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만 남은 드라마

드라마의 친구인 ‘출생론’과 ‘시한부론’은 ‘음모론’으로 대체되었다. 형사, 변호사, 검찰, 재벌, 이름 없는 시체가 나와 살인과 복수를 지지고 볶으며, 간편하게 돈 많은 사이코패스의 음모로 귀결 짓는다. 사건만 있고 사람은 없다.

음모드라마 일러스트

집에 텔레비전이 없다. 웹 사이트의 정기 이용권을 끊어 드라마와 예능을 본다. 거의 다 본다. KBS1에서 하는 <이웃집 찰스>와 현아의 넋두리 리얼리티까지 챙겨 본다. 재미없는 드라마도 1~4회까지는 참고 본다. 재밌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본다. <보그> 오디언스를 위한 예술 문화 타령을 하다가 집에서는 침대에 누워 초점 없는 눈으로 노트북을 켠다. 세상은 끝없이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요즘 가장 정주행하는 드라마는 <보이스>와 <피고인>이다. 헷갈린다. 지성이 나오는 드라마가 <보이스>인가, <피고인>인가? 탈옥은 어디서 했지? 그러다가 <보이스>에서 소머즈급의 청력을 가진 이하나의 ‘어벤져스’ 캐릭터를 떠올리며 구별한다. 이하나와 장혁이 짝꿍이니까 지성은 <피고인>이지. 내용은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데, 아무튼 음모론이다. 지성이 4주째 탈옥하려던 이유는 아내를 죽이고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재벌남(그는 형을 죽여 형인 척 하고 아내의 친구도 죽이고 다 죽인다)의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서며, 장혁이 도끼눈을 뜨고 미친개 형사가 된 이유도 비슷하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당했고, 음모의 주체자인 재벌은 극악무도하며, 극악무도함을 증명하는 갖가지 살인 사건이 에피소드를 구성한다. 여기도 저기도 검사와 형사와 검찰과 재벌가와 사이코패스가 나온다. 그리고 초반에는 매회 이름 모를 시체가 나온다. 피해자들은 에피소드의 소모품이며 추가 설명을 부여받지 못한다. 음모의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냥 다 미친 사이코패스이며, 어린 시절 학대라는 단편적인 설명만 있다. 이들 드라마에서 집중하는 것은 다양한 살인법과 주인공이 얼마나 집념 있고 강력하게 음모를 향해 달려가느냐, 달려가는 중에 자잘한 사건을 쾌감 있게 해결하느냐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2012년 <추적자 더 체이서>에서 손현주가 혈혈단신으로 거대 권력을 미친 듯이 파헤치며 드라마의 지평을 넓혔을 때, 나는 환호했다. 시한부 인생과 뒤바뀐 아기와 알고 보니 친남매, 재벌과 캔디의 넘쳐나는 드라마판에 이렇게 스펙터클하고 ‘영화’적인 드라마라니! 드라마 <시그널>의 성공과 <내부자들>을 비롯한 음모론 영화의 연속 중대박 행렬에서 제작자들은 희망을 본 듯하다. 몇 년 전부터 미드와 영드의 짜임새 있는 음모에 대한 유저들의 열광과 우리나라는 왜 못 만드느냐는 질타도 이런 드라마의 유행을 낳았을 거다. 분명 <보이스>와 <피고인>은 꽤 촘촘한 시나리오다. <프리즌 브레이크>가 떠오르든 말든 <피고인>에서 지성은 감옥을 탈출했다 안 했다 하며 시청자의 마음을 졸인다. <보이스>도 낱개의 살인 사건이 알고 보니 음모론의 가지였음이 밝혀지며 흥미롭다. 그런데 피로하다. 두 드라마 탓만이 아니다. 모든 드라마에 언제부턴가 음모론이 낀다. 출생론의 바통을 음모론이 받은 듯하다. <로스트>가 생각나는 드라마 <미씽나인>의 비행기 추락의 배후는 당연히 음모이고, 아줌마의 인생 찾기인 <완벽한 아내>도 살인 사건으로 시작한다. 이전 같으면 그냥 인생을 찾으면 될 것을 굳이 미스터리를 끼워 넣는다. 흥행 공식처럼.

나는 음모론을 무척 좋아한다. <넷플릭스>에 회원 가입할 때 좋아하는 영화를 골라야 한다. 자동으로 유저가 원하는 영화를 추천하기 위해서다. <인생은 아름다워> <트루먼 쇼〉를 고른 것이 무색하게 스릴러만 추천해준다. 내가 스릴러만 찾아 보니까. 사건을 쪼고 짜고 밀고 당기다 마지막에 모든 것이 해결되면서 행복해진다. 그런데 국내 드라마의 반복되는 등장인물의 직업과 비슷한 음모론, OCN이 내던 콘텐츠를 전 채널에서 밀어내면서 지쳤다. 차기 예정작을 보자. 썩은 권력을 응징하는 형사과 계장 이보영의 <귓속말>, 타임슬립 하는 형사의 살인범 잡기인 <터널>(아, 제발 타임슬립도 그만!) 등. 너무 지겨워서 <공조>조차 보지 않았다. 설 연휴 가족을 겨냥한 영화지만 국정원의 음모나 “민중은 개돼지” 같은 게 나올 듯해서다.

드라마에서 예술 하자는 게 아니다. 영양소는 없으며 분명 설사할 걸 알면서도 불닭볶음면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푼다. 그런데 매일 먹으니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고 짜증이 난다. 이들에는 사건만 있고 인간이 없다.

드라마는 시대가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낸다. <피고인>은 전체 드라마 중 시청률 1위다. 사람들은 음모론을 좋아한다.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보니 음모론의 주체가 차라리 사이코패스임을 납득한다. 그리고 약자였던 인간이 후룩후룩 헤쳐나가길 바란다. 최근에는 음모론과 함께 스멀스멀 다른 장르가 올라오고 있다. 정극인데 CG로 하트와 땀방울을 그리고 과장된 표정 연기를 하던 한때의 일본 드라마처럼 발랄한 시트콤형 드라마가 인기다. <김과장>과 <힘쎈여자 도봉순>이 그러하다. 이들도 가만 보면 전통적으로 약자인 위치에 어벤져스 능력을 부여했다. 여자 도봉순은 네 살 때 차를 세울 정도로 힘이 세서 납치범을 잡고, ‘노스펙’의 김과장은 회계의 신이어서 비리를 파헤친다.

우린 다양한 플롯보다는 냄새 나고 견고한 권력을 나와 비슷한 인간이 헤쳐가주길 바라나 보다. 그래도 몇몇 드라마를 통해 체험한 다채로운 음모론이 그립다. <워킹 데드>에서 점점 변해가는 주인공이 인간의 복잡한 태생을 떠올리게 하듯이, 캐릭터는 선과 악, 복수와 살인의 이분법이 아니라 배우의 주름 하나하나에 이야기와 이유와 변화가 서려 있길 바란다. 형사와 검찰의 직업적 한계를 벗어나긴 힘들겠지만 때로는 영화 <범죄의 여왕>의 고시원 404호 엄마처럼 다른 인물의 활약도 기대한다. 또 음모의 주체도 케빈 스페이시의 다리 절뚝이는 반전은 없더라도 뒤통수를 쳤으면 하며, 진행 과정도 촘촘한 퍼즐 조각을 기대한다. 드라마 덕후로서 욕심이 과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