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없는 밤

엄마와 딸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는 ‘모녀 신화’. 이를 콘텐츠로 한 출판, TV 프로그램, 연극, 영화는 계속 만들어지고 소비된다. 하지만 나는 왜 울지 않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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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탁환이 엄마와 고향 진해를 봄, 여름, 가을, 겨울 걸으며 쓴 에세이집 <엄마의 골목>을 출간했다. 친구는 책을 읽으며 울었다고 했다. 날도 좋으니 모녀가 걷고 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엔 몇 번 거절하였다. “제가 가족 알레르기가 있어요.” 미루고 미루다 기사 배당을 받은 지 3주 뒤에야 엄마가 있는 시골집에 내려갔다. 전날 해방촌에서 밤새 술을 먹고 좀비가 되어 고속버스에 올랐다. 창문으로 재개발 중인 시골 풍경이 이어졌다. 고향 터미널은 도청 이주를 기념해 지은 아파트가 분양되지 않아 을씨년스러웠고, 농사를 짓지 못한 황무지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곳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서 주최하는 ‘인터뷰 강의’를 수강한 적 있다. 각자 자기소개 겸 인터뷰 기술을 배우는 이유를 말했다. 30대 페미니스트가 “엄마를 인터뷰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저를 이해하려면 엄마부터 알아야 할 거 같아요. 근데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보그>에서 만난 소설가 최은영은 언젠가 엄마에 대해 쓰고 싶다고 했다. “이런 ‘헬조선’에서 어떻게 살아냈을지 궁금해요.” 김탁환도 “오래전부터 엄마에 대해 쓰고 싶었기에” 엄마와 고향을 걷기 시작했다. 다들 엄마, 엄마 한다.

엄마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 건 한 번이다. 회사를 그만둘 정도의 개인사가 있었는데, 그때 엄마가 서울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스무 살에 서울로 상경한 뒤 가족의 방문은 처음이었다. 12년 만인가. 우리 집은 좋게 말하면 시크하다. 군대 간 동생 면회는 한 번도 가지 않았고, 동생도 섭섭해하지 않았다. 엄마가 입원했을 때, 내가 입원했을 때 서로 병실은 하루만 지켰다. 그런 우리가 방에 누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일 할 일이나 저녁 메뉴 같은 전화로 해도 될 얘기들. 그러다 엄마가 내 나이 때 어땠는지 말했다. 가족 외의 주제는 처음이었다. 내용은 엄마의 인생이니 밝힐 수 없다. 그렇다고 대단한 일은 아니어서 왜 그 얘기를 꺼내는지 당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여자의 일생에 일어날 법한 일들, 선택에 따라 주어진 결과들, 받아들이다 보니 세월이라는 뜻이었던 거 같다. 그날 밤 이후로 다시 그런 얘기는 없었다.

엄마는 예순이 되었다. 엄마와 새삼 어디를 걸을지 몰랐다. 얘깃거리는 그때 서울 방에서나 지금이나 딱히 없다. 엄마는 시집가란 소리도 하지 않는다. 나 역시 “엄마 같이 걷자”라고 말할 딸도 아니다. 다행히 야밤에 운동하러 나가는 나를 엄마가 따라나섰다. 엄마의 유일한 잔소리는 “살 좀 빼라”니까. 그러고 보니 운동이란 목적에서만 둘이 자주 걸었던 거 같다.

집 뒤의 폐업한 농협은 청소년센터가 되어 있었다. 책과 농구대를 들였다. “내가 자랄 때도 저런 게 있었음 좋았을 텐데.” 도서관 책을 빌리려고 1시간 동안 버스(하루 10대 운행)를 타던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엄마는 “운동하기 좋은 마당이네”라고 딴소리를 했다. TV에서 본 걷기 운동법도 설명했다. 계단을 운동 되게 올라가는 방법, 팔은 바람을 가르듯이 휘휘 저어야 한다는 정보들. 김탁환의 에세이처럼 “(내) 하모니카의 구멍 하나하나가 내가 다닌 진해의 골목 하나하나와 비슷한 것 같아”라는 멋진 말은 나오지 않았다. 진해처럼 벚꽃도 피지 않았다. 동사무소에서 가성비 때문에 심은 사철 푸른 나무와 마을에 도시가스가 들어오면서 헤집어놓은 콘크리트가 있었다. 말은 점차 줄었다. 이런 딸을 낳아서 엄마도 꽤 섭섭하겠지.

4년 전에 태원준이라는 여행작가를 인터뷰했다. 엄마와 함께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와 책을 낸 터였다. “엄마는 살면서 처음으로 내일이 궁금해져”라고 하셨다는 말에 울컥했다. 그는 엄마와 세 번 여행을 더 떠났다. 그때 나도 엄마와의 여행을 계획했다. 당시만해도 엄마는 부르면 아픈 이름이었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란 연극을 보다 너무 울어서 무대에 선 박정자 배우가 눈길을 줄 정도였다. ‘나도 꼭 나를 이해해줄 딸을 낳아야지.’ 하지만 이젠 가족을 소재로 한 무엇도 보기 싫다. 지겹고 고루하고 짜증까지 난다. 나는 왜 변했을까.

나는 소개팅도 잘 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 상대를 클라이언트처럼 대한다. 최소한으로 예의를 지키고, 최대한으로 웃어 보일 사람. 이 사람에게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 헷갈린다. 언젠가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적당한 말을 골라 카톡을 남겼다. 나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지금은 대상화 사회다.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 직장 내에서 인간은 ‘업무를 행하는 대상’이다. 서로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 일 처리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포스트잇 떨어지듯 깔끔한 관계. 젊은 날에 일희일비하던 인간관계의 어려움도 이젠 화르르 불타올랐다가도 금세 가라앉는다. 조금의 감정 소모도 아깝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상화는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기쁨, 희열, 위로 같은 감정을 삭제한다.

이는 내게 가장 어려운 가족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감정은 거세되고 가족이라는 ‘대상’만 남는다. 환갑 기념으로 유럽 여행을 보내드리면 되고, 명절에 내려가면 된다. 최소한의 도리를 행한다. 서로 어두운 마음의 방은 열지 않는다. 엄마를 서울 자취방으로 올라오게 만든 사건 이후로, 더 심해진 듯하다.

엄마가 이 글을 읽으면 슬플 거 같다. “너도 신문사 입사 시험을 치지 그러니”라는 가족이 <보그>를 읽을 리 없지만 말이다. 분명 나는 엄마를 가장 존경한다. 엄마만큼 살아낼 자신이 없을 만큼 존경한다. 내가 괴물이 그만 되어 함께 벚꽃처럼 예쁜 길을 걷고 싶다. 엄마는 순서가 바뀌어도 괜찮을 거라고 하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