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년만의 프러포즈

오늘날 자동차에 가까운 발명품은 247년 전, 1770년 프랑스에서 등장했지만 여성을 위한 고민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너무 늦은 프러포즈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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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처음부터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이었다. 한 세대의 욕망과 현실을 따라 달리는 네 바퀴의 트렌드. 이를 납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동차의 탄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차의 기획은 최소 5년 전부터, 차체 컬러는 3년 전에 정해진다. 글로벌 화학사에서 수년씩 앞서 유행 컬러와 피그먼트의 트렌드를 철강부터 섬유까지 제안하는데, 그중 가장 먼저 만나는 건 자동차 공급 업체라고 봐도 좋다. 이 세계의 디자이너들은 지금 눈앞에 유행하는 색조차 최신 기술과 자본에 끌려가는 트렌드라고 단언한다. 자동차 메이커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감지하고, 정부와 자본의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기술과 미학의 균형을 맞춰가야 할 의무에 놓인다. 무려 인간의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당연히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의 각축전은 예민하기 그지없다. 5년을 내리 달궈 내놓은 작품이건만 반드시 누군가의 취향과 지갑의 크기를 비껴나갈 것이다. 그들은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해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전통적인 주요 소비층인 남성 위주의 결정을 떠나기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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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차는 태생부터 여성을 생각하기 힘들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며 참전국이 앞다퉈 탈것을 개발하면서 자동차 기술이 급성장했고, 독일과 일본, 미국과 프랑스로 나뉘는 권력의 위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재규어의 영국과 페라리의 이탈리아는 대주주의 국적은 바뀌었을지언정 전통과 팬덤을 갖춘 럭셔리 브랜드는 유지하고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한국, 중국, 인도는 생산량의 정도로 글로벌 넘버 5를 오르내린다. 이러한 사정 탓에 여성 고객을 향한 차는 한 세대 이상 늦게 움직여왔다. 여성이 경제적 활동을 하는 독립된 인간으로서 인정받은 속도라 해도 좋을 수준. 칼럼을 쓰는 내내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샤넬의 무릎길이 스커트만큼 획기적인 사건이 드러나길 바랐지만 뚜렷한 게 없었다. 한국은 1919년 23세의 최인선 씨가 최초의 운전면허 취득 여성으로 기록되어 있건만 그를 위한 설계를 기다리기까지는 50년 이상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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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have the right kind of wife for it?” (이 차를 알아볼 만한 괜찮은 아내가 있습니까?) 1963년 폭스바겐이 미국에 걸었던 마이크로버스의 광고 카피다. 요즘 같으면 UN 인권위에 고발이라도 할 심각한 매너지만, 당시엔 지적인 중산층 여성을 자극하는 좋은 시도로 여겼다. 마이크 로버스는 카페 소품으로 종종 볼 수 있는 ‘VW’ 엠블럼의 빈티지 미니 버스다. 1960년대 히피의 상징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실상은 오늘날 대형 SUV에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는 ‘사커맘’들이 주 수요층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1972년 최초로 거울 달린 선바이저가 앞자리 양쪽에 달렸을 때에야 자동차에 있어 여성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1990년대 여성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투표군으로 부상한 후 자동차 회사는 본격적으로 조수석과 뒷좌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BMW와 아르마니 수트로 상징되는 호화롭고 기능적인 제품에 지갑을 여는 여피(Yuppie) 세대는 남녀 모두에 해당했다. 남성이 차를 고르는 데 결정적인 입김을 불어넣는 여성의 파워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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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성 평등 지수 1위에 빛나는 스웨덴 브랜드 볼보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임산부 더미(사고 시뮬레이션을 위한 인형)를 이용한 안전 기술을 공개했다. 태아를 포함한 ‘인간의 라이프 사이클’을 연구하는 데 의미를 둔 것이었다. 2004년 여성 연구 개발 인력으로만 구성된 YCC(Your Concept Car) 컨셉을 선보이기도 했다. 포니테일 머리가 엉키지 않도록 운전석의 헤드레스트는 뚫려 있었고 하이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가속페달 아래 보조 받침대가 보였다. 리넨과 카펫으로 마감한 실내는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으며 따스한 조명과 컬러감을 더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지금도 그들은 개발 인력의 성비를 5:5로 맞춰 테스트에 임하고 있다. 한발 앞서 신경 쓴 결과물은 지금 가장 고급스러운 대형 SUV, XC90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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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으로 들어보니 어때요?” 2015년형 렉서스 NX300h가 한국에 소개됐을 때 수석 엔지니어는 트렁크를 열고 탈착되는 실내 커버봉을 불쑥 건넸다. 1kg 남짓, 무척 가벼웠다. “중소형 SUV의 주요 고객인 ‘커리어 우먼’은 전형적인 여성 취향 디자인을 싫어합니다. 이런 부속을 다루면서 끙끙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도 않죠.” 실내는 ‘시크’를 키워드로 부드러운 재질의 무광 블랙 마감을 골랐는데, 이는 반짝이는 크롬을 선호하는 남자들의 취향 사이에서 절충한 부분. 2012년부터 20~30대 여성 연구원의 비율을 높이고, 사내 평가단의 성비를 5:5로 바꾸며 의견을 적극 수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판매고는 순항 중이다. 이참에 여성 운전자 이슈를 문의했더니 토요타 본사는 의미심장한 멘트를 보내왔다. “본격적으로 하이브리드 카에 대한 관심과 판매가 늘면서 여성 소비자의 수도 같이 상승하고 있다.” 친환경으로 대표되는 최신 기술에 대한 저항감이 여성에게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뜻이었다. 좋은 신호다. 더욱 여성을 신경 쓸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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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차는 더 노골적이다. 프랑스 시트로엥의 DS3는 지방시가 사랑하는 핑크 무드로 실내를 마감하고 메이크업 키트를 맞춰 넣어 특별판을 만들었다. 기아 모닝은 얼굴 전면을 비추는 무드등을 선바이저에 크게 달아 어두운 밤 화장을 고칠 때도 실수하지 않을 거라 보장한다. 모닝의 사전 예약자 8,925명 중 20대 구매 고객의 57%가 여성이고 전체 고객이 43%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앞서 손톱이 깨지지 않는 그립형 도어 핸들을 만든 것도, 경차 최초로 스티어링 휠에 열선을 넣고 레이디 옵션이라 명한 것도 필요한 수순이었다. 한편, 최고급 브랜드는 모든 것을 맞춤 주문할 수 있기에 더욱 우아하다. 롤스로이스의 던 인스파이어드 바이 패션은 2017년 오뜨 꾸뛰르에서 영감을 받아 도어 포켓에 고급 실크를 덧댔고, 팬텀 라임라이트 컬렉션은 시계와 보석함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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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틀리는 모자를 즐겨 쓰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탈 수 있도록 천장을 높인 스테이트 리무진을 대접했다. 원한다면 지금 내 손에 바른 네일 라커에 맞춰 새 차에 컬러를 입히고 야외용 조리 세트를 넣어줄 수도 있다.

이쯤에서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날 여성 옵션이란 편의와 안전을 고려한 최신 기술을 포장한 새로운 이름이란 걸. 어쩌면 ‘여성을 위한 차’라는 말이 사라지는 때가 바로 인간을 위한 자동차 기술이 절정에 이른 세상이리라. 이브 생 로랑이 르 스모킹 턱시도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수트의 개념을 뒤바꾼 것처럼, 또 한 번 자동차의 뜨거운 프러포즈를 기대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