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io(r)evolution Lady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의 뉴 디올 레이디, 공효진과 함께한 타이베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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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파리 패션 위크가 막을 내리던 날, <보그> 팀은 배우 공효진과 함께 타이베이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쇼가 끝나면 곧바로 모든 룩이 올라오잖아요. 매일 확인해요.” 라운지에서 만난 그녀는 ‘보그 런웨이(Vogue Runway)’ 애플리케이션으로 지난 파리 쇼를 다시 보고 있었다. “전부 파란색이라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녀는 꽤 오랫동안 디올의 2017 F/W 컬렉션을 보며 감탄했다. ‘We Should All Be Feminists’ 레터링 티셔츠를 입고 그런 말을 하니 벌써 ‘뉴 디올’의 팬이 된 듯하다. 지난 시즌, 디올의 새로운 수장이 된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가히 혁명에 가까운 시도로 디올의 여성상을 새롭게 정의했다. 그녀가 디자인한 옷 위에는 ‘Dio(r)evolution’이란 슬로건이 적혀 있었다. 50년대 ‘뉴 룩’을 입고서 얌전 빼는 사교계 아가씨들 대신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2017년의 활동적인 현대 여성들을 위한 룩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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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효진은 계속해서 소감을 쏟아냈다. “저에게 디올은 런웨이 룩 그대로 입어야만 할 것 같은 다소 부담스러운 이미지였어요. 디자이너가 옷을 만들면 스타일리스트가 소재와 색상별로 스타일링해 쇼에 올리잖아요? 왠지 그 법칙을 깨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죠.”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키우리의 쇼는 달랐어요. 이 모델이 입은 상의와 저 모델이 입은 하의를 맞춰 입고 싶다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쇼였죠. 저는 틀을 깨는 믹스 매치를 매우 좋아하고, 꾸뛰르 드레스보단 웨어러블한 옷을 볼 때 훨씬 더 즐겁거든요.” 그녀는 이미 (컬렉션 모델이 입었던 착장과 다르게) 레터링 티셔츠 위에 하얀색 펜싱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키우리는 자신의 첫 디올 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두가 입는 똑같은 유니폼은 믿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니폼은 따로 있기 마련이거든요.” 공효진과 새로운 디올은 분명 통하는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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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재킷 위에 수놓은 꿀벌 자수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펜싱 재킷은 남성복 같기도 해요. 디올 옴므의 꿀벌 자수도 생각나고, 에디 슬리먼도 그립네요. 그 시절 디올 옴므를 몹시 좋아해서 남성복인데도 재킷과 셔츠를 자주 입었죠.” 혹시 해외 직구에 빠져 사는 건 아닐까? “온라인 쇼핑은 항상 실패했어요. 귀찮더라도 반드시 쇼룸을 찾아가서 옷을 입어보고 구입해요. 제 체형에 맞게 수선하는 건 물론이고요.” 비행 시간이 임박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미씽: 사라진 여자> 개봉 전에 팬미팅을 위해 출국했던 타이완인데, 벌써 1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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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타이베이 브리즈 센터에 위치한 디올 매장 오프닝 행사 참석을 위해 막 호텔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밖에 비행기 뜨는 것 좀 보세요!” 타오위안 공항에서 1시간 거리인 호텔 창밖으로 비행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전날 출국장을 빠져나오는 공효진을 보러 공항에 집결했던 팬들은 이미 호텔 문밖에 포진해 있었다. 현지 스태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한국 연예인 중 가장 인기가 많아요. 타이완에는 한국 드라마만 상영하는 케이블 채널이 여러 개 있는데, 한국에서 본방을 마치면 곧바로 방영을 시작하죠. <질투의 화신>의 인기는 대단했어요. 심지어 <파스타>는 아직도 방송중입니다. 공효진의 드라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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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효진은 1세대 패셔니스타로 입고 걸치는 것마다 여자들 사이에 유행을 불러일으켰고, 최근 출연한 TV 드라마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유일무이한 로코 퀸, ‘공블리’로 우뚝 섰다. 예쁘게만 보이고 싶어 하는 일부 여배우들에 비해 그녀의 뻔하지 않은 배역과 작품 선정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현실적이면서도 귀여운 양다리 로맨스를 보여준 드라마 <질투의 화신>, 엄지원과 함께 강렬한 여배우의 이미지를 어필한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까지. 어제 입었던 티셔츠의 문구처럼, 사회적인 화두를 던지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티셔츠의 메시지처럼 여성주의적인 의도를 담아 배역을 결정한 건 아니에요. 제가 늘 적극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대중 앞에 나서서 일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사실 전 누군가를 계몽하고 이끄는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에요. 차라리 순응하는 편에 가깝죠.” 그렇지만 20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깨달았다고 말했다. “여자가 일을 하려면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구분하고 싶진 않아요, 전 항상 ‘We are the world’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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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효진이 20여 년간 쌓아온 필모그래피에서 진한 정통 멜로 드라마의 비극적인 여배우 역할은 찾기 힘들다. “이 세상도 너무 어둡고, 모두가 매일 행복할 순 없는 일상을 살고 있는데, 드라마에서까지 울고 비통해하며 고단한 사랑 이야기를 전하는 건 피곤하게 느껴져요. 죽음과 음모, 배신과 병마 같은 연기는 배우 스스로도 힘듭니다. 몰입하면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주거든요.” 그렇지만 그녀는 역할보다는 마음을 움직이는 극본을 선택해왔다. “최근에 들어서야 사람들이 원하는 진한 정통 멜로 연기가 뭔지 알 것 같아요. 실제로 하려면 어렵고 힘들겠지만.” 한참을 망설이다 굳은 결심을 한 듯 말을 이었다. “이젠 제대로 도전하고 싶어요.” 그녀에게도 키우리의 디올처럼 새로운 진화가 시작될까? 가느다란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더니 소나기가 쏟아진다. 자수 스커트로 갈아입은 그녀가 말했다. “스커트를 촘촘히 메운 낙서 같은 자수에 끌렸어요. 소녀 같지만 은근히 속이 비치는 농염함도 있고.” 디올 드레스가 잔뜩 걸린 행어를 뒤적이며 디자이너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드레스 곳곳에 새겨 넣은 ‘하트’ 이야기를 꺼냈다. “전 리본보다 하트가 더 좋아요. 무조건 소유하고 싶잖아요. 여자라면 누구나 갖고 싶은 그런 것. 나도 모르게 끌리는 심벌, 그게 ‘사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