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 신화

연례행사처럼 독감을 마주하면서 스스로 면역의 신화에 매몰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나만 건강하고 오래 살길 바라는 건 면역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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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휴가에 대한 기대는 뜨거웠다. 누구는 로스앤젤레스에, 누구는 브리즈번으로, 또 누구는 통영에 간다니, 우리는 제주도에서 지내다 올까, 룰루랄라 계획 중이었다. 하지만 결국 난 ‘남양주 방콕’행 했다. 기다란 호스를 첫째 딸의 코부터 목까지 집어넣어 독감, 정확하게는 A형 인플루엔자 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눈물 콧물 다 쏟는 딸을 다독이면서도, 나는 멀찌감치 달아나는 내 휴가의 꽁무니를 목격했다. 첫째가 호전될 때쯤이면, 어김없이 둘째가 바통을 이어받고, 아이들의 상태가 한숨 돌릴 즈음, 친정 엄마 차례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윤종신을 빼닮은 의사에게 따지고 싶었다. “장난해요? 온 식구가 백신 맞느라 쓴 돈만 18만원이라고요! 내 금쪽같은 휴가 돌려줘요!”

6년 전, 나와 남편은 청국장 한 그릇을 나눠 먹고는 A형 인플루엔자, 그러니까 신종플루라 명명된 병에 걸려 칩거했다. 사스의 그림자가 걷히고 몇 년 후 찾아온 이 불청객은 당시 꽤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타미플루도 그때 출시되었다. 황희에게 삼고초려한 세종의 서신도 이 약 설명서만큼 길진 않았을 텐데, 그마저도 다름 아닌 부작용에 대한 것이었다. 구토부터 정신착란까지, 약이 유발할 수 있는 이상 증상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유독 약을 먹은 후에는 병든 닭처럼 자리보전하고 누워야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실험실의 쥐가 된 것일지 모른다는 음모론을 써댔다. “그러니까, 이 약, 진짜 먹어도 되는 거지?”

이 의구심은 그간 타미플루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증거를 들이대는 언론 보도와는 상관없이 시종일관 날 지배했다. 그러니까, 내가 의사에게 “그런데 타미플루는 꼭 먹어야 하나요?”라고 질문한 건 백신의 효능과 타미플루의 위험성 모두에 대한 딴지였다. 의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몇 년 전, 독감 백신을 맞지 않은 미국 어린이들 중 일부는 인공심폐 장치를 다는 처지가 됐고, 일부는 죽었다”는 이야기를 해줄 리는 만무했다. 그저 타미플루는 반드시 5일 치를 다 먹어야 하며, 어떤 백신도 100%는 없다는 말로 나를 돌려보냈다. 물론 뒤통수에 대고 면역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친절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현대인에게 면역력은 일종의 주술이다. 당장 서점에만 가도 음식, 생활 습관, 운동, 스트레스 해소법, 심지어 섹스 체위까지, 면역력 강화 비법을 소개하는 책이 널렸다. 이렇게만 하면 강철 같은 면역력을 장착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몸뚱이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일 뿐이다. 두 아이를 낳고 변한 건 세상 무서울 것 없었던 내가 통제 불능의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궁을 탈출하면서부터 온갖 미생물, 세균과 동고동락해야 하는 운명을 거부한 채, 어떻게든 아이의 위험 요소를 제거하겠다는 강인한 어머니를 자처하고 싶었다. 물론 항균 비누, 손 소독제, 블루베리 시럽을 사놓는 걸로 그쳤지만, 마음만은 아들의 필멸성을 지우기 위해 아이를 스틱스 강에 담근 여신 테티스에 뒤지지 않았다.

이반 일리치는 30여 년 전 “의학 기술이 인간의 삶 자체를 의학화한다”고 경고했지만, 대중이 면역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우리가 그의 우려만큼 멍청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면역에 대한 관심은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하는 기본적 욕망에서 비롯될 뿐만 아니라 의학에 기대기보다는 나라는 개체의 독립성과 의지를 주시하겠다는 진화된 욕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율라 비스가 <면역에 관하여>에서 소개한바, 면역의 뿌리를 신화에서 찾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앞에서 말한 테티스라는 유난한 어머니의 아들이 바로 아킬레우스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 ‘불멸의’ 아킬레우스는 결국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아 죽는다. 어머니가 아기 아킬레우스를 강에 담글 때 손으로 쥐었던 바로 그 부분이다. 이 이야기는 완벽한 면역이 신화임을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신화가 정말 ‘신화’처럼 크게 와 닿았던 건 나조차도 면역의 힘은 맹신하되 본질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민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비치된 어린이 백과사전을 뒤져봤더니 면역이 이렇게 설명되어있다. “우리는 수많은 미생물에 둘러싸여 살고 있어요. 그러다가 병원체인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몸속으로 들어오기도 해요. 그렇다고 다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랍니다. 우리 몸이 강한 방어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여태껏 나는 면역이 자기와 비자기를 철저히 구별하고, 자기를 공격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우리 몸을 일종의 전쟁터로 가정하는 딱 초등학생 수준의 정보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면역에 관하여>는 면역에 대한 선입견을 정정해주었다. 이를테면 “세균의 증식을 저지하는 열이 지나치게 높을 경우에는 몸의 효소를 망가뜨리며, 면역 반응의 필수적 화학 신호가 과잉일 경우에는 장기 기능 상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나 “인간은 자기 안의 비자기에 의지하고 그 덕분에 보호 받는다”는 사실, 예방의학이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적임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 과학 저술가 칼 짐머의 말처럼 “인간과 바이러스 사이에는 내 편 네 편이 없”으며, 내 몸은 매우 투명한 경계라는 사실 등등. 면역을 각 신체 조직이 네트워킹하는 일종의 세계로 보는 시각은 1967년 면역학자 닐스 예르네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면역을 세포, 항체, 기관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시도는 놀랄 만큼 최근의 일이다.

몇 년 전 자연 육아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TV 다큐멘터리가 시발이 되었는데, 세 아들을 병원 한 번 안 데려가고 키운 훌륭한 엄마가 등장해서는 의학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몸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이 콕 박혔다. 콧물과 기침과 열은 “면역계가 세균 어휘집을 공부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그걸 못 기다리고 냉큼 병원에 가는 게 오히려 인내심 부족에 이기적인 처사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아이의 감기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다가 아이는 하마터면 폐렴으로 입원할 뻔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이의 병을 ‘독자적으로’ 다스리는 ‘현명한 소비자’가 되겠다는 미명 아래 아이의 몸이 가진 ‘순수성’을 훼손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내(내 아이) 몸이 깨끗하고, 약물로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는 환상. 둘째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안 질환 때문에 항생제 성분의 안약을 투약 받을 때, 나는 별것도 아닌 상황에서도 제대로 된 면역력을 물려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지금도 순수성에 대한 집착과 ‘순수=천연=안전>인공’ 식의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 우리는 ‘100% 천연 성분’이라는 말에 의심 없이 쉽게 지갑을 열고 있지 않나. 율라 비스는 “애초에 우리 몸에서 순환하고 있는 포름알데히드의 양은 백신 접종으로 얻는 양보다 상당히 더 많다”는 문장보다 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건넸다.

“신체적 순수함은 언뜻 무해해 보이나 이에 대한 열정은 맹인, 흑인, 가난한 여자들에게 불임 시술을 실시했던 우생학 운동의 동기였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걱정은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한 세기 넘게 살아남았던 인종 혼합 결혼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기도 했다. 모종의 상상된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노력 때문에, 인류의 유대는 적잖이 희생되어왔다. (중략) 순수에 대한 집착은 외부에 대한 적대감으로 표현된다.”

얼마 전 절정에 이르렀던 사상 최악의 독감 환자 수가 1월 초에 한풀 꺾였다는 뉴스를 봤다. 바이러스가 약화되었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사람들이 백신을 통해 스스로 숙주가 되는 걸 막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율라 비스의 말마따나, 면역이란 제 한 몸 건강하게 가꾸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모두가 함께 가꾸는 공동체적인 공간이며, 백신 맞을 여유가 있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위해 예금하거나 기부하는 행위, 그러므로 우리 몸은 개인적 몸이 아니라 사회적 몸이다. 의학 전문가들이 “독감 같은 질병에 대한 치료법이 편견 같은 사회적 병폐를 치료하는 데도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나저나, 아무리 독감이 휴가를 날려버렸기로서니 내가 왜 이다지도 면역에 몰두하는 걸까? 어쩌면 내가 세상에 무방비 상태로 드러나 있고,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근원적인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메르스 사태에 이어 지금의 AI 파동에 이르기까지, 현 정부의 무능한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불신도 한몫한다. 어쩌면 신약이 제약 회사의 반인류적, 자본주의적 속성으로 탄생한다는 내용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 수도 있겠다. 세상이 험할수록, 내 면역계는, 내 가족의 면역계는 강해야 한다는 마음은 바람을 넘어 강박이 되고 있다. “연구와 실험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취약하다고 느끼거나 질병에 대해 위협을 느낄 때 (이방인이나 질병, 다른 의견 등에 대한 생각이) 편견으로 기우는 경향성은 더욱 강해진다”는 율라 비스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속수무책으로 닭과 오리 수천만 마리를 파묻고만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우리가 완전무결하게 순수하지 않다는 것, 그렇기에 안팎으로 서로 연결된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 이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새해 벽두, 면역 신화를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찾은 낙관주의의 첫 단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