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versal Translator

인공지능을 탑재하고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워진 번역기.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우리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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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파파고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어릴 적 상상했던 ‘미래’에 ‘현재’ 살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새로운 해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새해에는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랄게요.” 한 남자의 육성은 곧바로 “The new year marks a new beginning. I wish you all the best in the New Year”라는 텍스트로 변환된다. 외국인에게 건넬 수 있었던 유일한 새해 인사 “Happy New Year!”에서 벗어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나에게는 인류가 달에 깃발을 꽂았을 때만큼 감동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솔직히 그동안 번역기는 이름값도 못했다. 동음이의어와 다의어를 구별하지 못했고, 일반명사에서 비롯된 고유명사를 굳이 번역했으며, 외래어와 한문에 취약했다. 예전 같았으면 앞서 언급한 문장에서 ‘해’를 분명 ‘Sun’으로 번역했을 것이다. 과거 번역기는 문장을 단어 단위로 쪼개서 번역한 뒤 조립하는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어, 영어처럼 어순이 다른 언어에 특히 취약했다. 한국어를 일본어로 바꾸고 영어로 다시 번역하면 오류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여전히 개그 쪽에 더 소질이 있었다.

‘오역기’로 불렸던 번역기가 갑자기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등극하기 직전까지 온 건, 인공지능 기술 덕분이다. 우리가 한눈에 문장을 파악한 뒤 맥락 속에서 뜻을 이해하는 것처럼, 신경망 기계 번역 엔진을 단 번역기는 사람처럼 문장을 인식하고 맥락 속에서 번역을 한다. 현재 국내에서 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건 구글, 네이버 파파고, 마이크로소프트 빙, 한컴 말랑말랑 지니톡, 시스트란 정도. 네이버 파파고가 글자 수 제한이 있어 절대적으로 불편한 상황임을 제외하면 평가는 고만고만한 상황이다. 구글은 인공지능 번역이 오류를 80%가량 줄였다고 밝혔는데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영어로 바꿀 때 가장 뛰어난 성능을 발휘한다. 도쿄대학 준 레키모토 교수는 어느 매체 인터뷰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기에 돌려 원본과 비교해본 결과 구별할 수 없는 텍스트가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직 완벽을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인공지능 번역기의 내일은 오늘과 같지 않다. 알파고가 대전을 거듭하며 진화했듯, 인간과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번역 기술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고 자고 놀고 있는 중에도 매일 1,400억 단어 이상씩 번역하며 인간과 비슷해지려고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살짝 오싹해지지만 말이다.

형태 역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다. 텍스트끼리 번역은 물론 음성, 손 글씨, 이미지 인식도 가능해졌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4년 “언어 장벽을 깨뜨리겠다”고 약속하며 텍스트 변화를 거치지 않는 음성 동시 통역 서비스 ‘스카이프 트랜스레이터’를 내놓았는데 2년이 지나지 않아 스카이프상에서만 가능하던 서비스를 일반 통화까지 확장시켰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웨어러블 번역기는 또 어떤가. 귀에 끼고 사용하는 ‘웨이버리 랩스’의 ‘파일럿’이 등장했고, 통역기로 “첫 만남이지만, 키스할 수 있나요?”라고 접근하는 동영상으로 구설수에 오른 일본 스타트업 회사 ‘로그바(Logbar)’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일리(Ili)’를 1월 말에 내놓을 예정이다. 지니트랜스는 문서 파일을 통째로 번역해주는 시스템을 준비 중이다. 불완전한 기계 번역을 집단 지성의 힘으로 풀어가는 플리토(Flitto)라는 서비스도 있다. 번역을 원하는 문장을 올려두면 어느 정도 검증된 번역가들이 번역을 해주는 시스템이다. 원리는 네이버 지식인과 비슷한데 적절한 보상이 따라와서 이용자들의 만족도가 높다. 중국 검색 엔진 바이두(Baidu)는 다국어 번역 로봇을 국제 행사 손님맞이에 동원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상용화된 서비스에 한국어가 모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불과 1년 사이 ‘번역’을 둘러싼 세상은 그야말로 급변했다. 번역가 신견식은 “늘 번역기를 사용했지만, 더 자주 사용하게 됐다”며 만족감을 드러냈고, 업무상 매일 영어 이메일을 쓰는 지인 P는 “깜짝 놀랄 정도의 자연스러움”이라며 번역기로 오류를 잡고 있다고 전했다. 나만 해도 직접 인터뷰할 땐 여전히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외국어 사이트를 더 자주 들어가고 간단한 질문지는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직접 작성하게 됐다.

얼마 전 공항에서는 어느 중국인 관광객이 번역 앱을 통해 “제 가방 좀 들어주시겠습니까?”라고 말을 걸어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제 영어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번역기를 돌려가며 130개 언어로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 같다. 중국 식당 메뉴판에 한자만 가득해도 척척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고, 프랑스 갤러리에서 제목과 그림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건 애당초 외국어 스트레스를 유발했던 영역이 아니다. 영어로 능구렁이 같은 농담을 주고받는 파티장에서 홀로 번역기를 끼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외국인 클라이언트를 설득해서 광고를 따내야 할 미팅에서 주섬주섬 번역기를 꺼내 기계음으로 나의 의사를 전달해도 신뢰감을 줄 수 있을까? 성인이 된 이후 영어 공부의 원동력은 애당초 ‘쪽팔림’과의 싸움아니었던가. 마케팅 회사를 운영하는 지인은 번역기가 발달해도 직원을 뽑을 때 외국어 능력을 볼 것이라고 했다. 사업을 하면서 비즈니스 애티튜드가 중요한 상황이 많고, 따라서 한마디를 하더라도 교양 있는 영어를 쓰는 직원을 채용하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요지다. 감정, 문화, 행동은 <스타트렉>의 우주 번역기가 등장한다고 해도 우리의 영역이다.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세상은 이제 ‘누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집중할 것이다. “출발 언어인 외국어, 목표 언어인 한국어 둘 다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한국어 구사력이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번역기도, 번역가도 80%까지 해낸다면, 20%를 가르는 건 모국어를 어떻게 다루는가일 테지요.” 번역가 신견식은 사람이 하던 번역의 상당 부분을 번역기가 담당할 것이고, 번역가의 역할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세 살부터 영어 스트레스를 받는 보통 사람들은? 로제타스톤 스티븐 조 대표는 외국어 학습을 중단하는 극단적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점수를 받기 위한 학습은 없어질지도 몰라요. 하지만 외국인 남자 친구를 사귀고 싶다거나 프랑스에 정착해서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는 니즈로 외국어를 배울 거예요. 외국어를 학습하고자 하는 이유는 각자 달라질 것이고 더 세세해질 겁니다. 언어에는 번역기가 결코 전해줄 수 없는 ‘뉘앙스’가 있거든요.”

새해가 밝고 나니 연례행사처럼 영어 스트레스가 찾아왔다. 광고 속에서 영어 공부하라고 겁주는 조정석의 말투가 유난히 거슬리는 걸 보니 번역기는 아직 내 삶을 구원하지 못한 듯하다. 그래도 외국어를 배우는 문제가 생존에서 아주 조금 비껴난 기분이 든다. ‘쪽팔림’이 아니라 호기심이 영어 공부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도 품어본다. 바라건대 올해는 영국 왕실 영어로 완벽하게 동시 번역되는 번역기가 세상에 나오길. 신의 언어 번역기를 돌려 기도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