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 가이드북

가이드북 불신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이 여행 스케줄을 짜는 시대. 요즘 가이드북의 쓸모.

도시별 시티 가이드북은 루이 비통(Louis Vuitton), 미니 마우스가 사랑스러운 핑크색 자유의 여신상과 실버 에펠탑은 메르시 구스타브(Merci Gustave).

도시별 시티 가이드북은 루이 비통(Louis Vuitton), 미니 마우스가 사랑스러운 핑크색 자유의 여신상과 실버 에펠탑은 메르시 구스타브(Merci Gustave).

종이 책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상황을 감안하고 들어주길 바란다. 나에게 여행의 시작은 가이드북 구입이다. 2박 3일 일정의 짧은 해외 출장이 잡혀도 가이드북부터 산다. 평소 세계사에 관심을 두는 일이 극히 드물지만 가이드북을 사면 그 나라의 모든 걸 정복하겠다는 심정이 되어 역사, 화폐, 매너, 상황별 회화 따위를 비장하게 읽어 내려가곤 한다. 입국 심사대에서 ‘국가 번호는?’ ‘연간 평균 기온은?’ 같은 질문을 받으면 거뜬히 통과할 것이다. 취미 생활을 시작할 때 장비부터 갖추는 마음과 비슷한 것 같다. 가이드북을 쥐는 순간부터 이미 여행지에 도착한 듯 찾아오는 낯선 설렘이 좋다. 대사관, 영사관 번호랄지 ‘설사약 주세요’ 같은 현지어 문장이 돌발 상황에서 나를 보호해줄 거란 믿음도 있다. 가이드북의 유용성은 여행이 끝난 후에도 유지된다. 시간이 지나 가이드북을 다시 펼쳐 보면, 고생스럽게 찾아갔던 장소가 거친 흔적과 함께 남아 있다. 일기를 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보존되는 기록이다. 하지만 가이드북의 진짜 존재 목적인 ‘여행 정보 전달’로 넘어오면, “진보한 여행 정보는 박수를 받지만 진부한 여행 정보는 외면 받는다”는 철 지난 유행어가 떠오른다.

뱅상 누아유는 <여행 가이드북 거꾸로 읽기>에서 고백한다. 여행 가이드북을 쓴다는 건 자보지도 않은 호텔과 먹어보지도 않은 식당을 품평하는 일이라고. 이해하지도 못한 세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순진한 무지렁이가 어떤 여행지의 준전문가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직업이 일으키는 기적이라고 말이다. 과거 ‘100배 즐기기’를 통해 ‘100배 헤매기’를 경험하고, ‘이지 유럽’을 통해 ‘하드 유럽’을 체험한 내 주변 지인들은 구글맵이 등장한 이래 아무도 가이드북을 구입하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가보고 싶은 곳, 맛집 등을 찾고 구글맵에 콕콕 찍어 저장한 뒤 여행의 동선을 짠다. 가이드북을 보며 다니는 여행은 마치 투어 가이드 깃발을 보고 따라가는 레벨, 즉 하수의 여행으로 여긴다.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장소는 현지인은 관심도 없는 과대평가된 곳의 집합이다. 게다가 강산은 변해 인공지능이 나의 취향을 파악해 여행 동선까지 짜주는 세상이다. 지금 스마트폰 안에서 닿지 못할 여행 정보는 없다.

출판사와 여행작가의 시름이 깊은 건 당연하다. 여행작가 우지경은 말한다. “요즘 여행 정보는 어디서든 얻을 수 있어요. 한데, 지구 어디든 우리나라 블로그에 소개된 맛집에는 한국인들이 몰려요. 어렵게 찾아간 지구 반대편 식당에 한국인들만 바글바글하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그래서 덜 알려진 곳을 발굴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요. 로컬이 추천한 곳을 직접 가보고 괜찮다 싶을 때 추천하는 식으로요.” 포르투갈 가이드북이라면 누가 써도 리스본에서 꼭 봐야 할 명소는 거의 같지만 명소 옆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여행의 만족도가 갈린다는 것. 여행 기사를 쓰는 입장도 다르지 않다. <더 트래블러> 여하연 편집장은 결국 차별화된 정보에 달렸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이 그 도시에 갈까 생각하고 거기에 맞는 정보를 만들어요.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이 포틀랜드에 가보고 싶어 하진 않을 거예요. 커피, 맥주, 음악을 좋아하고 남들과 다른 것, 즉 힙스터 문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정보를 취재해서 기사를 만들어요.”

편리함과 영리함으로 중무장한 여행 도우미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가이드북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더 잘하는 가이드북이다. ‘그 도시의 즐길거리를 아는 감각 있는 전문가‘가 ‘엄선한 장소’를 그들의 시각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가령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동료 에디터들의 인스타그램을 훑어보며 여행 계획을 짠다. 잡지 에디터는 트렌디한 공간을 찾아내는 ‘촉’이 맹수가 피 냄새를 맡는 감각만큼 발달했으니 그들이 만족했다면 대체로 나도 만족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60명의 예술가가 소개하는 60개의 공간’이라는 컨셉을 내세운 <여행, 디자이너처럼> 시리즈 같은 책은 인스타그램을 찾는 수고를 덜어줬다. 리스트가 믿음직스러울 뿐 아니라 ‘아티스트, 디자이너,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 모두가 모이는 서점’ , ‘땅거미가 지고 석양이 물에 깊이 드리워졌을 때 부드러운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수상 술집’ 같은 소개 글은 진짜 그 도시의 삶을 느끼게 해줬다. 디자이너 두 명이 도쿄에 한 달간 머물며 찾아낸 공간 87곳을 소개한 <도쿄 숍>도 마찬가지. 공간이 담고 있는 스토리, 중점적으로 봐야 할 포인트 등 디자이너 입장에서 적어 내려간 소개 글을 읽고 상점을 방문하면 정말 아는 만큼 ‘더’ 보인다. 여행작가 우지경은 자기도 참고하는 가이드북으로 테마가 있는 여행책을 들었다. “<벨기에에 마시러 가자>라는 책을 봤는데 ‘맥덕’의 취향을 제대로 간파하고 있더라고요. 실제로 벨기에의 양조장과 펍을 돌아다니며 마셔본 저자의 이야기가 정말 생생했죠.”

여행에 누구의 앵글을 참고할 것인가가 중요해지면서 잡지와 가이드북 경계에 있는 가이드북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 <모노클> 시티 가이드, <시리얼> 시티 가이드가 시작이었다. 2호까지 나온 <어반 리브>에는 태국 지도도 있지만 현지인과 여행자가 말하는 방콕도 실려 있다. 반드시 구매해야 할 물건, 지금 가장 핫한 레스토랑과 같은 구미 당기는 정보와 도시에 관한 에세이,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인터뷰 등이 어우러져 있다. “요즘 방콕 여성들은 솜탐을 많이 먹는다. 샐러드라 먹어도 살이 안 찌기 때문이다” “도시의 면면이 천차만별이라 조깅하는 재미가 있는 곳” 같은 문장은 블로그를 20개씩 뒤져도 찾지 못할 문장이다. 도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방콕에 대한 이미지를 새로 덧입힌다. 아니면 안그라픽스에서 내놓은 <여행 능력자를 위한 거의 모든 상식> 같은 책은 어떤가. ‘동물의 똥 구분하는 법’이랄지 ‘가라앉는 자동차에서 탈출하는 법’ 등 서바이벌 노하우 모음집에 가까운 콘텐츠는 소장욕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정보를 책임지겠다는 의무감을 내려놓은 가이드북에는 유명 관광지 너머의 이야기가 담기고 있다.

여행책 전문 서점 ‘사이에’ 조미숙 대표는 가이드북을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곳에 가진 않는다고 말한다. “쿠바 책을 사는 손님에게 ‘쿠바 가세요?’ 물으면 ‘가고 싶어서요’라는 대답도 돌아와요. 저는 손님들에게 여행 가고 싶어지는 책을 권하곤 해요.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노인과 바다> 같은 책을요.” ‘사이에’에서는 한 달에 한 도시씩을 정해 그 도시가 등장하는 책을 진열한다. 여행에 관한 이야깃거리를 남기는 것, 여행 가이드북과 여행 에세이 모두에 부여된 의무다.

가이드북, 인터넷 등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만 골라 자신의 여행만을 위한 ‘셀프 가이드북’을 손수 만드는 여행자의 등장은 이상적인 가이드북에 대한 여전한 목마름의 증거 같다. 나 역시 바란다. 당장 비행기 표를 끊게 만드는 힘을 가진 사진 한 장, 기본기에 충실한 도시 개론, 관광지의 정수만 모아놓은 리스트, 지금 그 도시에서 가장 ‘힙’한 장소(수시로 업데이트되어야 한다)까지 담겨 있는 가이드북 어디 없을까. 플렉시블 디스플레이가 상용화되어 어깨를 짓누르는 종이 책의 무게와 눈을 침침하게 만드는 스마트폰의 화면에서 벗어나면 가능해지지 않을까. ‘100배’는 ‘이지’한 가이드북의 등장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