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Quiet Heir

스키아파렐리의 후계자 베르트랑 기용은 평생을 오뜨 꾸뛰르와 함께했다. 초현실주의와 쇼킹 핑크의 하우스를 이끌고 있는 이 조요(照耀)한 디자이너를 만났다.

Bertrand Guyon_Maison Schiaparelli BD

“천천히 꾸미기 시작했어요. 그 어떤 것도 단번에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1월 오뜨 꾸뛰르 컬렉션이 한창이던 파리에서 스키아파렐리의 디자인 디렉터 베르트랑 기용(Bertrand Guyon)을 만났다. 꼭꼭 숨겨둔 보물 창고 같은 사무실이 멋지다고 말하자 수줍은 미소를 짓던 디자이너가 답했다. 그가 나를 초대한 곳은 리츠 호텔을 이웃으로 하고 있는 방돔 광장의 스키아파렐리 아틀리에. 이틀 전 올봄을 위한 꾸뛰르 쇼가 열렸던 3층 쇼룸을 지나 좁은 계단을 따라 두 층을 더 올라간 공방에서도 구석에 자리한 그의 개인 사무실은 다락방에 가까웠다. 방돔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창 옆에 자리한 책상 오른쪽에는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항상 메종의 창립자가 지켜보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그는 다시 슬며시 웃어 보였다. “저를 바라보면서 응원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17 S/S Haute Couture

2017 S/S Haute Couture

193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하우스가 약 60년만의 잠에서 깨어난 건(창립자는 54년 하우스의 문을 닫았다), 토즈 그룹의 회장 디에고 델라 발레 덕분. 그는 브랜드를 사들이면서 천천히 재기를 준비했다. 첫 번째 신호는 2012년 미우치아 프라다와 함께 했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의 의상 전시. 하지만 디자이너 없이 하우스를 꾸릴 수는 없는 일. 패션계를 떠났던 크리스찬 라크르와는 단 한 번 특별한 컬렉션을 완성했고, 그를 이어 로샤의 마르코 자니니가 1년 정도 하우스를 지켰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가문에 입성한 이가 바로 기용.

2017 S/ S Haute Couture

2017 S/ S Haute Couture

“전 아주 어릴 때부터 꾸뛰르를 꿈꿨습니다.”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자란 기용은 어린 시절 우연히 접한 <보그>를 보며 패션을 상상했다. 당시는 이브 생 로랑, 지방시, 피에르 발맹, 디올 등 프랑스 패션의 전성기. “오뜨 꾸뛰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 곳에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란 짐작은 할 수 있었죠.” 파리에서 패션을 공부한 그가 처음으로 꾸뛰르 세상을 만난 곳은 위베르 드 지방시의 하우스. 그곳에서 좋은 소재가 여성에게 선사하는 따스한 기운을, 완벽한 실루엣이 주는 자신감을 배웠다. “하루하루가 모두 위대한 수업이었습니다. 패션이 완성되는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라크르와, 발렌티노로 옮겨가며 꾸뛰르 작업만 고집했다. “꾸뛰르에는 패션의 가장 순수한 면이 남아 있습니다.”

2017 S/ S Haute Couture

2017 S/ S Haute Couture

처음 스키아파렐리 하우스에서 러브콜이 왔을 때, 그는 두렵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전 디자이너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달리와 함께 한 작업, 랍스터 드레스, 쇼킹 핑크 등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죠.”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는 자신의 새로운 직장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매일 새로운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놀라운 아티스트였습니다. 동시에 당시 여성에게 진짜 자유를 선사했죠.” 초현실주의 작품 뒤에 숨겨진 디자이너의 이면에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아이디어가 숨겨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직 한창 남아 있습니다.” 전성기 시절에는 라이벌이었던 코코 샤넬을 능가할 정도로 영향력과 인기를 자랑하던 디자이너에 대한 오마주는 그렇기에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모든 것이 창립자를 위한 찬가일 수는 없는 법. 아디다스의 슈퍼스타를 신고 나와 마주하고 있는 디자이너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현시대의 여성은 70년 전 여성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간과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직까지는 극소수의 고객과 레드 카펫을 위한 스타만 만날 수 있지만, 서서히 그 보폭을 넓혀갈 예정이다. 이번 컬렉션 속에 숨어 있는 봄버 재킷 혹은 심플한 핑크 드레스가 그러한 노력의 결과일 것. 꾸뛰르에 또 다르게 접근하는 계획은 또 있다. 지난해 선보인 “프레타꾸뛰르(Prêt-à-Couture)”가 바로 그것. 물론 꾸뛰르와 마찬가지로 메종과 특별히 약속을 잡아야만 구입할 수 있지만, 그 선택권을 넓혀주는 옵션. 앞으로는 이러한 컬렉션을 손쉽게 만날 수 있는 매장 등도 기획 중이다. “모두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급하게 움직이면 저희가 지닌 특별한 무언가를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