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naissance Man

성준은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영민한 배우다. 그림을 그리고 카메라를 다룰 줄 알며 현대무용을 배운 그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직접 연주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아는 좋은 눈을 가졌다.

체크 패턴의 더블 브레스트 재킷은 발렌시아가(Balenciaga).

체크 패턴의 더블 브레스트 재킷은 발렌시아가(Balenciaga).

성준은 에곤 실레의 ‘겨울 버찌와 자화상’ 속 화가를 닮았다. 그림 속의 남자는 단단한 턱선과 상처받기 쉬운 커다란 눈을 지녔다. 셀피를 찍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위로 젖히고 정면을 응시한 표정은 도도하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하다. 성준도 한때 실레를 좋아했다. 비틀거리는 선,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분위기, 깡마른 몸에 커다란 옷을 입은(대체로는 다 벗고 있지만) 슬픈 눈빛의 사람들. 에곤 실레는 화가 중에서 꽤 잘생긴 편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지난해 말 개봉한 실레의 자전적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오스트리아의 신인 배우 역시 성준과 외모나 분위기가 비슷하다.

성준이 조소를 전공한 데는 이 천재 화가의 영향도 있었다. “미술을 좋아했어요. 그렇다고 회화과를 가긴 싫었고요. 조소가 더 성정에 맞았어요. 전 항상 빛을 다루고 싶었거든요. 모든 입체는 다 빛과 연관이 있으니까. 제가 빛에 되게 예민해요. 소리도 그렇고. 어릴 땐 두통이 엄청 심했어요.” 지금도 집 안의 조명은 거의 할로겐이라고 했다. 형광등 같은 직접 조명이 없다. “그래서 전기세가 많이 나가죠. 흐흐.” 남보다 자극에 예민하다 보면 감각이 발달하기 마련이다. 성준은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영민한 배우다. 현대무용을 배웠고 피아노를 다룰 줄 알며, 가끔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과 드로잉 습작은 수준급이다. 그는 아름다운 것에 감동할 줄 아는 미감을 가졌다. 한창 그를 사로잡았던 패션도 마찬가지다.

“하이패션을 좋아했어요. 근데 명품 티 내는 건 미치도록 싫었어요. 물론 저도 에디를 사랑하긴 했죠.” 알다시피 성준은 패션모델 출신이다. 에디 슬리먼이 아직 디올 옴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2007년 모델로 데뷔한 그는 이수혁, 김영광, 김우빈 등과 함께 당시의 화보와 주요 쇼를 휩쓸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패셔너블했고, 옷으로 개성을 드러낼 줄 알았으며 온갖 디자이너들의 이름과 정보를 줄줄 꿰는 패션 키즈였다. “요즘은 예전처럼 옷 많이 안 사요. 저한데 잘 맞는 바지 두세 벌 번갈아가며 입고 위에는 아무거나 편한 거 걸치고. 한동안 쇼도 안 보다 최근에 한 번 봤어요. 앤 드멀미스터의 2017 F/W 쇼였나? 퍼 재킷 나오는 거. 엄청 멋있더라고요. ‘우와, 쩐다’ 이러면서 봤죠. 왜 한창 스트리트 감성이 유행이었잖아요. 베트멍 같은 거. 제 취향은 아니더라고요. 요즘은 구찌가 또 그렇게 잘한다면서요? 아무래도 빅 브랜드가 갖는 파워가 있으니까. 그런 건 다 리스펙 해야죠.”

어깨를 강조한 더블 브레스트 재킷과 크롭트 팬츠, 흰색 플랫폼 부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어깨를 강조한 더블 브레스트 재킷과 크롭트 팬츠, 흰색 플랫폼 부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미술관에서 성준을 만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모던하고 근사한 르네상스 맨을 구조적인 디자인의 화이트 월 공간으로 끌어들인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했다. 텅 빈 전시장 안의 성준은 퍼포머이자 조형 작품이기도 하다. 성준은 촬영 컨셉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듣고 난 후에야 움직였다. 그는 카메라 앞의 자신이 어떤 상황 속의 사람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 있길 원했다. 성준 자신이 특정 상황 속의 성준을 연기하는 것이다. 그는 예술가의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처럼 정적인 고요함 속에서 전시장 가득 존재감을 채웠다. 이따금 카메라가 연결된 모니터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장난스러운 절규도 외쳤다. “나 늙은 거 같아! 나이 들어 보이죠, 그쵸?” 예전보다 눈빛이 더 강해지긴 했지만, 글쎄. “뭐, 10대처럼 보이진 않죠.” 내가 심드렁하게 답하자 성준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진짜 아재가 되어가나 봐요.”

요즘 성준은 드라마 <완벽한 아내>에 출연 중이다. 고소영의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 드라마에서 성준은 넉살 좋은 변호사 강봉구를 연기한다. 적당히 속물적이고 능글맞은 보통의 아저씨다. 물론 이토록 훤칠하고 잘생긴 아저씨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드라마틱하다. “잘나가는 척 허세도 부리고 까칠하게 굴지만 속정 깊은, 밉지 않은 캐릭터예요. 일부러 거침없이 연기하는 게 있어요. 모든 사람들에게 격의 없이 대한다고 해야 할까?” 내향적인 성준의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주변에서도 레퍼런스가 될 만한 인물을 찾기 힘들다. “제 또래 친구들이 워낙 팬시하긴 하죠.” 성준은 자신의 몸 안에 전형적인 아저씨의 모습을 새기고자 나름의 연구를 했다. 전보다 말수도 늘었다. “근데 저한테도 원래 그런 면이 있긴 해요. 예를 들면 동네에 제가 자주 가는 소금구잇집이 있는데, 거기 이모랑은 늘 그런 식으로 지내왔거든요.”

스트라이프 패턴의 스카프 셔츠는 J.W. 앤더슨(J.W. Anderson at Tom Greyhound).

스트라이프 패턴의 스카프 셔츠는 J.W. 앤더슨(J.W. Anderson at Tom Greyhound).

상대역인 고소영과는 열여덟 살 차이가 난다. 고소영이 영화 <비트>에서 로미를 연기하며 90년대를 대표하는 톱스타로 떠올랐을 때 성준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다. 성준에겐 어렴풋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던 까마득한 선배다. “사실 그 시절의 소영 선배에 대해선 잘 기억이 안 나요. 지오다노 청바지 광고에 나왔던 모습만 또렷하죠.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쿨한 동네 누나 같아요. 얼굴엔 톱스타의 아우라가 있는데 바이브엔 없어요. 현장에서도 뭐든 다 좋다 그러고. 무엇보다 절 예뻐해주시는 게 보여요. 저로선 감사하죠.” 여전히 연기에 대해 배워가는 과정이라 말하는 성준에겐 베테랑 선배와의 작업이 부담보단 든든한 힘이 된다.

성준의 필모그래피엔 어느덧 10여 편이 넘는 작품이 쌓였다. TV에서 우연히 성준을 처음 봤을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최규석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스페셜 <습지생태보고서>였다. 반지하 단칸방에 모여 사는 88만원 세대 청춘들을 생태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비유하며 이들의 남루한 현실을 짠내 나는 코믹함과 따뜻한 연민으로 풀어낸 이 단막극에서 성준은 만화가의 분신과도 같은 최 군 역을 맡았다. 후줄근한 티셔츠에 슬리퍼 차림으로 친구들과 옥상에 올라가 난간에 턱을 괸 채 멍하니 세상을 바라보던 성준은 좀 특별했다. 키는 멀대같이 크지만 얼굴엔 아직 앳된 소년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고, 시시한 농담을 하며 평범하게 웃고 떠들어도 긴 속눈썹 그늘 아래엔 예민한 감수성이 묻어났다. 목소리는 어른스럽고 남자다운 저음인데 말투는 아이처럼 어눌했다. 이 드라마로 성준은 2012년 KBS 연기대상에서 단막극 부문 상을 탔다. 색다른 느낌의 배우였다. 이후 그의 데뷔작까지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흰색 프린트 셔츠와 브이넥 크롭트 니트 베스트는 라프 시몬스(Raf Simons at Boon The Shop), 스트라이프 패턴의 와이드 슬랙스는 지방시(Givenchy at Boon The Shop), 벨트는 페라가모(Ferragamo), 구두는 디올 옴므(Dior Homme).

흰색 프린트 셔츠와 브이넥 크롭트 니트 베스트는 라프 시몬스(Raf Simons at Boon The Shop), 스트라이프 패턴의 와이드 슬랙스는 지방시(Givenchy at Boon The Shop), 벨트는 페라가모(Ferragamo), 구두는 디올 옴므(Dior Homme).

“연예인이나 스타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면 아마 지금까지 이 일을 못했을 거예요. 제가 그걸 못 버텼을 거예요.” 당시 성준과 같은 모델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던 모델들이 대거 출연한 드라마 <화이트 크리스마스>에서 운 좋게 주인공으로 합류하게 된 그는 그때부터 연기를 배워나갔다. 연이어 출연한 드라마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영화 <명왕성>에서 성준은 진짜처럼 보였다. 물론 발음이나 연기적인 테크닉은 부족했다. 하지만 신인 배우의 어설픔보다 진심의 힘이 컸다. “저한텐 연기 코치가 되어준 분이 있어요. <타짜-신의 손>에 유령 역으로 나왔던 김준호라는 배우예요. 제가 되게 좋아하는 형이죠. 연기 스터디 그룹에서 공부할 때 그 형한테 많이 배웠어요. 연기라기보단 배우로서의 태도에 대해서요.” 성준이 생각하는 진짜 멋진 배우란 겸손한 사람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전 가장 멋있다고 생각해요. 다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 그러니까 제가 잘 못하는 부분이죠. 흐흐.”

성준은 미술관에 있던 피아노를 잠시 두드려보았다. 아쉽게도 나는 다른 층에서 촬영을 준비하느라 그 모습을 보진 못했다. “엉망이었어요. 게을러서 한동안 연습을 못했더니, 손도 안 풀리고 잘 안 되네요.” 몇 년 전 인터뷰에서 성준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학창 시절 미술이나 무용을 배울 때도 그랬지만 그는 좋아하면 무조건 직접 해봐야 하는 성격이다. “지금은 가능해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0번 D959 2악장. 제가 되게 좋아하는 곡이에요. 뭔가 후벼 파요. 신경질적이고 지질한 감성도 있고. 전 음악적인 건 1도 모르지만 진짜 자기 얘기를 하는 것 같거든요.” 피아노 소나타 20번은 슈베르트가 죽기 몇 달 전에 완성한 곡이다. 슈베르트 특유의 서정적인 감성에 절망적인 우울함도 배어 있다. 피아노는커녕 악보도 볼 줄 몰랐다는 성준은 이 곡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음표를 글로 써서 다 외웠어요. 또 치고 싶은 슈베르트 곡이 있는데 그건 너무 어려워요. 라흐마니노프, 말러도 좋아하지만 슈베르트는 진짜 멋진 것 같아요.” 성준에게 매년 봄마다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를 추천했다. 도다리 쑥국과 클래식은 꽤 괜찮은 궁합이다. “근데 전 도 닦는 것처럼 가만히 연주회장에 앉아 음악을 듣는 게 아직 어색해요. 그냥 운전하면서, 강변북로 달리며 들을 때 감동이 더 큰 것 같아요.”

검정 스트라이프 패턴의 오버사이즈 재킷은 준지(Juun.J), 브이넥 셔츠는 릭 오웬스(Rick Owens), 와이드 팬츠는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구두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검정 스트라이프 패턴의 오버사이즈 재킷은 준지(Juun.J), 브이넥 셔츠는 릭 오웬스(Rick Owens), 와이드 팬츠는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구두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2년 전 성준은 자기만의 첫 차를 구입했다. 늘 갖고 싶었던 스포츠카였다. “심지어 계약금을 걸어놓고 7~8개월이나 기다려서 샀어요. 드림카 같은 거였거든요. 진짜는 또 따로 있긴 한데 저한테 제일 현실적인 드림카라고나 할까.” 카 오디오에도 욕심을 냈다. “정작 엔진 소리가 시끄러워서 별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냥 기본형으로 할걸. 돈 아까워요.” 차를 좋아하는 그는 속도나 겉으로 보이는 디자인보다 메커닉적인 구조의 아름다움을 본다. 보닛을 열었을 때나 차의 바닥 단면을 밑에서 올려다봤을 때의 그 완벽함 말이다. “한마디로 ‘간지’ 나죠.” 성준은 좋은 눈을 가졌다. 미적인 부분에 있어 그는 꽤 까다롭다. “그런 것 같아요. 저한텐 그게 중요해요. 물론 저보고 좀 꾸미고 다니라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오버사이즈 롱 코트는 푸시버튼(Pushbutton), 포켓치프는 슈트(Shuit), 티셔츠와 데님 와이드 팬츠는 마틴 로즈(Martine Rose at 10 Corso Como), 벨크로 첼시 부츠는 베르수스(Versus).

오버사이즈 롱 코트는 푸시버튼(Pushbutton), 포켓치프는 슈트(Shuit), 티셔츠와 데님 와이드 팬츠는 마틴 로즈(Martine Rose at 10 Corso Como), 벨크로 첼시 부츠는 베르수스(Versus).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기 전 성준은 영화 한 편을 끝냈다. 신하균, 김옥빈과 함께 호흡을 맞춘 정병길 감독의 <악녀>다. 올해 안에 개봉될 영화다. “오랜만에 진짜 재밌게 촬영했어요. 제가 맡은 인물이 국정원 요원인데 의외성을 주고 싶어서 감독님께 먼저 제안을 했어요. 좀더 멍청하고 바보 같았으면 좋겠다고. 그래야 현실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다고요. 결과적으로는 감독님도 만족하셨어요. 쫑파티 때 그랬거든요. 성준씨만 나오면 현장이 너무 유쾌하고 즐거워졌다고. 제 자랑이긴 한데, 그래서 ‘역시 나군’ 했죠.” 연기는 이 호기심 많고 재주 많은 배우가 지난 몇 년간 제일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다. 그는 ‘공부하는 맛’에 연기를 한다고 말했다. “연기는 너무 어렵고 폭도 굉장히 넓어서 질릴 틈이 없어요. 그리고 작품을 한다는 건 사람과의 소통이니까, 저의 고질적인 외로움이 해소되는 것도 같고요. 그 일련의 과정이 저한텐 철학적으로 다가와요.”

성준은 야망이 없다. 열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누구나 탐낼 만한 인생 캐릭터를 꼭 연기해보고 싶다거나 반드시 무슨 상을 받고야 말겠다는 식의 이글거리는 목표가 없다. 다만 그는 좋은 작품의 일부로서 그 현장에 있고 싶다. 그리고 또 뭔가를 배울 것이다. 스물여덟 살에 세상을 떠난 에곤 실레보다 성준은 아직 한 살이 어리다. 성준의 얼굴은 100여 년 전 화가의 외로운 자화상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부조리한 삶에 깃든 반짝이는 생의 아름다움을 보고, 평범한 일상의 위대함을 아는 성숙한 남자가 되어간다. 그는 여전히 근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