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oming Days

어느 날 당신에게 천우희가 웃으며 찾아온다면? 늘 슬퍼하던 천우희가 영화 〈어느날〉에서 사랑스럽고 포근한 영혼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불그레한 생기로 물들인 하루.

그래픽적인 플라워 패턴 톱과 깃털 디테일의 레드 스커트는 프라다(Prada), 핑크 리본 장식 가죽 재킷은 구찌(Gucci), 버클 뮬은 레이첼 콕스(Rachel Cox).

그래픽적인 플라워 패턴 톱과 깃털 디테일의 레드 스커트는 프라다(Prada), 핑크 리본 장식 가죽 재킷은 구찌(Gucci), 버클 뮬은 레이첼 콕스(Rachel Cox).

오늘 촬영 장소가 공사 중인 꽃집이다. 마지막으로 꽃집에 가본 지는 얼마나 됐나?
거의 없는 거 같다. 선물하더라도 꽃보다는 화분을 많이 한다. 화분은 계속 보면서 키울 수 있으니까. 꽃을 많이 받는데 금방 시드니 속상하고 너무 아깝더라.

누구에게 화분을 선물했나?
공연 보러 갈 때 준비하곤 한다. 요즘엔 음료를 사가도 당도가 높아서인지 배우들이 건강 생각해서 잘 안 먹는다.

최근에 본 공연은 무엇인가?
명동예술극장에 <메디아>를 보러 갔다. 이혜영 선배님을 꼭 뵙고 싶었거든. 한 8년 전쯤에도 <메디아>를 봤는데, 큰 무대에 아는 배우가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무척 강렬했다. 굉장히 연극적이지만 마지막 엔딩의 표현은 너무 사실적이었다. 아이를 죽이는 잔상은 꽤 오래갔다.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나?
연극을 좋아해서 한창 보러 다니다가 멀어진 때가 있었다. 근래 다시 시작했다. 그 멀어진 동안에는 전시를 찾아다녔다.

로맨틱한 프릴 디테일의 핑크 슬립 원피스는 세드릭 샤를리에(Cedric Charlier at Mue).

로맨틱한 프릴 디테일의 핑크 슬립 원피스는 세드릭 샤를리에(Cedric Charlier at Mue).

인스타그램에 타마라 드 렘피카의 전시 글귀를 옮겼다. “나는 부드러워요. 나는 둥글고, 나는 조용하며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입니다. 나는 강력하고 나는 중요합니다.” 글귀를 보고 그 작가에 대해 찾아봤다.
아무 전시라도 보고 싶어서 한가람미술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접했다. 여성 작가여서 더 궁금했고, 결과적으로 너무 좋았다. 예술을 잘 알아서 전시를 보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라고 해야 할까? 예술을 대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이 예술가는 이렇게 했구나, 영감을 받는다.

평소에 사진작가나 화가가 예술을 풀어내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타마라 드 렘피카 작가는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후에 차기작에 대한 강박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공감하는 지점이 있을 것 같다.
예술로 뭔가를 표현하는 사람들은 특히 그렇다. 본인을 뛰어넘어야 하고, 전작보다 괜찮은 작품을 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전시에서도 “너무 많은 것을 쏟아버리면 본인은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는 얘기를 한다. 와 닿았다. 배우뿐 아니라 어떤 일을 함에 있어 모든 걸 불태우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정점을 찍고 나면 뭔가 허하다고 할까? 그래서 또 뭔가를 갈구하고 채워 넣으려 한다. 그게 나쁘지만은 않다.

어릴 적에 그림 신동이었다. 도예가인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아빠가 도예가셔서 집에 항상 흙이 있었다. 그걸로 조각까진 아니어도 늘 뭔가를 만들었다. 그림도 진짜 잘 그렸다. 지금은 아예 할 수 없다는 게 신기하다. 아빠도 “어릴 때 때려서라도 계속 시킬걸”이라고 말하신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지 않나. 발레도 시키고 피아노도 치게 하고 학원도 보내고. 우리 부모님은 나를 자유롭게 놔뒀다. 내가 “너무 하고 싶어” 하면 시키고 “하기 싫어” 하면 그만하셨다. 시간이 지나니 그림을 그리지 않는 딸이 아쉬우신 거 같다.

그림은 유년 시절 이후로는 그리지 않은 건가?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보면 어떨까? 많은 배우들이 연기 외적인 면을 그림을 그리며 풀고 있다.
미취학 아동일 때까지 그렸다. 많은 배우가 그림을 그리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너무 좋아했던 거라서? 그때만큼 잘하지 못할까 봐?
좀 겁난다. 그때처럼 잘하지도 못하고 흥미도 그만큼은 아니니까. 막상 시작하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아직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코럴 컬러의 아코디언 플리츠 원피스는 질 샌더(Jil Sander), 핑크 베이지 뮬은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코럴 컬러의 아코디언 플리츠 원피스는 질 샌더(Jil Sander), 핑크 베이지 뮬은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예전 인터뷰를 보면 다재다능한 배우들이 부럽다고 했다.
성향인 거 같다. 100이 있다 치면 어떤 이는 30, 30, 30 나눠서 쏟는데 나는 하나에 몬다. 한번 꽂히면 계속 그것만 생각하고 하려 든다. 타고나길 다재다능을 원하는 성향이 아니다. 조금 더 나이 먹고 여유가 생기면 주변을 둘러보는 눈이 생기지 않을까. 아직까진 지금 상태가 좋다.

아까 에너지를 불태우고 난 뒤의 허함에 대해 얘기했다. 쏟다가 방전이 되면 무엇으로 채워 넣나?
연기에 대해 날을 세우거나 예민한 편이다. 하지만 그걸 드러내거나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보통 스트레스를 받으면 무언가를 하면서 해소하지 않나. 나는 분출하지 않고 속에 가만히 둔다. 속이 막히고 답답하지 않은 걸 보면 자정작용을 잘하나 보다. 음… 기껏해야 집에서 오늘 연기에 대해 정리하거나 일기를 쓰는 정도다.

일기를 15년째 꾸준히 쓴다. 그것이 자정작용을 하나 보다.
일기만 써도 마음이 가라앉고 정리가 된다. 따로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귀찮아도 꾹 참고 썼는데 작년에는 왜 그런지 아예 손을 놨다. ‘쓰고 싶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고. 휴대폰에 메모는 했지만. 거의 10개월 동안 안 쓰면서 강박에 유연해진 거 같다.

어떤 강박인가?
오늘을 기억해야지, 잊지 말아야지.

가끔 과거의 일기를 들춰 보나?
거의 보지 않는다. 대신 연기에 관련해선 떠오를 때마다 휴대폰이든 어디든 메모하고, 1년에 한 번 모아서 타자로 쳐서 뽑는다. 그건 들춰 본다. 연기가 안 풀릴 때 예전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훑으면 도움이 된다. 내용은 거의 비슷하지만 보면서 인지하는 것과 아예 보지 않는 것은 다르다.

그 덕에 해답을 찾은 것도 있겠다.
모르겠다. 여전히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레드 레이스 시스루 원피스는 발렌티노(Valentino). 프릴 디테일 뮬은 로맨시크(Romanchic).

레드 레이스 시스루 원피스는 발렌티노(Valentino). 프릴 디테일 뮬은 로맨시크(Romanchic).

이번 영화 <어느날>은 팬들을 위해선 잘한 선택일 거다. 오랜만에 사랑스럽고 발랄한 역할을 맡았다. 역할 선택에 이 점도 작용했나?
그렇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연기고, 최종 선택도 내가 가장 중요하지만, 이제는 관객과 팬도 생각한다. 그분들이 보고 싶은 내 모습도 고려한다.

<한공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타고 팬카페에 남긴 글을 봤다. “나를 보며 위로받고 희망을 갖는 사람들이 많은데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 본인이 좋아서 하는 거지만 주변을 의식하고 함께 가기로 결심했음이 느껴졌다.
위로를 받는다는 메시지를 많이 받는다. 특히 연기 지망생 친구들이 나를 보고 힘을 얻는다고. 고맙기도 하고 책임감도 생긴다. 더 좋은 모습, 여러 가지 연기를 보여드려야겠구나.

“언니 너무 예뻐요” “좋아해요”라는 말 말고도 “위로 받는다”는 메시지를 받는 배우다.
연기를 하려는 친구들이 나를 롤모델로 삼는다니 믿기지 않는다. 내 롤모델인 송강호 선배님, 전도연 선배님은 너무나 크신 분들인데… 어린 친구들이 나를 보면서 연기의 꿈을 키운다니 너무 벅차다.

로맨틱한 프릴 디테일의 핑크 슬립 원피스는 세드릭 샤를리에(Cédric Charlier at Mue).

로맨틱한 프릴 디테일의 핑크 슬립 원피스는 세드릭 샤를리에(Cédric Charlier at Mue).

한국 영화에서 허리 역할을 하는 작품이 드물다는 것도 <어느날>에 출연하는 이유다. 예전에 유지태 씨도 <스플릿>이 중예산 영화기 때문에 참여한다고 했다. 배우로서 부담이 있을 거 같다.
아무래도 많은 예산과 스폰서를 낀 대작은 보장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말했다시피 예전에 작품 선택의 기준은 무조건 나였다. 끌리지 않으면 뒤도 안 돌아봤다. 또 무척 신중했다. 실패나 실수를 보여주기 싫고 무조건 완벽하길 바랐다. 사실 어떻게 완벽하겠나. 배우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주변과 합이 맞아야 하고, 배우가 좀 부족해도 주변의 도움으로 잘될 수 있다. 하지만 관객에게 조금이라도 부족해 보이기 싫었다. 무조건 큰 영화, 유명한 감독을 찾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한공주>를 선택하지 않았겠지. 좋은 시나리오가 중심이었다. 그런데 영화계에 있다 보니 피부에 닿는 문제가 있다. 여배우의 자리, 작품의 다양성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보였다. 그나마 활동하는 배우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더 움직여야겠다고. 조금 성에 차지 않거나, 겁나는 부분은 내가 열심히 해서 극복하고 이전보다 과감한 선택을 하려 한다. 특히 신인 감독이나 중예산 작품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힘을 실어드리고 싶다.

시간이 갈수록 출연 제안이 들어오는 작품 성향도 바뀌었을 거 같다.
아쉽다. 아직 한참 어리고 모자란 배우인데 “작은 영화인데 어떻게 드려요”라는 얘기를 들으면 민망하다. 정말 독립영화의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 개봉한 좋은 독립영화를 보면 아깝고 욕심난다. 물론 그 배우가 잘 어울려서 캐스팅된 거지만. 나는 정말이지 다양한 작품에 열려 있다.

진주 디테일의 패턴 블라우스와 실크 팬츠는 구찌(Gucci).

진주 디테일의 패턴 블라우스와 실크 팬츠는 구찌(Gucci).

<어느날>의 이윤기 감독은 <여자, 정혜> <멋진 하루> <남과 여> 등 섬세한 연출을 선보여왔다. 실제로는 마초에 가깝게 터프하다고 해서 놀랐다.
그 섬세함은 다 어디 갔냐고 농담하곤 했다. 물론 섬세하지만 일부러 더 투박하게 구시는 거 같다. “밥 먹으러 가자”도 “우리 처먹으러 가자”라고 하신다. 욕을 별로 안 좋아해서 “감독님 꼭 처먹어야겠어요?”라고 농담한다. 약간 아빠 같다. 쉰, 예순을 넘어가면서 표현도 서툴고 서운한 것도 많은 아빠. 쑥스럽기도 하고 서운한 티를 내기 싫으니까 괜히 더 강하게 구는 거다. 그래서 딸처럼 “왜 그러세요” 하면서 일부러 넉살도 많이 부렸다.

감독님과 가장 많은 나눈 이야기는 뭔가?
영화는 공동 작업이라 나는 특히 감독님과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감독님마다 성향이 다르고 배우는 현장에 따라 유연해져야 한다. 이윤기 감독님은 대화보단 배우에게 맡기는 편이시다. “마음에 드세요?”라고 여쭤보면 “너 괜찮으면 괜찮아”라고 하신다.

몸은 혼수상태이고 영혼인 미소(천우희)가 강수(김남길)에게만 보인다는 설정이다. 영혼이기에 연기를 한 번 하고, 다시 본인이 있는 것처럼 연기해야 해서 힘들었다고. 상상하고 가늠해야 하는 것이 촬영 중 가장 큰 난관이었나?
그런 기술적인 부분도 어려웠지만, 일단 감독님이 과묵하신 편이라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감독님이 괜찮다는 게 정말일까.

상대 배우인 김남길 씨는 대화를 많이 하는 성향이다. 그와 소통을 많이 했을 거 같다.
남길 오빠가 말이 많은 편이다.(웃음) 같이 작업하면서 오빠의 성격이 고맙더라. 본인 일만 하기도 쉽지 않은데 이것저것 챙긴다. 연기하면서 기 빠지고 예민해지는데 남길 오빠처럼 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오지랖 대표님”이라고 농담도 했는데, 고민도 다 받아준다. 한국 영화의 현실이나, 배우로서의 할 일 등 고민하는 지점이 비슷했다.

레드 레이스 시스루 원피스는 발렌티노(Valentino).

레드 레이스 시스루 원피스는 발렌티노(Valentino).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 주연의 <캐롤>을 네티즌이 천우희 씨로 편집한 영상을 얘기하면서 여배우가 ‘면대면’으로 서는 영화를 기다린다고 했다. 최근엔 <라라랜드>도 좋아했고. 다양성 측면에서도 제작됐으면 하는 영화는 무엇인가?
요즘은 ‘천만 영화’를 기획한다. 나도 천만 영화, 할리우드 히어로물 다 좋아한다. 문제는 작은 영화는 힘이 없고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하는 거다. 그 영화를 보고 싶어도 영화관에 걸리지 않는다. 하루에 한 번, 오후 3시 상영인데 직장인들이 어떻게 보겠나. 선택권이 상실된다. 그런 문제가 개선되고, 다양한 영화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은 늘 있다. 바뀌기는 쉽지 않겠지만 작은 노력이라도 보태고 싶다.

의무감이 너무 큰 거 아닌가?
큰 변화는 없겠지만 작은 변화라도 있다면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 풍자 쇼를 방불케 한 아카데미 시상식을 봤나? 배우가 공적인 자리에서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하이라이트를 봤다. 그 문제에 있어선 반반이다. 본인 의지가 뚜렷한 발언은 나쁘지 않다. 가끔 자기 의견도 아닌데 어필하는 분이 보기 좋지 않다. 배우에게 특정 이미지가 연관되는 게 좋은 걸 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흔히 ‘셀럽’이라고 하지 않나.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의 발언은 대중을 움직일 수 있기에 신중해야 한다. 나는 종교, 정치, 가족 얘기는 하지 않는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이들에겐 힘이 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시각이 있다. 그들도 존중하고 이해해야지. 나와 다르다고 인정하지 않고, 내 생각을 강요하려 드는 것처럼 보일까 봐 조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