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imal Moment

오랜 시간 호화로운 뷰티 라이프를 영위하던 Ex-뷰티 에디터가 화장대를 비우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단순하게 바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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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짐을 싼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장 필요한 몇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미니멀 라이프 열풍을 일으킨 주역,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혹은 조슈아 필즈 밀번 & 라이언 니커디머스의 <미니멀리스트>를 읽으며 또 한 번 깨달았다. 난 결코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좁아터진 서랍에 옷과 구두가 아우성치며 탈출 중인 드레스 룸과 최근 1년 사이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책이 고통스럽게 포개진 서재가 있는 우리 집에 그들을 초대한다면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부터 찾을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난 그들이 강조하는 비대해진 집착을 비우고 그 자리에 나눔과 선행을 채운다거나, 고요한 호흡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영적 삶과 다분히 거리가 먼 세속의 삶을 한껏 즐기고 있지 않나. 하지만 폭파 직전의 어수선한 집에서도 한 군데, 비교적 ‘깨달음’이 묻어나는 공간이 있다. 바로 화장대다. 난 지난 10여 년간 뷰티 에디터로 일했다. 그 일을 그만둔 지금도 ‘프리랜서’라는 타이틀로 엇비슷한 일을 하고 있으니 화장품은 내게 가족 다음으로 오랜 시간 함께한 인생 파트너다. 인심은 또 어찌나 넉넉한지! 우리 집 책상 한쪽에는 아직 출시도 안 된 열두 가지 색상의 립스틱 컬렉션이 내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화장대는 물론 차 트렁크, 욕실, 가방 안 어디든 포장도 채 뜯지 않은 크림과 향수, 보디 제품이 나뒹구는 꿈같은 삶을 허락해줬으니 말이다.

“다시 태어나면 반드시 뷰티 에디터가 되고 싶다”는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호화로운 뷰티 라이프를 과감히 비워내기로 한 결정적 계기는 ‘죄책감’에서 비롯됐다. 가족, 친구, 동료는 물론 기부 단체에까지 아낌없이 나눠준다 한들 여전히 내 공간 속 화장품은 자리를 찾지 못해 늘 ‘입석’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심지어 어디에 보관했는지조차 잊힌 ‘세균덩어리’들도 적지 않았다. 옷이나 책은 세월을 더하며 빛을 발하는 경우가 있지만 피부에 직접 닿는 화장품엔 결코 적용되지 않는 거짓 면죄부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화장품은 냉장고 속 식재료 같다. 유통기한을 넘긴 화장품을 처분할 수 있는 방법은 쓰레기통뿐.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죄스럽다’의 정의가 이런 걸까? 과연 난 그것들을 소유할 자격이 있을까?

다수의 미니멀리스트들이 버리는 것은 ‘기술’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들 중 몇몇은 버리기 초보자들을 위해 1. 보관용, 2. 매일 쓰지는 않지만 보관할 것, 3. 나눠줄 것, 4. 당장 갖다 버릴 것으로 박스를 나눠 연습하라고 충고하지만 2번 항목은 과감히 건너뛰라 권하고 싶다. 물론 처음에는 2번이 필요했다. 이 마스카라는 언젠가 꼭 쓸 것 같고, 저 향수는 장식용으로라도 간직하고 싶었다. 특히 더는 구할 수 없는 리미티드 에디션 앞에서는 마음속 집착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지난 몇 달간 단 한 번도 쓴 적 없는 화장품이라면 앞으로 사용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난 좀더 무정하게 그것들에 이별을 고하는 법을 익히게 됐고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화장품 산더미들이 서서히 줄어드는 기적을 경험했다. 아직까진 버려서 후회로 남은 화장품은 없다.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집에 빈 공간이 생겨난다는 건 생각보다 꽤 큰 쾌감을 선사한다는 것 말이다. 오랫동안 엉덩이를 붙이던 자리에 걸레질하고 먼지를 닦아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버리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화장품 산더미들이 걷히고 난 뒤 또 하나의 수확을 꼽자면 뷰티 루틴이 보다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예민한 피부 타입으로 인해 사용 제품은 정해져 있었지만 버리고 또 버리고 나니 화장대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제품이 비로소 나의 진정한 파트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바르는 개수가 대폭 줄었음에도 희한하게 피부는 훨씬 더 건강해졌다. 나와 비슷한 경력의 후배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일을 그만두고 나니 오히려 생활 습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화장품을 적게 바르는 대신 피부를 위해 좋은 것을 먹거나,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식이죠. 덕분에 전보다 삶의 밸런스가 맞춰지고 있어요.” 무엇보다 우리 둘 다 목소리를 높였던 부분은 스무 살 때처럼 화장품에 대한 흥미와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는 사실. “적게 바르다 보니 정말 내게 필요한 제품이 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돼요. 하나를 바르더라도 제대로 바르고 싶은 거죠. 자연스레 지나쳤던 화장품 기사를 꼼꼼하게 다시 읽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좋은 원료로 만든 화장품 브랜드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매너리즘에 빠져 무기력하게 지낸 지난 몇 년간 느끼지 못한 에너지를 되찾았죠.”

물론 화장대를 비웠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이어트 후에 무시무시한 요요 현상이 기다리고 있듯 싹 다 비운 화장대라 하더라도 아주 잠깐 방심한 사이 얼마든지 예전의 산더미로 되돌아갈 수 있다. 지난해 12월, <2017년 10대 소비 트렌드 키워드-트렌드 코리아 2017>을 발표한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 역시 ‘Bye-Buy Sensation’을 올해의 소비 패턴 트렌드로 꼽았다. 버린 후(Bye)-다시 사는(Buy) 소비 패턴, 즉 실컷 버리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며 감탄하던 이들이 다시 지갑을 여는 설렘을 맛보고 싶어 한다는 소비 심리다.

만약 지금 애지중지하던 화장대가 텅텅 비어버린 모습에 헛헛한 마음을 채울 길이 없다면 <미니멀리스트 붓다의 정리법>의 저자 레기나 퇴터의 매뉴얼을 새겨듣자. 우선 모든 물건은 자리를 정해두고 쓰고 나면 꼭 제자리에 놓을 것. 새 물건은 집에 있는 헌 물건이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가 됐을 때 구입하되 물건은 양보다 질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 사고 싶은 물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면 온라인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며칠간 기다려볼 것. 마지막으로 거절을 어려워 말 것. 다시 말해 온갖 할인과 서비스에 현혹되기 전에 꿋꿋이 ‘No!’를 외칠 수 있는 애티튜드를 습득하란 이야기다. 레기나는 이렇게 말한다. “대체 나는 왜 물건을 사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렇게 오랜 세월 끌고 다녔건만 그 물건들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