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프리덤

을지로에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여든 지 2~3년. 싼 월세를 찾아, 기술 장인과의 협력을 위해, 서울시의 제안으로, 제각각 모여든 아티스트들로 을지로는 어떻게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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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삼일절에 ‘세운 사파리’에 간다고 했다. 세운상가 일대를 걸으며 역사와 현재를 탐방하는 거라고 했다. 나는 출장 때문에 가지 못했지만, 서울시에서 슬럼화된 세운상가를 살리려고 이런저런 판을 벌이는구나 싶었다.

어느 아티스트가 2014년 세운상가에 입주했을 때 다들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거기 아직도 있어?” 사람들에게 세운상가는 ‘잊혀진 계절’이다. 박정희 정부 때 불도저가 별명인 전 서울시장 김현옥의 주도하에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 복합 건물. 헬스장과 수영장, 학교까지 있는 핫 플레이스이자 서울 근대화의 상징. 2017 F/W 컬렉션에서 샤넬이 쏘아 올린 우주선도 만들 수 있다는 곳이지만 1990년대부터 슬럼화는 계속되고 있다. 그곳에 예술인이 스며든 것은 몇 년 전이다. 특히 작년에 을지로 일대에 터를 잡은 예술인에 대한 기사는 온갖 잡지를 장식했다. 허름한 을지로 벽에 기댄 젊은 작가의 사진은 뭔가 ‘힙함’을 전해왔다. 그들은 여전히 있을까? 와서 뭐가 좀 달라졌을까?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이 1년 만에 쫓겨나진 않았는지, 활동 규모는 커졌는지, 을지로 일대에 생기든 변화든 뭐든 불어넣고 있는지. 3월의 어느 날 나와 사진작가는 을지로 일대의 예술인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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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세운상가 재생 사업은 한창 진행 중이다. 일명 ‘다시 세운 프로젝트’. 그 산하인 세운상가 거버넌스의 운영단 세운공공에서 일하는 프로젝트 매니저 여인혁을 만나기로 했다. 그 역시 도예와 설치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로 세운상가 밥을 먹은 지는 3년 차다. “세운청계상가 811호로 오세요”라고 했는데, 한참을 헤맸다. 세운상가는 하나의 건물이 아니다. 현대상가, 세운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PJ호텔, 인현상가, 진양상가를 아우른다. 현재 현대상가는 철거되고 7개의 건물이 남아 있다. 건물은 대체로 1~4층까지는 상가, 5층부터는 아파트 혹은 사무실로 사용된다. 상가는 오디오, 조명, 카메라, 오락기, 컴퓨터 등등 전자 제품과 인쇄 기획사, 양복점, 금은방, 꽃시장 등 다양하다. 센과 치히로의 전자 제품 버전에 들어온 듯 어지러웠다. 폐오락기로 들어찬 ‘만물나라’를 세 번째 봤을 때 경비 아저씨를 만났다. “젊은 애들인가, 뭐시긴가 찾아왔구먼.”

을지로 관련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비둘기 네트워크’는 청계상가에 있다.

을지로 관련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비둘기 네트워크’는 청계상가에 있다.

헤매던 중에 800/40이란 간판이 보였다. ‘을지로 아티스트들’ 기사에 단골로 나온 전시 공간이다. 겨울엔 참 춥겠다 싶은 날림 벽을 기웃거리자 안에서 소리쳤다. “그 작가들 한 달 전에 이사 갔거든요? 이젠 인테리어 사무실이에요.” 보증금 800만원에 월 40만원을 냈던 이곳은 월세가 올랐다고 한다. 섭외를 거절하던 다른 작가가 떠올랐다. “죄송한데요, 을지로가 미디어 안 탔으면 좋겠거든요.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들어봤죠? 우리 진짜 무섭다니까요.”

세운상가 건축의 백미인 중정. 이곳에 많은 작가들이 입주해 있다.

세운상가 건축의 백미인 중정. 이곳에 많은 작가들이 입주해 있다.

결국 여인혁이 우리를 데리러 나왔다. 거버넌스의 사무실은 중정에 있었다. 세운상가의 하이라이트 건축이라면 여기 아닐까. ‘ㅁ’자 중정으로, 반투명 천장에서 햇빛이 쏟아졌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작가들이 점심 메뉴를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4층에 입점한 아티스트가 우래옥의 함흥냉면을 제안했는데 아직은 찬 날씨에 나갈 것인가. “다들 친해 보이네요”라고 말하자 여인혁이 한쪽에 쌓인 세운상가 소식지를 주며 말했다. “예술가들의 네트워크 구축이 우리 일 중 하나죠.” 세운상가에는 비영리 예술 공간인 스페이스_바421, 예술 기획 집단인 개방회로, 아티스트 빠키의 1인 갤러리 빠빠빠탐구소 등 다양한 예술인과 기획자와 스타트업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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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버넌스가 참여하는 ‘다시 세운 프로젝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세운~대림상가 간 공중 보행교를 되살려 청계천 방문객이 이를 통해 종묘와 남산까지 갈 수 있게 하는 것. 둘째, 전자 산업 생태계가 살아나도록 상인, 예술가, 시민이 협력 관계를 만드는 것. 셋째, 재개발 과정에서 원주민과 예술가가 목소리를 내도록 돕는 것. 예를 들면 나의 고장 난 물건을 고칠 수 있는 기술자를 연결해주는 ‘수리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세운상가 전수조사를 한 아카이브로 예술가와 전자상가 기술자를 연결해준다. “이해관계가 얽혀서 힘들 텐데요?”라고 물었다. “계속 노력했더니 이젠 많이 열어줍니다.” 2~3년 새 변화의 바람이 불면서 진작 입주한 예술가와 최근에 들어오는 스타트업, 비예술가 사이에 갈등도 있지만 노력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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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 말에는 ‘비둘기 네트워크’를 연다. 을지로에 거주하거나 거주하지 않더라도 을지로에 관심 있는 예술인의 창작 유통 플랫폼이다. 현재 20여 명의 작가와 30여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청계상가 3층 데크의 가열 312호에 전시 공간도 마련했다. “우선 작가들의 작품을 팔아 수익을 안겨주는 게 목표예요.” 개방형 오픈 스튜디오 ‘슬로우슬로우퀵퀵’의 양아치 작가와의 협업이다. 비둘기 네트워크가 자리한 데크는 한창 공사 중이었다. 이곳에 큐브들이 들어서면 더 많은 창작자와 기획자가 유입될 거다.

세운상가라는 거대한 건물을 나와 을지로의 골목에 들어섰다. 낮에 온 건 처음이었다. 밤에 취해서 춤추러 신도시에 가거나 서울에서 생맥주가 가장 맛있다는(손님이 많아서 생맥주가 빨리 순환된다는 논리) 만선호프에 가본 적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어둡고 외로웠다. 낮의 을지로 골목은 철의 세계였다. 로봇 파이터들이 등장하는 영화 <리얼 스틸>을 본 적 있다면, 그 소규모 버전이다. 많은 철공소와 뭐든 만들고 자르고 나르는 단층의 가게들이 빼곡하게 이어져 있었다. 샛길에는 오래된 여관, 카드는 받지 않을 식당 몇 개, 만나기로 한 이현지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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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의 기술 장인과 협력해 선보인 조명 아트 상품.

그녀는 뉴욕에서 학업을 마치고, 을지로 골목을 투어하는 ‘을지유람’에 참여하면서 이곳을 알게 됐다. 최근에는 ‘을지로 기록관’이란 이름 아래 을지로의 풍경을 담아낸 전시도 가졌다. 만난 곳은 그녀의 두 번째 작업실이다. 첫 번째 공간은 재개발 때문에 나가야 했다. 대신 주인이 이사 갈 곳에 화장실을 지어줬다고 좋아했다. “을지로 작업실에 있으면서 화장실이 제일 큰 문제였거든요. 편의점과 화장실을 찾아 지하철역까지 가야 했어요.” 풀지 않은 짐으로 어지러운 좁은 공간은 갓 칠한 페인트 냄새가 차 있었다. 그녀가 을지로에 머무는 이유는 간단하다. 중구청에서 지원을 받아 월세가 월 5만원으로 저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의 예술인이 공통으로 말하는 장점 “모든 재료를 구할 수 있다. 없는 게 없다. 상상하던 아이디어를 기술자와 협업해 현실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모여 있기에 도는 에너지가 좋아요. 내 사명을 더 빨리 실현하고 싶어지죠. 혼자 떨어져 있는 것보다 을지로로 묶여 홍보할 일도 생기고요.” 그녀에게 화장실 말고 을지로 입주의 단점을 물었다. “생각보다 월세가 싸지 않아요. 서울의 중심이다 보니 노후된 시설에 비해 저렴하진 않죠. 저는 그나마 중구청의 공모에 뽑혀 월세의 90%를 지원받는 거예요.” 그녀는 중구청의 도움을 받는 대신 공공사업에 동원되어야 한다. “젊은 작가로서 다양한 공공 예술을 해볼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아요.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어요.” 을지로가 가진 역사, 분위기에 끌리진 않았느냐고 묻자 이현지 작가는 을지로 통은 R3028의 고대웅 작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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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3028은 ‘세상을 위한 예술’이란 주제 아래 창작과 예술 교육을 하는 작가 집단이다. 총 8명의 작가가 작업실 겸 전시 공간으로 쓴다는 곳으로 이동했다. “우리끼리 원 없이 전시하고 싶어서 공간을 찾았어요. 젊은 작가는 전시 기회를 얻기 힘들잖아요.” 비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권은솔, 박상현의 2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이가 드문지 A4에 인쇄된 전시 팸플릿이 뭉텅이로 있었다. 커튼을 젖혀 고대웅 작가의 작업실에 들어갔다. 긴 쇠막대기가 있다. 이 자석으로 을지로를 거닐며 모은 쇳가루로 꽃을 만들었다. 과정을 찍은 영상과 함께 <도시도감시간의 축적 Urbayth>라는 단체전에 선보였다. 털 몇 점도 붙어 있었는데, 을지로에 참 많은 길고양이의 털이라고 했다. 고양이의 발자국이 찍힌 시멘트 조각을 내게 선물했다. 그는 개인 창작도 하지만 을지로의 매력에 빠져 관련 작업을 많이 한다. “한때는 이곳에 현금이 너무 돌아서 퍽치기가 많았대요. 아침에 보면 골목에 피가 낭자해 있었다죠.” 1700년대 지도에 나오는 골목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했다.

얘기 중에 1층 가게 아저씨가 찾아왔다. “고 사장~.” R3028은 을지로 일대 기술 장인들과 협력하는 프로젝트를 한다. 그들과 조명 아트 상품을 기획하기도 했다. 디자인은 R3028이, 기술적인 문제는 장인이 해결한다. “젊은 작가란 사람들이 들어오니 어떠세요?” 내 질문에 그는 “뭐, 들어오든 말든 알게 뭐람”이라며 나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조명 아트 상품은 청계상가 317호 사장님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골드조명이라는 가게의 간판은 R3028의 작가가 그렸다. 이 지역의 아이들과 을지로 지도를 그리는 미술교육을 하고, 올해는 공무원을 상대로 그림 감상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공무원들의 시선이 달라져야 정책이 바뀔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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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을지로에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유입되고 있다. 물론 을지로와 관련 없이 장소만 빌리고 온전히 개인 창작만 하는 작가도 많다. 다만 산발적인 움직임이 정리되어 관객을 불러 모으길 바란다. 내년에 을지로 2탄을 취재할 땐 나부터 길을 헤매지 않길, 작가들이 어떻게 자기 세계를 펼치는지 좀 더 많은 이가 알 수 있는 플랫폼이 생기길. 그리고 모두 쫓겨나지 않고 성장해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