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Cabinet of Curiosities – ② 이지현

2017.02.02

by VOGUE

    Cabinet of Curiosities – ② 이지현

    중세 귀족들은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진귀한 물건을 한 방에 차곡차곡 모아뒀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패션 수집가 2인도 오래전부터 ‘호기심의 방’을 만들었다. – ② 이지현

    The Art of Shopping

    디자이너 이지현은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제품이라면 무엇이든 수집한다. 브랜드는 발렌시아가, 발맹, 셀린, 발렌티노, 랑방, 생로랑으로 다양하며, 남성복과 여성복의 구분 또한 없다.

    디자이너 이지현은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제품이라면 무엇이든 수집한다. 브랜드는 발렌시아가, 발맹, 셀린, 발렌티노, 랑방, 생로랑으로 다양하며, 남성복과 여성복의 구분 또한 없다.

    “이 차로는 제 옷을 못 옮겨요.” 1톤 트럭과 함께 집을 방문한 에디터를 보자마자 인터뷰이가 쏘아붙인 말이다. 사전에 요청한 행어 여섯 개와 신발 박스를 담을 수 있는 이삿짐 박스도 준비했는데,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건지 의아했다. 날개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탑차를 부르고 행어째 옷을 옮기게 되고 나서야 그녀의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해가 됐다. 우리는 이삿짐을 옮기러 온 게 아니라 한 사람이 평생 모은 작품을 운반하러 온 것이라는 걸. “옷을 잡을 때 주의해주세요!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아기를 안듯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리고 어깨가 마비될 만큼 많은 옷을 낑낑거리며 옮기고 있는 나에게 계속 주의만 주다니!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녀에게 나는 유명 작가의 그림을 장갑도 끼지 않고, 심지어 작품 표면을 마구 만지며 트럭 구석에 대충 싣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입지 않을 거라도 구입해요. 고가 미술품도 사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옷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제가 어떤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옷도 작품인 거니까요. 저기 걸린 베이지색 셀린 옷이 그래요.” 디자이너 이지현이 옷을 사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패션쇼 이미지를 봤을 때 아이디어 면에서나 만드는 공정에 감동을 받았다면, 혹은 어떤 이유든 실제로 보고 싶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 주저하지 않고 옷을 사는 편이에요. 디자이너니까 옷의 실루엣과 패턴을 공부할 수 있고 단순히 영감을 받기도 하니까요. 어느 쪽이든 제게 도움이 된다면 옷을 구입합니다.” 발렌티노 카무플라주 시리즈를 모조리 모은 건 대체 어떻게 이런 옷을 만들었는지 궁금해서였다. “발렌티노 웹 사이트에서 카무플라주 만드는 동영상을 본 적 있어요. 일일이 하나씩 패턴을 재단하고, 붙이고, 라이닝 작업하는 걸 보고는 이 시리즈는 꼭 소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10여 년간 구입한 컬렉션 옷과 신발, 액세서리는 총 2,000개가 넘는다. 집에서 가장 큰 방은 옷들에게 내줬다.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로 가져온 옷만 해도 웬만한 아파트 전셋값과 맞먹을 정도. 관리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기본적인 정리는 브랜드별로, 브랜드에서 나온 옷걸이에 잘 걸어놔요. 신발, 액세서리 박스는 버리지 않고 박스째 보관하죠. 계절마다 자주 입는 옷은 꺼내놔요. 세탁은 잘 안 해요. 오히려 세탁소에 갔다가 망가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너웨어나 셔츠는 입고 나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손세탁합니다.”

    행어에 걸린 옷을 찬찬히 살펴보니 가장 눈에 띄는 브랜드, 바꿔 말하면 그녀가 집중해서 모으는 브랜드는 발렌시아가, 발렌티노, 생로랑, 셀린, 지방시, 발맹. 그렇다고 무턱대고 구입하는 건 아니다. 자주 가던 미용실의 디자이너 선생님이 바뀌면 미용실에 발길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 “각 브랜드의 정점을 찍은 디자이너들의 옷을 수집해요. 발렌시아가는 니콜라 제스키에르 시기의 옷을 가장 많이 수집했어요. 알렉산더 왕으로 바뀌면서 아이디어도 별로인 데다 옷도 감흥이 없었죠. 최근 뎀나 바잘리아로 바뀌며 다시 발렌시아가 옷을 모으기 시작했답니다.”

    누군가는 생로랑 전성기를 스테파노 필라티 혹은 톰 포드 때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정점은 에디 슬리먼이다. “에디 슬리먼이 이브 생 로랑에서 생로랑으로 브랜드 이름과 로고를 바꾼 시기, 즉 2013년 아이템이 가장 많아요. 개인적으로 그 시기의 실루엣을 가장 좋아했어요.” 그녀가 촬영장에 입고 온 바이커 재킷이 어느 시즌이냐고 묻자 한시도 망설임 없이 즉각 대답한다. “2014 F/W예요. 제가 바이커 재킷이 정말 많거든요.”

    그야말로 브랜드 관계자만큼 풍부한 정보를 지닌 그녀다. 그렇기에 거대 하우스 브랜드의 디자이너에게 감정 이입할 때도 있다. “저도 디자이너이기에 어느 순간 디자이너의 고민이 보이더군요. 시즌이 지날수록 실루엣은 똑같은데 어떻게 새 디자인을 선보일지 고민하는 것이오.” 그녀는 자기 확신이 강한 만큼 브랜드에서 디자인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졌을 땐 주저 없이 발길을 돌린다. “그래서 브랜드에서 옷에 대한 고민이 보이기 시작하면 옷을 사지 않아요.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의 발맹 시절을 너무 좋아하지만, 그가 그만두기 두 시즌 전부터는 디자이너로서의 혼란스러움이 보이고 또 옷도 인위적으로 바뀌어서 사지 않았죠. 2009 S/S 시즌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모든 룩을 수집하고 싶을 정도였죠.” 80년대 파워 숄더와 나폴레옹 재킷, 스톤 워싱 진의 조합으로 패션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던 시즌. 그녀가 최고로 칭송할 정도니 옷 역시 그에 걸맞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바로 런웨이의 첫 문을 연 크리스털이 화려하게 수놓인 장교 재킷. 한국에는 딱 하나 바잉된 옷이다. 가격은 1,700만원대. “이 재킷을 입고 파리에 갔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모든 사람이 저에게 친절하더라고요. 저 옷이 당시 광고에도 등장해 쁘렝땅 백화점에도 걸려 있었으니 알아본 게 아니었을까요?” 한국에 드문 옷을 소유하고 있다 보니 종종 연예인으로부터 옷을 빌려달라는 문의가 와서 실제로 빌려준 적도 있다. 다만 그 옷을 효과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 인물에 한해서다. “한번은 씨엘이 옷을 빌려달라고 하기에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한 적 있어요. 최근에는 신인 남자 배우의 촬영에 지방시 옷을 빌려주기도 했죠.”

    고가의 옷을 사기 위해서는 ‘총알 장전’도 필수이지만, 그만큼 좋은 옷을 괜찮은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그중 하나로 편집매장 무이를 꼽는다. “한섬에서 시스템, 시스템 옴므, 타임 옴므까지 여성복과 남성복을 병행하며 13년간 일했어요.” 한섬에서 운영하는 무이는 직원들에게 패밀리 세일 및 미리 살 기회를 주기도 한다. VVIP들을 위해 제공하는 브랜드의 특별 혜택도 있다. “최근 발렌시아가 아이템이 공식 출시되기 전에 먼저 입어보고 구매할 제품을 고를 기회가 있었어요. 한창 마르지엘라를 사들일 때는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매장 셔터를 내리고 세일가로 쇼핑하기도 했죠.”

    좋은 옷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열정은 시간이 지나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디자인의 옷을 여러 벌 구입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랑방 2015 S/S 컬렉션이 그랬어요. 한국 매장 혹은 쇼룸에서 실물을 확인하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보고 핑크, 아이보리, 블랙 세 가지 색의 옷을 샀죠. 어떤 사이즈가 잘 맞을지 몰라서 44, 46, 48 사이즈로 구입했죠.” 구입할 수 없는 옷에 대한 열망은 패션 전시로 푸는 편이다. “1년에 두 번은 꼭 앤트워프의 패션 박물관(MoMu)에서 전시를 봐요. 앤트워프의 몇몇 멀티숍에서 의외의 옷을 발견해 사기도 하죠. 2009년 발맹에서 나온 턱시도 스타일의 바이커 재킷이 그거예요.”

    그녀에게 좋은 옷은 소재, 봉제의 완성도, 가격의 가치, 세 가지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베트멍은 지금 패션계 모두가 주목하는 브랜드지만 그녀의 수집 기준엔 미달이다. “최근 시즌의 캐나다 구스와 콜라보레이션 패딩을 입어봤어요. 실루엣은 괜찮은데 충전재가 구스 다운이 아닌 덕 다운이었죠. 그런데 400만원이 넘다니! 이런 제품은 아무리 맘에 들어도 사지 않아요.”

    그녀는 자신을 ‘패션 빅팀’이라고 쿨하게 인정할 만큼 옷을 모은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외국 브랜드가 아닌 한국 브랜드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싶을 때가 있어요.” 현재 한 브랜드의 디렉터로 일하고 있기에 더 절실히 느끼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수집은 계속된다. ‘옷을 더 잘 만들고 싶은’ 순수한 열정이 꺼지지 않는 한 말이다.

      에디터
      남현지(인터뷰), 유준희(디지털 에디터)
      포토그래퍼
      CHUN HIM 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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