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의 한 표

투표를 한다고 금세 세상이 나아지리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는 투표를 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투표의 딜레마’를 즐길 때다.

Laprade, Knight with rose

“대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야, 너는 투표의 허무함과 무용함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었어.” 오랜 친구가 이런 안부를 전했다. 실은 사건이 있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때 반장으로 당선됐다. 공교롭게도 그때까지 난 반장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학창 시절 나는 자진해서 발표란 걸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즉각 사퇴 의사를 밝혔다. “저, 안 할래요.” 담임은 골치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반장 선거가 무슨 고무줄놀이인 줄 아는구나.” 하지만 그의 짜증보다 반 아이들의 황망한 표정이 더 기억에 남는다. 잘못이라곤 의지 없는 후보를 지지한 것뿐이었을 그들은 괜히 숨을 죽였다. 나는 그 ‘한 표’가 야기한 좌절과 환희가 뒤범벅된 부조리극을 목격한 최근에야 미안했어야 함을 알게 됐다. 내게 그들의 표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 권리가 없었음을 깨닫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일말의 미안함도 없이 국민들의 한 표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린 그녀는 갔다. 그리고 비감과 희망이 교차하는 현실 위에서 게임은 다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지난겨울 촛불집회를 ‘수선화 혁명’이라, 60년 만에 찾아온 봄철 대선을 ‘장미대선’이라 명명했다. “장미가 아니라 촛불대선이라 불러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장미’에서 ‘혁명’을 떠올렸다. 2003년 조지아의 대통령을 퇴진시킨 무혈 혁명인 ‘장미혁명’. 부정부패를 일삼은 대통령 및 일가에 대항하여 장미를 든 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변혁을 향한 주체성과 열망이 이룬 역사라는 공통점은 ‘장미대선’에 대한 기대를 배가한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이 아닌)’의 혹독한 시간을 보상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나 할까.

‘형돈이와 대준이’가 만든 노래 ‘장미대선’이 타이 달라 사인이 낸 투표 독려 앨범 <Campaign>보다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번 대선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보수보다 진보 진영 유권자들이 더욱 투표에 적극적일 것이다, 준비 기간이 짧기 때문에 자칫 네거티브 공방이 벌어질 우려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부터 수적으로 앞서는 여성 유권자들을 위한 관련 정책이 중요하다 등등. 특히 여심을 사로잡기 위한 후보들의 퍼포먼스는 눈물겹다(문재인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고, 안철수는 “30년 맞벌이 부부로 살면서 단 한 번도 ‘밥 줘’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유승민은 “나는 모태 페미니스트”라고 했다).

어쨌든 이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이번 대선의 투표율이 1987년 6월 항쟁의 영향으로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선을 능가할 것이며, 특히 20~30대 투표율이 지난 4·13 총선 때만큼 높을 거라는 기대다. 사실 투표율과 나머지 변수와의 인과 혹은 상관관계는 이미 수십 년째 전 세계 학자들이 매달리고 있는 테마다. 이를테면 투표율이 높은 나라는 사회 경제적 불평등 같은 문제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가 적극적이라 결과적으로 살기 좋다는 식의 논리는 꽤 일리 있다(투표율이 낮기로 유명한 미국을 보라). 반면 정치인들에게는 궁극의 난제 같은 거다. 어떤 세대의 투표율이 더 높은가의 문제가 어떤 후보가 더 유리한가의 결과로 직결되기에, 이들은 사생결단으로 투표율을 높이거나 낮추려 애쓴다. 하지만 혹시 그새 잊었을까 봐 얘기하는데, 단순히 높은 투표율이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다. 지난 18대 대선 때 기존 30~50%에 불과했던 20~30대 투표율이 70%까지 치솟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모르긴 해도 조만간 포털의 연예란은 연예인들의 투표 독려 영상과 소식으로 도배될 것이다. “투표 인증샷을 찍어주는 분에게 대본을 보내드리겠다”는 메시지를 1,000명의 배우들에게 보냈다는 김은숙 작가나 일일이 대학을 돌며 젊은이들의 선거 참여를 독려한 스칼렛 요한슨 같은 소셜테이너들의 활약이 만개할 것이다. 이 의미 있는 움직임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투표율만큼이나 투표를 대하는 인식과 태도도 중요하다. 간혹 혹자는 호주가 강제투표제도(Compulsory Voting System) 덕분에 투표율이 95%에 이른다고 주장하지만 합당한 이유 없이 투표에 불참할 때 이들이 내는 벌금은 고작 20호주달러. 그러니까 적어도 이 높은 투표율이 1만6,000원의 성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선배, 나는 정 아무개에게 한 표 던지기로 했어요. 국공립 어린이집이 부족한 우리 동네(상도동)에 어린이집을 새로 지어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지 뭐예요.” 몇 년 전, 총선을 앞두고 친한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 출근하던 길, 문득 정 아무개가 약속을 지켰는지 궁금해졌다. 후배는 한 군데 정도 더 생겼지만 실제로 좋아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물론 괜찮은 컨디션의 어린이집이 하나라도 더 생긴다는 건 언제나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후배는 임기 4년 동안 기껏 어린이집 하나 지어주고 생색 내는 의원을 뽑은 게 왠지 속은 것 같다고 했다. 게다가 예의 의원은 이미 정계를 은퇴해버렸기 때문에 복수도 힘들다.

요즘 뉴스에서 가장 자주 듣는 단어 중 하나가 ‘정치적 효능감’이다. 나의 선택이 정치적 의사를 잘 반영하는지, 정치가 실제 내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정도를 뜻하는 거라면, 후배의 ‘정치적 효능감’은 오히려 전보다 낮아진 셈이다. 보수정당의 지지는 정치적 효능감이 낮을수록, 야당의 지지는 정치적 효능감이 높을수록 강하다는 기사도 있다. 지금껏 20대 청년들이 다른 세대에 비해 투표율이 낮은 까닭도 (정치적 효능감의 반대인) 정치적 무력감으로 든다. 투표 행위가 주는 이득보다 투표하기 위한 대가가 더 크다는 계산이 투표를 막는다는 것. 그때 단골처럼 등장하는 문장이 있다. “나 하나 투표 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어?”

물론 나도 자주 하는 생각이긴 하지만, 한편 ‘정치적 효능감’이라는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정치적 효능감이란 누가 대통령이 되든 임기 5년 만에 짠 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어느 훌륭한 후보가 공약 한두 개 실천한다고 없던 효능감이 생기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전전(前前)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건 4대강 정책이 ‘실패’를 넘어 한국의 산천을 병들게 하는 ‘재앙’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어떤 일보다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기에, 정치적 효능감은 효율성으로 치자면 어떤 일보다 떨어진다.

20대의 투표를 독려한답시고 프랑스의 낮은 대학 등록금이 대학생들의 높은 투표율 덕분이라는 논리는 정치적 효능감을 잘못 활용한 대표적인 예다. 실제 프랑스 20대의 투표율은 전체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사례에 대한 이송희일 감독의 SNS 발언은 꽤 정확했다. “프랑스 대학의 무상교육이 정말로 대학생들이 100% 투표하여 만들어졌나? 1968년 5월 혁명이 만들어낸 거다. 지금의 프랑스 노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얘기다. 정치의 모든 걸 투표소로 환원하고 싶겠지만, 현실 정치는 단순 셈법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한국 대학 등록금이 이렇게 살인적으로 높은 이유 역시 대학생들의 투표율이 낮아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무방비적인 방치 때문이라는 것. 정치적 효능감은 정치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아마 ‘장미대선’을 앞두고 몇몇 청년들이 ‘장미혁명’을 불러온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청년들은 대선 후보들에게 가장 절박하게 요구하는 ‘최저임금 1만원 실현’을 촉구하기 위해 스스로 5월 1일 하루 일손을 놓고 장미를 들기로 했다. 다른 걸 떠나,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의 문제에 함몰되지 않고 투표의 의미와 정치적 효능감의 영토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장미혁명’은 의미 있다.

얼마 전 강준만 교수의 책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라는 책에서 발견한 문장은 꽤 전복적이었다. “청년의 정치 참여는 사명인가? 아니다. 재미여야 한다. 물론 투표도 재미다. 청년들의 투표율이 치솟자마자 당장 나타날 변화의 양상을 게임하듯 즐겨보자.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겼던 것들이 작은 참여로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는 재미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키는 재미를 만끽해보자. 한 방에 이루려는 한탕주의는 좌절과 환멸을 부르는 첩경이다. 천천히, 서서히,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씩 발을 떼보자. 우리가 엄청난 변화의 티핑 포인트 혹은 임계점의 순간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걸 확인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은가?”

정치 예능이나 팟캐스트 등 정치가 불가침의 영역이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학생은 공부나 해라” “정치, 문화보다 경제 발전이 더 중요하다”는 훈계를 주문처럼 듣고 살았다. 정치는 먹고살 걱정 없는 이들의 영역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을 기회도, 시간도 없었기에 객체로 살아야 했다. 사실 여전히 취업 준비생이 정치색을 밝히는 건 위험한 짓으로, 직장인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는 건 어리석은 짓으로 취급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연예인 험담하듯 정치인들 욕하는 것뿐일까?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은 다른 차원의 ‘정치 참여’를 ‘도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정치(Politics)의 어원은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

얼마 전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유시민은 “사람들 사이의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가 좋은 국가라 정의했다. 정의란 귀한 것, 가치 있는 것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누군가가 요즘 같은 시대를 주체로 살기 위한 세 가지를 꼽으라면 (가치를 판별하고자 하는) 책임감과 (이를 실천하는) 적극성 그리고 (출발점이자 지지대인) 신념이라 답할 것이다. 비단 투표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저렴한 대형 마트에 갈 것인가, 다소 비싼 농민 장터를 이용할 것인가의 문제일 수도, 내 아이에게 선행 학습을 시킬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일 수도 있다. 삶을 구성하는 가치의 순위는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극대화되고 상징화된다. 투표는 내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뜨는 첫 삽과도 같기에,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있어야 한다는 건 당연지사 아닌가? 게다가 플라톤의 예지적인 말을 떠올리면 5월 9일 투표를 해야 하는 이유는 더욱 명약관화해진다. “정치 참여 거부에 대한 형벌 중 하나는 자신보다 하등한 존재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