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The Sensitive

2017.05.26

by VOGUE

    The Sensitive

    까다롭거나 피곤하거나 껄끄럽거나, 그리하여 ‘이상한 사람들’이라 규정되어온 민감한 인간들을 옹호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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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 장 인 A의 전(前) 상사는 좋은 사람이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그는 A를 늘 ‘소심하고 예민한 사람’ 취급했다. 공식 행사 중에도 번번이 화장실에 숨어 있던 A를 책망했고, 말 한마디에 얼굴색이 변해버리는 A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고 핀잔을 줬다. A는 직장생활 내내 왜 상사와 더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는지 고민해야 했고, 그 오랜 고민은 그와 헤어진 지 1년이 훌쩍 넘어서야 나름의 답으로 이어졌다. 바로 민감한 사람과 민감하지 않은(혹은 덜 민감한) 사람의 간극 혹은 예민한 A가 스스로 대범한 척하면서 생기는 문제 때문이었다는 것.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상사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라. 민감한 인간들이 포진해 있을 것이다. 종종 발소리가 거칠어지는 상사, 동료들과 점심 먹길 거부하는 후배,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피곤하다고 자리를 뜨는 동기, 나 혹은 당신. 그들은 이렇게 정의된다. 예민한, 까다로운, 날카로운, 불편한, 불안한, 냉담한, 신경질적인, 지나치게 감상적인, 폐쇄적인, 은둔자, 외톨이, 좀생이, 샌님, 비사교적, 분위기 망치는, 숫기 없음 등등. 그리고 대부분은 어릴 때 울보, 겁쟁이, 다루기 어려운, 지나치게 내향적인 아이로 분류되곤 했다.

    민감성이 외향성, 내향성 같은 온전한 기질로 인정받은 지는 불과 얼마 전 일이다. 내로라하는 심리학자들도 민감성을 내향성과 동일시하거나 신경증 같은 병적 증세로 해석했다. 하버드대의 심리학자 제롬 케이건이 평생을 민감성 연구에 바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에게 민감하다는 사실은 머리카락이나 눈의 색, 코의 모양이 서로 다른 것만큼이나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후배 여성학자이자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The Highly Sensitive Person)>을 쓴 일레인 아론은 민감한 사람의 70% 정도가 내향적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몇 사람과 가깝게 지내기를 좋아하고 파티를 피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까 민감성과 내향성은 같은 범주로 묶일 수 없는 아예 다른 이야기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매우 민감한 인간이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테면 아무도 손대지 못한 난제 중 하나인 ‘푸앵카레의 추측’을 단숨에 풀어버리고도 필즈상(수학계의 노벨상)을 거부한 러시아 수학자 그레고리 페렐만도, 손님이 오면 뒷문으로 도망치곤 했지만 덕분에 ‘첼로 소나타 제1번 e단조 Op.38’을 쓴 브람스도, 심지어 스스로를 “오래된 집에 사는 외로운 노인”으로 묘사했다는 버락 오바마조차도 자신을 내향적인 사람이라 인정했다지만, 과연 민감하다고 시인할 수 있을까? 내향성과 달리 민감성은 미덕은커녕 편견으로 점철된 부정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 <센서티브>를 쓴 일자 샌드 같은 학자의 말은 더욱 혁명적으로 읽힌다. “민감함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민감성을 긍정적으로 시인한 최초의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콤플렉스의 의미를 활성화한 그 사람 맞다)이 후대의 학자들을 이끈 선구자다. “극도의 민감성은 인격을 풍요롭게 만든다. 비정상적이고 어려운 상황에서만 이러한 장점이 심각한 단점으로 바뀐다. 민감한 사람들의 침착하고 신중한 성향이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혼란을 겪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감성을 본질적으로 병적인 성격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그렇다면 인류의 4분의 1을 그렇게 규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융은 스승인 프로이트와 결국 결별했는데, 융은 근본적인 성격 차이가 타고난 민감성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예의 25%에 포함되는지, 아니면 나머지 75%에 속하는지 궁금한가? 민감성 연구에 활용되는 체크리스트는 이렇다. ‘나는 음악이나 예술에 감동을 느낀다, 미래를 예측하고, 여러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고통의 임계점이 낮다, 쉬워 보이는 일이 내게는 힘들 때가 많다,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갈등이 일어날 때 숨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갑작스러운 일이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경쟁을 해야 하거나 누가 지켜보고 있으면 평소보다 훨씬 못한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짜증이 난다, 큰 소리에 불편해진다, 사물에 대해 생각하는 데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남들의 감정을 쉽게 알아차린다, 쉽게 죄책감을 느낀다’ 등등.

    심리학적으로 ‘민감하다’란 ‘인풋’이 많다는 의미다. 남들이 보지 않는 것까지 보고, 느끼지 않는 것까지 느끼기에 물리적, 감정적으로 과한 자극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들과 걸러낼 수 없는 인풋 때문에 더욱 예민해진다는 것이다. 이 점에 착안한 일부 임상학자들은 실제 민감한 이들의 체액을 조사했고, 신경전달물질인 노르에피네프린 수치가 높게 나타난다는 점을 알아냈다. 민감한 사람들의 뇌가 특히 집중력과 지각 처리 과정과 관련된 부분에서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것도 발견했다. 민감한 이들의 체액은 스트레스의 유무와 상관없이 코르티솔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다는 결과도 있다. 민감한 이들이 항상 날카롭고, 자기방어적인 건 호르몬의 수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매우 민감한 사람들이 다른 점은 주로 자극을 처리하는 과정에 있으며, 그래서 불편을 느끼는 긴장 수준에 빨리 도달한다는 사실은 이들을 이해하는(그럴 마음이 있다면) 첫 번째 단계다.

    “민감함은 다른 이들이 모르는 것을 포착하고 미세한 부분까지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일레인 아론의 말은 A의 직업인 에디터에게는 맞춤이었다. 이를테면 인터뷰란 인터뷰이가 말끝을 올리는지, 내리는지, 흐리는지까지 포착하고 미세한 공기를 전하는 행위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이나 세상을 향한 직관적인 통찰력은 에디터의 제1의 덕목이다. 그가 보는 것의 미묘한 차이까지 느낀다는 점에서 내면적으로는 엄청나게 적극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에서는 달랐다. 거절이 두려웠고 두려움이 내심 부끄러웠으며 이는 소심함으로 비쳤다. 왜 아니었겠나? 민감함은 결코 우리 사회의 이상형이 아니다. 세상을 고통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생후 6개월 차 때부터 516개월차인 지금까지, A는 알게 모르게 수없이 거절당해왔다. 예민하게 굴면 못써, 타인을 피곤하게 하지 마라… 민감한 사람들 중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게다가 여긴 공동체적 가치, 생산력, 효율성, 적극성 등을 동력으로 전력 질주한 대한민국 아닌가? 그 과정에서 다름의 미덕은 증발했다. A는 지금도 이 말이 가장 듣기 싫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

    물론 카를 융에게는 어림없는 소리다. 그는 세상을 바꾼 건 대범함이 아니라 민감함이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그들은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삶 자체가 또 다른 가능성, 우리 운명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내면 세계를 보여준다”고도 말했다(융이 징그럽게 민감한 인간이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민감성 옹호론자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까칠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중요한 걸 먼저 발견해냅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창의력과 통찰력 그리고 열정과 동정심을 보여준 많은 사람들은 민감한 이들이었다.” 이 말은 이렇게 들린다. “당신(우리)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민감할 뿐이죠. 수줍고 서투르다고 다그치지 마세요. 섬세하게, 깊이 반응하는 중입니다. 스스로를 인정하세요.” 자칫 민감한 인간들이 우월하다는 일종의 ‘엘리트론’으로 비칠 공산이 큰 이런 주장이 결국은 남들이 기대하는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들을 위한 위로와 격려라는 걸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니 제발 “파티가 이제 시작인데 벌써 가려고?” 같은 말도, “너도 쿨하게 변해야 해”라는 식의 자기 계발서도 접어두자.

    “인생이란 각자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특별한 물음에 답해야 하는 개성화(개인 내부의 고유성 실현) 과정이다.” 이 명언을 기억하자면, 나와 타인의 민감함을 인정한다는 건 결국 하나의 질문을 겨냥한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비록 전 세대는 실패했다 해도(그래서 민감한 인간들을 문제아 취급했다 해도) 우린 우리 세대의 방식으로 이 질문에 계속 답해야 한다. 이 ‘톨레랑스’의 정신이 비단 성격 타령 따위에나 적용되지 않는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을 테니 말이다.

      에디터
      윤혜정
      일러스트레이터
      KWON CHUL 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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