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Fearless Females – ②

2017.05.11

by VOGUE

    Fearless Females – ②

    21세기에도 여성의 삶 곳곳에는 사회 정치적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한다. 우리 여자들의 개인적 경험에 공감하고 두려움 없이 수면 위로 드러내며 여성의 존재를 찬양해온 이들이 바로 패션계의 여자 디자이너들이다.

    Victoria Beck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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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 <보그 코리아>와 패션 화보를 촬영한 빅토리아 베컴.

    빅토리아 베컴에게 무장해제 당하지 않기는 상당히 힘들다. 어쨌든 그녀는 8,000만 장의 음반을 판 팝 스타이자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은 초창기 때부터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스위트룸에서 개인적으로 손님들을 맞이하며 그들에게 각각의 옷을 설명한 인물이다. 중간에 신선한 꽃을 구하러 호텔 로비에 있는 꽃집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매혹적인 건 겸손함과 죽기 살기로 덤비는 단호함의 묘한 조합이다. 지금의 그녀가 있기까지 할복하고 싶을 정도로 무모했던 패션의 순간(“섹시함에 대한 저의 생각이 진화해왔다고 해두죠”라고 그녀는 금발로 탈색하고 PVC 의상으로 몸을 구속하던 시절에 대해 말한다)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무엇이 그녀가 진지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꿈꾸게 만들었을까?

    그녀는 패션계의 선입견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 “저는 걸 그룹 멤버였어요. 축구 선수의 아내였고요.” 하지만 지속적인 왕따의 대상이었던(그리고 교장으로부터 “풀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던) 연극학교 졸업생인 그녀는 작은 편견이 자신과 자신의 꿈 사이에 파고드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9년 후 호의적인 평가와 함께 그녀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 직원은 173명이며 이 중엔 처음부터 그녀와 함께한 멤버들도 있다. 지난가을 에스티 로더와 협업한 한정판 화장품 라인은 품절됐다(올해 말 또 다른 한정판 라인을 선보일 예정). 브랜드 타겟과의 협업 컬렉션(아동복을 포함한 두 개의 컬렉션), 더 많은 빅토리아 베컴 슈즈, 그리고 향수를 곧 선보일 예정이다. 네 아이(신예 패션 포토그래퍼인 브루클린(17세)부터 5세인 하퍼에 이르기까지)의 엄마인 그녀는 뜻밖에도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이 됐다. “여성들에게는 편안한 것이 힘을 준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말한다. 베컴의 미션은 패션의 흥분을 전달하면서도 맵시 있고 입기 편한 실루엣을 연출할 수 있도록 핵심적인 의상(특히 세퍼레이츠)을 디자인함으로써 여성들의 삶을 간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베컴은 세계 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정적인 사건들이 자신의 낙관주의에 도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해왔다. 베컴 부부는 지난여름 브렉시트 투표에 앞서 EU에 잔류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정치에 대해 고민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보다 자선 재단이나(그녀는 HIV에 감염된 여성들이 건강한 아이를 낳도록 돕고 있는 ‘Born Free Africa’에 참여하고 있다) 혹은 정치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 심지어 친밀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패션 같은 구체적인 활동에 집중하는 걸 선호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발적인 방식으로 옷을 입어서 기사화되곤 하죠.” 베컴은 말한다. 그녀는 가수였을 때 여성에 대한 특정한 고정관념을 따르라는 심한 압박을 느꼈음에도(혹은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딸은 같은 불안감을 경험하길 원치 않는다. “하퍼에게 늘 말합니다. ‘반에서 가장 예쁜 아이가 되는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반에서 뭘 하느냐지.’ 하지만 하퍼는 제 힐을 신고 싶어 하기도 해요. 그런 게 균형이죠.”

    – 글 / 리사 암스트롱(Lisa Armstrong)

    Simone Rocha

    런던 집에서 영화 촬영 감독인 남편 오언 맥로플린,  딸 발렌타인 밍 맥로플린과 함께한 시몬 로샤.

    런던 집에서 영화 촬영 감독인 남편 오언 맥로플린, 딸 발렌타인 밍 맥로플린과 함께한 시몬 로샤.

    “최근 들어 점점 더 화가 나요”라고 시몬 로샤는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는 여성 고객들이 주도하는 업계에서 일하고 있어요. 하지만 가끔 여성들이 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힘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래서 제 힘과 분노를 디자인에 담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여성스러워 보이는 의상을 만들고 최근 영국 패션 어워즈에서 올해의 여성복 디자이너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전통적인 사랑스러움을 약간 비틀면서도 변함없이 아름답게 해석한 의상을 선보이는 디자이너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약간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로샤는 자신의 독특한 감성이 약간 전복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살짝 도착적이에요. 약간 정상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지요.”

    2010년에 첫 컬렉션을 선보인 서른 살의 로샤는 말 그대로 부푼 소매로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2016년 가을 컬렉션에 대한 노트에 ‘엄마 역할’과 ‘부활’을 언급했다. 당시 그녀는 몇 달 전에 딸 발렌타인을 출산한 상태였다(그녀의 파트너는 촬영감독인 오언 맥로플린(Eoin McLoughlin)이다). 러플을 다루는 방식과 흐릿한 브로케이드에 대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로샤는 자신의 작품이 강인함과 단단함 또한 대변한다고 말한다. “제 옷이 섹시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엔 살짝 도발적인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드레스 등 부분이 시스루일 경우에도 너무 노골적이지 않죠.”

    그녀는 경건하게 트리오라고 언급한 미우치아 프라다, 레이 가와쿠보, 피비 파일로 같은 선배들과 사실주의(때론 마술적 사실주의)에 대한 이런 애정을 공유한다. 그들처럼 “제 작품 역시 아주 개인적인 동기에서 만듭니다. 저는 보호와 노출을 동시에 표현하고 싶어요. 세상은 너무나 작은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분열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 글 / 린 예거(Lynn Yaeger)

    Tory Burch

    자신의 집 거실에서 세 아들 소이어, 닉, 헨리와 토리 버치의 단란한 모습.

    자신의 집 거실에서 세 아들 소이어, 닉, 헨리와 토리 버치의 단란한 모습.

    토리 버치는 거리에서 주먹을 쥐고 팔을 치켜드는 시위자는 아니다. 오늘날 사회 정치적 상황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지적이고, 은밀하고, 보다 강력하다. “이걸 어떻게 우아하게 표현할 수 있죠?” 그녀의 말투는 가볍다. 그녀를 행동하게 만들어온 이슈인 성 평등에 대해 얘기할 때 그녀가 강하게 드러낸 힘과 명료함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동일한 기회와 동일한 임금은 호의가 아니에요. 당연히 주어지는 거죠. 우리는 인구의 50%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자료의 홍수 속에서 버치는 불평하거나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 대신 지난 3년간 자신의 자선 재단을 통해 미래의 여성 사업가들에게 2,500만 달러를 투자함으로써 그 문제를 겨냥해왔다. “중요한 건 영향력과 규모입니다.”

    버치 자신이 초보 디자이너 겸 CEO였던 2004년에 그녀의 계획은 사업 확장과 자선 활동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한 문장 안에 ‘사회적 책임’과 ‘비즈니스’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말한다. “그런 얘기는 저를 더 단호하게 만들 뿐이었죠.” 그 후로 고급 보헤미안풍의 세련미가 가미된, 20세기 중반의 미적 감각을 지닌 그녀의 패션 기업은 역동적인 글로벌 시장을 발굴해왔다. 그리고 그녀의 비전은 의욕적인 직원들이 모여들고 고객들의 공감을 얻음으로써 보답을 받아왔다. 이달 그녀의 재단이 펼치는 ‘Embrace Ambition(야망을 품어라)’ 온라인 캠페인은 소셜 네트워크의 팔로워들에게 실행에 옮길 것을 촉구한다. “여성들에겐 지금 당장 믿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해요. 우리는 힘을 모아야 합니다.”

    버치는 디자인에 미국인의 풍부한 방랑벽을 스며들게 하면서 작업의 다양한 면에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과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을 반영한다(밀라노의 가구 디자이너인 가브리엘라 크레스피(Gabriella Crespi)에게 바친 프리폴 컬렉션이 좋은 예다. 여기엔 고급스러운 인도 자수와 예쁜 코튼 보일 목판화 프린트가 포함돼 있다). 버치 자신의 야망과 관련해서 그녀의 사업 감각과 사회적 신념의 완벽한 조합은 공직 출마(토리당?)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절대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겠어요”라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변화의 힘을 믿으니까요.”

    – 글 / 제시카 커윈 젠킨스(Jessica Kerwin Jenkins)

    Maria Grazia Chiuri

    데뷔 컬렉션인 2017 S/S 컬렉션을 마지막 점검 중인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

    데뷔 컬렉션인 2017 S/S 컬렉션을 마지막 점검 중인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

    디올 최초의 여성 아티스틱 디렉터는 페미니스트로 태어나고 길러졌다. 부모님이 몸소 아주 이례적인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걸 나중에야 깨달았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철저한 페미니스트셨어요. 제게 남편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죠. 대신 늘 ‘공부하고, 일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말한다. 1970년대 후반 로마를 휘젓고 다니던 10대 시절의 키우리는 성 역할에 방해받지 않은, 평범한 이탈리아 가족의 낙천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뛰어난 아이였다. “이태리 남부 출신인 아버지는 설거지를 하고, 집안일을 분담하셨어요. 그건 정말 드문 일이었습니다. 두 분은 오빠와 저를 절대 차별하지 않으셨어요”라고 그녀는 기억한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정상적인 거라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지금은 51세인 키우리가 패션 리더로서, 보스로서, 엄마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디올에서 자신의 전례를 구축할 수 있는 좋은 시기다. 그녀는 지난 31년간 펜디와 발렌티노에서 액세서리를 디자인하며 무대 뒤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지금 같은 오뜨 꾸뛰르를 연마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될 수 있었다. 방대한 규모의 브랜드인 디올의 통솔권을 넘겨받은 그녀는 “제 자신을 테스트할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는 그녀의 생각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것 같다. “딸아이(라헬, Rachele)가 15세인가 16세가 되었을 때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여성들이 약간 자신감을 잃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위기가 좀더 전통적인 쪽으로 돌아갔어요. 제가 라헬과 제 아들에게 원하는 건 그들이 자유롭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는 화가 나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화가 난 게 아니에요.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이 거침없고, 재주 많고, 인정 많은 프로에게 우리는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디올이라는 글자가 프린트된 심플한 리본 테이프가 나비 모양으로 장식된 그녀의 멋진 키튼 힐 슬링백 같은 슈즈 천재의 뛰어난 솜씨? 물론이다. 그뿐 아니라 내부에서의 어머니 같은 경영일 수도 있다. “제 스튜디오엔 젊은 친구들이 많아요. 저는 그들이 자신의 일에 자신감을 갖고 균형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몸담은 이 세계는 때로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 글 / 사라 무어(Sarah Mower)

      포토그래퍼
      HYEA W. KANG, MARIO TESTINO, THEO WENNER, SOPHIE CA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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