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독자 염탐기

독자의 인스타그램에 찾아 들어가 하트를 누르는 소설가를 상상이나 해본 적 있나. 수 세기에 걸쳐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의 글을 쓴다’는 이미지를 형성한 소설가들은 이미지 뒤에 숨어 독자들을 염탐하며 나아갈 에너지를 얻는다.

CCTV를 설치해서라도 알고 싶은 독자의 마음! 트위드 재킷과 러플 장식 블라우스, 와이드 팬츠는 구찌(Gucci), 캐츠아이 안경은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

CCTV를 설치해서라도 알고 싶은 독자의 마음! 트위드 재킷과 러플 장식 블라우스, 와이드 팬츠는 구찌(Gucci), 캐츠아이 안경은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

작가들도 독자를 궁금해한다. 자기 책의 리뷰를 찾아 읽을 뿐 아니라, 그 리뷰를 쓴 사람들을 알고 싶어 한다. 물론 아예 찾아보지 않는 초연한 이들도 많겠지만, ‘#북스타그램’이 등장한 이후로 작가들 사이에서 그 이야기가 부쩍 자주 오간다. 이런 식이다.

“어떤 사람이 내 소설 속 인물들이 다 조금 비틀린 성격이라 그러더라고.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아. 역시 내가 비틀린 성격이라서 그런 인물들만 쓰는 걸까?”

“책 자주 읽어주는 분이랑 인스타그램 친구가 되었는데 옷을 너무 잘 입으셔.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너무 없어 보일까 봐 못 물어보겠어. 아래에 구입처 좀 달아주시면 좋겠네. 여행도 얼마나 멋지게 다니시는지 몰라. 친해지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하트만 눌러.” “한국 소설 리뷰 자주 올리는 그 대학생 너무 귀엽지? 편집자로 취직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요즘 신입 자리가 없어서 어떡해. 어디 자리 나면 연결해주려고 매같이 노리고 있어.” 생각해보면 리뷰를 찾아보는 것 자체는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생산자니까 피드백을 참고할 때 더 나은 다음 버전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업계의 생산자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제과 제빵에 종사하는 이들도, 수제화 제작에 종사하는 이들도 리뷰를 찾아보고 나아갈 가닥을 잡을 것이다. 다음번엔 더 달게, 다음번엔 더 푹신하게… 문학이 뭐 별거라고 다르겠나.

피드백을 받는 차원을 넘어서면, 그 영역은 역시 외로움의 영역일 듯하다.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새 책은 매일 쏟아져 나오고, 문학은 인기 없는 오락의 한 종류로 전락한 데다, 특히 한국 문학은 몇 년간 심한 조롱에 시달려야 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 조롱은 마땅했고, 국내 여타 분야와 마찬가지로 젊은 세대는 개혁을 하고 싶어 하는데 권력이 없고, 분노와 무력감에 잠겨 이 보수적인 고인 물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좌절하고 있을 때… 그럴 때 누가 내가 쓴 글을 마치 자신이 쓴 것처럼 정확하게 이해해주고 지지해준다면, 운명적인 친구를 만난 것처럼 우정을 느끼고 힘을 얻는 것이다. 계속해나갈 수 있는 힘은 독자에게서 온다. SNS의 발달로 다른 단계를 거치지 않고 독자를 바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이 시대 작가들에게 무척이나 행운이다.

물론 악평도 만난다. 초기에는 그런 악평에 상처도 받았다. 하지만 작가들이야말로 가장 투철한 독자이기도 해서, 사람들 대부분이 좋아하지만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작가를 떠올리면서 금세 잊는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라 한 사람에게 최고인 책도 다른 사람에겐 최악일 수 있다는 걸 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악평에 아무렇지도 않아진다. 가끔 위험한 악평만 조심하는 편이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가 아니라 심한 욕설과 함께 ‘이딴 걸 쓰다니 죽어버려라’인 경우, 블록 기능으로 차단한다. 드물긴 하지만 작가들도 종종 해코지나 스토킹의 피해자가 되기 때문에 싹을 자르는 의미에서다. 악의를 품은 상대에게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계정을 보이지 않게 하는 건데, 그러면 또 ‘작가씩이나 되어서 나를 차단했다’며 더 앙심을 품기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서워 보이는 사람은 차단하는 게 좋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보호할 자유는 있다.

가장 기분이 미묘할 때는 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이 울고 있을 때다. 물론 대개의 작가들은 사람들이 읽으며 우는 부분을 쓰면서 운다. 최근에 쓴 책인 <피프티 피플>엔 처음 쓰면서 울고, 고치면서 두 번 더 운 부분이 있는데 리뷰를 보니 독자분들도 다 그 장면에서 울고 계셨다. 쓰는 사람이 아픈 장면은 읽는 사람도 아프다. 귀신같이 겹친다. 아, 여기서 다들 우시겠네, 알면서도 그대로 쓰는 것이다.

예측했고 각오했는데도 울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이상하다. 게다가 ‘조금 울었다’ 정도면 괜찮지만 ‘2시간 통곡했다’ 같은 말엔 아연해지고 만다. 내가 울렸나? 가학적으로 울린 건가? 현실에도 울 일이 그렇게 많은데 굳이 픽션으로 울렸어야 했나? 작품의 감동인 척 잔인하게 군 게 아닐까? 나는 지옥에 갈까? 지옥에 가면 눈물 저울 같은 것이 이야기 창작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게 아닐까? 히익, 지금까지 눈금을 몇 개쯤 채운 걸까? 아직은 밑바닥에 찰랑찰랑할 텐데 그냥 여기서 멈추는 게 낫지 않을까? 문득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2주쯤 오열한 후에 한강 작가님을 만나던 날이 기억났다. 너무나 좋은 책이었고 작가님을 원망한 건 아니다. 하지만 작가님의 얼굴을 보며 ‘으아, 이 사람이 나를 그렇게 울렸어’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서로를 돌아가며 울리면서 나아가는 세계에 얼떨결에 속하게 되어버렸다는 자각이 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깊은 상처를 건드릴 때도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즐거운 소설인데 한 챕터에서 형제자매를 잃은 분들이 힘들어하셨다. 출간 행사에서 눈물 고인 눈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털어놓는 분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엎드려 사죄하고 싶어진다. 이깟 이야기 쓴다고 당신의 상처를 건드려서 미안하다고, 닮은 이야기를 제멋대로 써버렸다고, 잘못했다고. 하지만 ‘치유를 얻었다’고 마주 앉은 이가 말하면 기묘한 죄책감 따위 밀봉해서 다시 삼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도치 않게 제대로 한 거겠지, 당신이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 하고.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쓰는 이와 읽는 이는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가족, 친척, 친구보다도 더, 매일 만나는 사람들보다도 더. 양방향으로 서로를 궁금해한다. 눈물로 이어져 있다. 기이한 방식으로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다. 투명한 친밀감의 그물로 엮여서 남은 생을 함께하고 싶다. 그러니 혹 좋아하는 작가가 계속 찾아와 하트를 눌러도 부담스러워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