈 클라인에 거는 기대가 크다. 시몬스의 캘빈 클라인 컬렉션이 그가 2017년 ‘See Now, Collect Now’ 하는 동시대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캘빈 클라인이라면 라프 시몬스의 젊음(Youth)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