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강탈자들

미드, 영드에 이어 호드(호주 드라마), 노드(노르웨이 드라마)까지 가세해 모니터에 젖과 꿀이 흐르는 시대. 2017년 해외 드라마의 판도는 세 가지로 나뉜다. 밤샘을 예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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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행 열차에 탑승한 명감독들

시대가 변했다. 이제는 마틴 스콜세지나 데이비드 핀처가 TV 시리즈를 만들겠다 선포하는 것만으로 입이 떡 벌어지는 시대가 아니다. 그들의 <보드워크 엠파이어>나 <하우스 오브 카드>의 성공은 수많은 할리우드 장인들이 TV로 진출하는 도화선이 됐다(물론 그전에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던 감독들이 없진 않았지만, 스타 감독과 방송가 사이엔 분명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감독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블록버스터의 대명사 마이클 베이(<더 라스트 쉽>)부터 세계가 사랑하는 작가주의 장르 영화의 아이콘 스티븐 소더버그(<더 닉>)와 길예르모 델 토로(<스트레인>). 칸을 위시한 아트 시네마의 거장 구스 반 산트(<웬 위 라이즈>)와 파올로 소렌티노(<영 포프>), 최근엔 <빌리 엘리어트>, <디 아워스>를 연출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더 크라운>까지. 쉽게 말해 ‘한 칼’ 하는 감독들의 TV 시리즈가 매해, 매 분기 쏟아지고 있다. 그들의 시선은 왜 TV로 향했을까?

너무 많은 이유를 꼽을 수 있을 테다. 영화감독이란 직업은 2시간 안팎의 러닝타임을 유지하기 위해 못다 떠든 플롯과 사랑하는 캐릭터를 잘라내야 한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호흡과 대중의 호응에 비례해 얼마든지 시즌 리뉴얼이 가능한 시리즈물은 무척이나 매력적일 수밖에. 더불어 감독만큼이나 매체의 경계를 지워버린 배우의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누가 케빈 스페이시와 주드 로를 안방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올해 오스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마이클 섀넌과 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는 <보드워크 엠파이어>와 <하우스 오브 카드>가 없었다면 결코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프랜차이즈와 히어로물이 득세하는 할리우드를 벗어나 기존의 동료들과 새로운 얼굴들 모두를 맞이해 원하는 만큼(!)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누가 마다하랴. 그 기회가 우리에겐 축복을, 스타 감독들에겐 전쟁을 안겨줄 뿐. 2017년에도 이어질 별의 전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단연 FX의 <타부>다. 리들리 스콧과 톰 하디의 만남. <이스턴 프라미스>와 <얼라이드>의 각본가이자 영국판 <대부>로 불리는 <피키 블라인더스>의 크리에이터 스티븐 나이트까지 가세한 이 야심 찬 기획은 새로움을 시도하기보단 그들이 ‘잘하는’ 스타일을 밀어붙이는 데 주력한다. 미국과 영국의 패권 다툼이 극에 달한 1814년 런던을 배경으로, 아프리카에서 모종의 계획을 가지고 돌아온 탕아란 설정은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를 떠올리게 하며, 톰 하디가 연기하는 제임스 딜레이니란 캐릭터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악인 피츠 제럴드와 <피키 블라인더스>의 유대인 갱스터 알피 솔로몬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폭력과 치정, 음모와 대결로 가득한 서사와 어둡고 끈적해서 습기가 묻어나올 지경인 미장센은 그들의 전매특허고. 방영 초반인 <타부>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역시”라는 탄성과 “또?”라는 탄식이 공존한다. 성긴 편집을 속도감으로 대충 때우는 최근 드라마와 달리 예상하지 못한 화두로 따박따박 걸음을 옮기는 구성은 보는 이에 따라 흥미로울 수도, 지루할 수도 있을테고, 종종 등장하는 딜레이니의 환상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제작진의 태도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장르 진입을 가로막는 의뭉스러움으로 소비될 여지도 있다. 과연 <타부>는 새로운 흐름의 <보드워크 엠파이어>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더 겟 다운>처럼 신통찮은 결과로 남을 것인가. (<위대한 개츠비> <물랑 루즈>의 바즈 루어만 감독이 1억2,000만 달러를 쏟아부으며 ‘빅 스윙’ 한 이 시리즈는 힙합 <물랑 루즈>를 기대했던 넷플릭스에 2016년 가장 아픈 손가락일 것이다.) 하긴, 우린 그저 감독들의 귀추를 즐겁게 지켜보면 될 테다.

한준희(영화감독, <차이나타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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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드와 호드의 역습

영국 드라마 <스킨스>를 기억하는가. <어바웃 어 보이>의 볼 빨간 꼬마였던 니콜라스 홀트를 마성의 남자 토니로 만들어주었고, 데브 파텔과 카야 스코델라리오를 할리우드로 데려간 그 드라마. 약과 술, 구토가 뒤섞인 파티에서 성장하던 영국 10대들이 훌쩍 커버린 지금, <스킨스>의 전혀 다른 후예들은 미국도 영국도 아닌 곳에서 자라나고 있다. 노르웨이 10대 드라마인 <스캄>(Skam, 영어로 번역하면 ‘Shame’이라는 뜻의 노르웨이어)은 그야말로 <스킨스>의 적자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모든 행동을 하는 10대들이 나온다. 시즌을 거듭하며 세계적으로 마니악한 팬덤도 생겼다.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인해 청소년 시청 금지 시간에 방영된 <스킨스>와는 달리, <스캄>은 세상에 던져진 뒤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해가는 10대를 그리면서 긍정적인 교육 효과도 인정받았다. 불완전하고, 아프고, 비밀과 상처를 가진 인물들과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 문학적인 비유와 상징을 숨겨둔 이 드라마는 <스킨스>의 감성을 그리워하던 팬들과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열광을 샀다.

호주 드라마 <플리즈 라이크 미>는 <스캄>과 지구 반대편에 있는 것 만큼이나 다르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새로운 청춘 성장물로 불릴 만한 작품이다. 자신이 게이인 줄 몰랐던 자존감 낮은 게이 조시의 커밍아웃과 그 후의 삶을 그리고 있으며, 이혼한 부모를 둔 친구들, 커밍아웃 후 사귄 남자들과의 관계가 극의 중심에 있다. 이 드라마는 비밀스러운 클럽도, 화려한 도시 생활도, 섹스도 없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순간에도 산뜻함을 잃지 않는다. 외모에 자신감이 없고, 좀 비뚤어진 성격이지만 조시는 시드니 햇살 아래서 춤추며 요리하는 나름 긍정적인 일상을 살아간다. 화려한 커뮤니티 속의 고독한 자아, 과장된 자의식이나 포즈 없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게이의 이야기는 이렇게 의외의 곳에서 탄생했다.

과거가 된 줄 알았던 감성을 훌륭하게 현재로 이식한 이런 드라마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닌 곳에서 나올 수 있던 큰 이유는 TV 중심의 드라마 환경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모바일용 클립을 이어 붙여 만든 드라마 <스캄>은 SNS를 통해 지구 반대편의 시청자에게까지 전파됐다. 영어권임에도 영미 드라마 중심의 시장에 편입된 적이 없는 호주의 드라마인 <플리즈 라이크 미>는 넷플릭스의 시리즈로 손쉽게 세계의 시청자들을 만났다. 대부분의 동영상을 휴대폰으로 보는 해외 접속이 가능한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국경과 언어에 구애받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물(사회의 소수자)에 집중하는 드라마는 블록버스터 규모의 정치 드라마나 장르물 중심의 미국이 관심을 갖지 않는 소재다. 바로 그렇기에 미국이 아닌 어딘가에라도 누군가는 해야만 하고, 또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다. 언어의 장벽이 없는 <플리즈 라이크 미>는 시즌 1이 성공하자 바로 미국에 방송되었고, <스캄> 역시 시즌 3를 끝내자 이어진 수순처럼 미국에서의 리메이크 소식이 알려졌다. 하지만 <스캄>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알 것이다. <플리즈 라이크 미>의 산뜻함이 호주의 햇살과 느긋한 분위기에 기대어 있듯, <스캄>은 교사의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학생이 지적할 수 있는 북유럽의 자유로운 환경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노르웨이의 차가운 공기가 푸른빛을 띠는 영상을 만들었듯이 말이다. 10년 전의 <스킨스>가 영국 브리스틀의 우울한 날씨와 실제 영국의 사회문제인 10대의 일탈이 만나 탄생했듯이, 미국이 아닌 곳에서 각자의 고유한 색을 지닌 드라마가 움트고 있다.

윤이나(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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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시대를 짊어진 정치 드라마

원인을 알 수 없는 테러로 대통령과 내각 관료들이 모두 사망했다. 살아남은 것은 테러 당시 국회와 떨어진 장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지정 생존자,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인 톰 커크맨(키퍼 서덜랜드)뿐이다. 지난해 9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드라마 <지정 생존자>는 최악의 타이밍에 우연히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남자의 이야기다. 고위직 정치인이 거의 사라지고 특별한 라인이랄 것도, 정치적 꼼수랄 것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 새로운 미국을 만들어낸다는 판타지는 어쩐지 요즘 비리 정국의 한국에서 더욱 주목받은 것 같지만, 미국 현지에서도 적지 않은 관심 속에 방송됐다. 시스템은 존재하지만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고, 국민은 물론 각 부처 관계자들마저도 얼떨결에 대통령이 된 커크맨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가 실패하기만 기다린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는 대신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지킨다. 테러를 이란의 소행으로 결론짓고 공격을 선포하자거나, 일단 적을 만들어야 국가적 단합을 이룩할 수 있다는 주변의 주장에도 커크맨은 오로지 진짜 적을 밝혀내는 것만이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크고 강한 미국이 아니라 정상적인 윤리 의식과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는 미국이라고, <지정 생존자>는 말했다. 그러나 2016년 11월 9일,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도널드 트럼프였다. 토론에서는 소리를 지르거나 ‘아무 말’이나 늘어놓고, “멕시코 이민자는 범죄자이므로 막기 위해 국경 장벽을 세울 것”이라는 등의 인종차별 발언과 여성 혐오적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 데다 정치적 비전마저 없다. 세세한 정책에서는 찬반이 갈릴지언정 적어도 보편적 인권에 대한 감수성만큼은 지적할 데가 없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오바마가 대통령이던 시절, 생득적 조건을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당연했다면,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는 이 기본 전제부터 흔들린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가장 먼저 시행한 정책이 ‘무슬림 금지’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나? 이제 미국은 대통령이 내놓은 정책의 효율성을 따지는 게 아니라, 지극히 기본적인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따라서 이슈를 다루는 드라마의 어깨에는 더 무거운 짐이 실렸다. 앞서 언급한 <지정 생존자>는 3월 두 번째 시즌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누군가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미국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는 와중에, 무슬림을 혐오하지 않는 대통령 톰 커크맨의 존재는 현실의 시청자에게 위로와 허망함 중 어떤 감정을 안길까? 권력을 쥐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하는 정치인 프랜시스 언더우드(케빈 스페이시)를 내세운 <하우스 오브 카드>도 오는 5월 다섯 번째 시즌을 맞는다. 트레일러는 트럼프 취임식이 있던 1월 20일에 맞춰 공개됐으며, 여기에는 불에 그을린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불길한 모양의 성조기가 등장했다. 이 드라마가 비정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대통령이 된 프랜시스를 통해 지금껏 보여주었던 정치의 더러운 이면 외에, 미국의 현재를 어떻게 비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여성 부통령에서 여성 대통령으로, 선거에서 지는 바람에 다시 일반인이 된 셀리나 마이어(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의 <VEEP> 또한 여섯번째 시즌이다. 심지어 이전 시즌은 라틴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현재로선 현실과 가장 동떨어져 있으며, 가장 큰 숙제를 떠안게 된 픽션이란 얘기다. 막말을 일삼는 데다 그리 유능하지도 않은 셀리나의 캐릭터가 트럼프를 예견했다고 자조적인 농담을 하는 미국 언론도 있지만, <VEEP>의 장점은 스테레오타입에 갇히지 않은 괴팍한 여성을 그리면서도 여성이기에 겪어야만 하는 부조리를 예리하게 반영한 점이었다. 여성이 또 다른 여성에게 대통령직을 넘기고 떠난 이 꿈같은 작품은 트럼프 시대와의 접점을 어디서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릴 것이다. 이 밖에 대테러 작전의 음모를 파헤치는 <홈랜드>, 백악관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출신의 여성과 주변 이야기를 다루는 <스캔들>은 이미 새 시즌을 시작했다.

새 정부가 출범하는 2017년에 맞춘 정치 드라마의 러시는 아마도 계획된 것이었겠지만 이런 상황을 예상했을 리는 없다. 시궁창 같은 현실이 픽션을 압도하는 지금, 드라마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마냥 비웃을 수도, 현실을 그대로 반영할 수도, 모른 척 판타지만 제시할 수도 없다. 모든 창작자들에게 그러하겠지만 정치 이슈를 다루는 창작자들에게는 특히 더욱 고민스러울 시절이 도래했다.

황효진(웹진 <아이즈> 기자)

 

여성 톱스타들의 드라마 제작기

무비 스타들의 TV 시리즈행은 익숙한 풍경이 됐다. 주목할 점은 여성 배우의 출연뿐 아니라 제작이 늘고 있다는 것. 2017년 개봉 예정인 틸다 스윈튼이 제작에 참여한 <옥자>, 안젤리나 졸리가 연출한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 캄보디아 딸이 기억한다>처럼 영화계의 바람이 드라마에서도 거세질 듯하다. 2월 19일 방영하는 HBO의 7부작 미니시리즈 <빅 리틀 라이즈>는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했다. 국내에도 출간된 소설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을 바탕으로,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세 엄마가 마을의 살인 사건에 얽히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세 엄마는 리즈 위더스푼, 니콜 키드먼, 셰일린 우들리다. 니콜 키드먼은 프로듀싱에도 참여한다. 감독은 리즈 위더스푼과 <와일드>로 호흡을 맞춘 장 마크 발레이며, 에미상을 일곱 번 수상한 데이비드 E. 켈리가 각본을 맡는다. 2월 3일부터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산타클라리타 다이어트>는 드류 배리모어가 제작에 참여하고 주연도 맡았다. LA 근교 산타클라리타에 사는 부동산 중개업자 실라(드류 배리모어)가 사람 고기까지 먹는 식욕 변화로 활력을 찾는다는 내용. 여성 배우들의 드라마 제작은 아무리 성 평등을 외쳐도 여전한 영화계에서 빠져나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원하는 스태프로, 보다 편한 제작 환경(드라마로 와주시면 감사한 톱스타니까)에서 펼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화양연화가 지나간 여배우들의 행보라는 비판도 있지만, <빅 리틀 라이즈>처럼 완성도 높은 드라마의 성공이 이어진다면, 그간 영화계가 양껏 못한 여성의 이야기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만날 테니 기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