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식 ‘이상한’ 장르

봉준호를 만났다. 시대정신을 장착한 탁월한 이 이야기꾼은 <옥자>가 ‘동물과 소녀의 아름다운 사랑과 모험 이야기’일 리 없다는 의혹을 스스로 증명했고, 또 한 편의 ‘봉준호표 장르’ 영화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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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의 눈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흘만 있으면 메인 예고편이 나오는데, 아쉽군요. 오늘 기자 간담회에 오신 분들께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걸 보면 막 뛰어 다니고, 구르는 옥자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최근까지도 후반 작업을 계속했어요. 마지막으로 손을 턴 게 며칠 안 돼요. 칸과 프랑스에서 넷플릭스 관련 논란이 있었을 때도 저는 계속 후반 작업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제야 끝이 난 것 같아요. 사실 1차 예고편에서는 옥자 눈이 주인공이죠.

잠깐인데도 영화의 성격이 읽히더군요. 그 눈을 매일 보고 살았으니 만든 입장에서 매우 각별하겠어요. 1년 넘는 지난 시간 동안 후반 작업을 하면서 맨날 미국 CG팀과 화상 회의 하는 게 저의 일과였으니까요. 사실적이면서도 맑고 아름다운 눈의 느낌을 만들어야 했어요. 옛날에는 그럴듯하게 잘된 CG도 막상 눈에 이르면 뭔가 불편하거나, ‘언캐니(Uncanny)’한 경우가 많았죠. 그걸 극복하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예고편 본 분들이 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 기뻤어요. 걔가 사실 덩치만 컸지 엄청 순둥이예요. 순하고 내성적인 애거든. 눈에서 그게 표현되어야 하잖아요.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겠어요.

옥자가 슈퍼 돼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전혀 돼지처럼 보이지 않아, 다른 동물을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어요. 특수 돼지죠. 고기도 특수 부위가 있듯이. 하마, 코끼리 그리고 마이애미에서 헤엄치고 사는 매너티가 다 섞여 있어요. 특히 매너티는 정말 소심하고 내성적으로 생겼거든요. 법 없이도 살 만큼… 아, 동물은 원래 법 없이 사는구나.(웃음)

“길에서 아주 특이하고 신기하게 생긴 동물을 봤다. 몸집은 컸는데 수줍음이 많고 내향적이었다”라는 말로 영화의 시작을 떠올렸습니다. 그 동물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던가요? 집이 이수교차로 근처인데, 운전하며 지나다가 신호 대기를 하고 있었어요. 높은 고가도로가 이렇게 지나가면 아래 그늘지는 부분이 생기죠. 건물 6~7층 정도 되는 높이였는데, 비를 피해 구부정하게 끼여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어요. 얼굴이 유난히 시무룩하고, 근심이 있는 듯하고, 그래서 어쩐지 불쌍한… 실제 본 게 아니라 상상한 거죠. 우리 일이라는 것이 그것을 필름이나 화면, 스크린에 펼치고 관객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거니까. 한때 저와 프로듀서는 ‘이수교차로’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가제로 이 영화를 일컫기도 했어요.

흔히 어린아이라는 존재가 순수의 상징처럼 활용되곤 해요. 하지만 순수란 시대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의미인데요. 순수함이란 걸 어떤 개념으로 활용했습니까? 미자는 순수하면서도 또 현실적이에요. 미자 역을 맡은 안서현 양을 보면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순수 고결한 대자연 속 공주처럼 지는 해 보고 눈물 흘리는 애가 전혀 아니거든요. 은근히 현실적이에요. 강단도 있고요. 예기치 못한 액션도 벌어지는데, 이상한 파괴력과 돌파력이 있어요. 안서현 양도 그런 느낌과 컨셉을 좋아했고요. 처음 시나리오를 건네고 물어보니 이렇게 해석하더군요. 오히려 자신이 옥자 엄마 같다고요. <킹콩>에서는 킹콩이 여자를 보호하잖아요. <옥자>에서는 얘가 옥자를 구해내려 하고, 옥자는 어리벙벙하게 이러고 있고.(웃음) 안서현 양은 머리가 아주 좋고 자기 관점이 있는 배우예요. 그래서 저는 별로 할 게 없었죠. 황인호 감독의 <몬스터>라는 영화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그 영화에서 안서현 양이 참 이상한 연기를 해요. 흔히 우리가 아역 배우에게 기대하지 않는 독특한 연기를 하는데, 완전히 반했어요.

<옥자>는 자연과 동물, 동물과 사람과의 관계를 다룬 영화처럼 보입니다. 뭔가를 지켜내려는 쪽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달려드는 세력으로 이분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요. <옥자>가 이분법으로 진행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습니다만, 확신을 주시겠어요? 물론 명백히 주인공은 미자, 옥자예요. 둘의 여정을 따라가는 와중에 옥자에 대한 입장에 따라서 그룹이 나뉘어요. 옥자를 사랑하는 미자와 옥자를 자신들의 제품으로 생각하는 그룹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에요. 다만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인 거죠. 그쪽 입장을 틸다가 대변하고 있어요. 또 다른 그룹은 폴다노를 중심으로 옥자를 자신들의 철학과 이상으로 지키려는 활동가들이에요. 동물을 정말 사랑하는데 얘들이 상당히 이상한 데다 허술한 면도 있고 웃기죠. 이 세 그룹의 인물들이 막 뒤엉켜서 굴러갑니다.

여러모로 <설국열차>와는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겠군요. <설국열차>에서 앞머리 칸과 꼬리 칸의 대결 끝에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가 나오잖아요. 그 양반이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악한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일견 솔깃한 점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천신만고 끝에 거기에 간 커티스도 거의 윌포드의 유혹에 넘어갈 뻔하잖아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옥자>에도 이분법은 없어요. 회색 지대 속에서 다들 자기가 정당하다고 외치는 인간들이 막 뒤섞여 있을 뿐이죠. 하나같이 나사가 빠진 인간들이…(웃음) 그중에서 특히 하자가 많은 인물이 제이크 질렌할이에요. 그 캐릭터, 정말 이상할 대로 이상해요.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중엔 자체 동력으로 걷잡을 수 없게 될 것 같다는 점에서 자연스레 코엔 형제의 영화가 떠올라요. 언젠가 “내 영화 구조가 마치 숨바꼭질 같다고 하더라”고 얘기하신 적도 있어요. <플란다스의 개>의 개 찾기, <살인의 추억>의 살인범 찾기, <괴물>의 딸 찾기, <설국열차>의 기차 앞머리 엔진과 창조자 윌포드 찾기.” 이번에도 미자는 옥자를 찾으러 갑니다. 왜 이렇게 무언가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지 궁금하더군요. 그것이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드는 이유와 연결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만. 제가 영화를 겨우 여섯 편밖에 안 찍어서 근사하게 이야기할 자신은 없지만… 무엇보다 저는 움직이는 게 좋아요. 화면 안에서 인물이 움직이는 것도 좋아하고,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도 좋아하고, 둘 다 움직이면 더 좋고, 스토리 전체가 다 이동하고 있으면 너무 좋거든요. <설국열차>의 기차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거나, <괴물>에서 가족들이 하수구 안에서 계속 움직인다거나. 제 입장에선 <옥자>가 그런 움직임의 가장 극한적인 형태인 것 같아요.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맨해튼 한복판에까지 이르는 독특한 이동이니까. 순해빠진 동물이 어쩌다가 저 타향 만리 뉴욕 맨해튼까지 가게 되는가. 당연히 저는 흥분될 수밖에 없죠. 사실 찍는 과정도 비슷했어요. 강원도에서 찍다가, 서울 에서 찍다가, 뉴욕에서 끝을 내면서, 우리도 그 여정을 고스란히 경험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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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을 함께한 사람이 바로 틸다 스윈튼입니다. ‘디렉터 봉’에 대해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이던데, 두 분이 함께할 때 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지나요? 틸다는 저의 스토리를 듣고 나면 본인의 관점을 말해요. 이분이 정치학과를 나왔나 그래요. 아마 스코틀랜드 사회당 당원일걸요? 동시에 샤넬 모델이죠. 멋져요. 쿨해요. 게다가 관점이 있어서 저의 주제라든가, 동물과 자본주의 관계에 관해서 내가 고민하는 것을 항상 나눌 수 있어요. 한국 캐릭터로 안서현 양이나 변희봉 선생, 최우식 군이나 윤제문 씨가 나오고, 미국 캐릭터로 제이크 질렌할, 틸다, 폴 다노가 있죠. 제가 시나리오를 다 쓰고 모든 인물의 1차적 대사와 신을 만들었지만 미국 캐릭터의 묘사나 대사는 존 론슨에게 넘겨 함께 다듬어갔어요. 그 과정에서 틸다도 스스로 참여해서 자기 캐릭터의 대사 표현이나 배경을 같이 얘기했어요. 영화로 만나는 루시 미란도라는 인물의 묘사에는 틸다 자체의 크리에이티브가 많이 들어가 있을 거예요. 저도 그걸 부추겼고요.

그렇죠. 하다못해 발음이라도. 그녀의 발음은 영화마다, 역할마다 천양지차로 달라서 보는 재미뿐 아니라 듣는 재미가 있어요. 그러니까요. 이 인물은 어떤 캐릭터를 쓸까? 예를 들어 <설국열차>에서는 요크셔 악센트를 쓰고 싶은 이유에 대해, 문화적 배경까지 당시에 틸다가 설명해줬어요. 그런 거죠. 그런 건 제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죠. 제가 배우들에게 도움을 항상 원하고 의지하는 부분인데, 틸다는 너무 잘해주죠.

이번에는 어떤 악센트였나요? 전형적인 미국 악센트죠. 사실 미국인 연기 정도는 그녀에게 땅 짚고 헤엄치기죠. <아이 엠 러브>에서 러시아 여자가 이탈리아에 시집와서 러시아 악센트가 아직 남아 있는 이탈리아어로 연기를 했잖아요.

루시 미란도의 과장된 악센트가 잘 드러나는 바이럴 영상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무척 재미있었어요. 그녀의 손 하트는 제가 본 중 가장 섬뜩한 하트였고요. ‘Tenderness!’(웃음) 하트 막 그리면서. 존 론슨 작가가 함께 쓰고 넷플릭스 마케팅팀이 연구해서 낸 거예요. 웃기죠? 뻔뻔스러우면서. 돼지 색 옷 입고 나와서…

메이슨의 틀니가 틸다의 아이디어였다는 건 이제 유명한 일화가 되었어요. 여기서도 이가 유난히 희고 인공적이라 돋보이더군요. 이번에도 그녀가 아이디어를 보탰나요? 틸다는 제가 그런 걸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좋아해요. <설국열차> 때 제가 손과 입에 대해 그렇게 집착을 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이슨이 막 틀니를 빼고 그러잖아요. 양갱처럼 생긴 프로틴 블록을 먹으면서 구강 구조를 돋보이게 하는 이상한 장면이 있는데, 그거 찍을 때 제가 유난히 좋아했나 봐요. 이번에도 틸다가 계속 그런 쪽으로 아이디어를 내더군요. 봉을 기쁘게 하려면 입과 관련된 뭔가를 해야 한다, 치아 교정기를 해야 한다, 썩은 이가 있으면 어떠냐, 금니는 어떠냐…(웃음) 대사할 때 불편하지 않냐고 했는데 자기는 그런 게 좋대요. 그래서 교정기 하고 나오는 신이 생긴 거예요.

과도한 사교성이 오히려 무서울 수 있음을 보여준 그 기괴한 손동작은요? “Nature, Science, Synthesize”라고 말할 때 취하는 그 동작은 제가 현장에서 틸다와 함께 만든 건데, 그녀가 너무 즐거워하더군요. 배우들이 다 그렇지만, 몸을 이상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걸 좋아해요.

배우들은 낯선 형태로 몸을 쓰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니 그 분이 이번 <보그> 화보도 그렇게 하루 종일 찍은 거 아니에요. 그날에만 해도 수천 개의 자세가 나왔을 거예요. 그런 걸 너무너무 좋아해. 그러다 관절염 걸릴까 걱정이에요.(웃음) 뉴욕 모마에서도 이상한 퍼포먼스 했잖아요. 유리 상자 안에 들어가서 막 잠자고.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서 늘 열려 있고, 몸이 크리에이티브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가능한 프로젝트인 것 같아요. 사실 제가 그런 성향을 <설국열차> 때 많이 부추겼어요. 이번에는 그 정도로 부추기진 않으려고 했는데, 이미 스스로 시동이 걸려서 온 상태더라고요. 현장에서 우리는 플라멩코 포즈라고 불렀는데, 이번에도 와이드 샷에서 아주 순간적으로 독특한 포즈가 나왔어요. 계획한 건 아닌데, 어떤 대사를 하다 나와버리더라고요. 재미있었어요. 그 사진 찍어서 휴대폰에 가지고 있는데, 볼 때마다 웃겨요.

틸다는 어떤 감독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의 연기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친분을 배제하고, 배우로서의 틸다를 봤을 때 어떤 점에서 감동 받습니까? 송강호 선배도 그렇고, 김혜자 선생도 그렇고, 위대한 배우들의 공통점은 작품을 접했을 때, 처음 시나리오를 건넸을 때 내가 왜 이 영화를 찍는지 빛의 속도로 파악하는 동시에 자신의 관점이 딱 생긴다는 거예요.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생각한다’는 걸 단칼에 정리해버리는 그런 능력이죠. 통찰력 또는 핵심을 관통해버리는. 그런데 그게 제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른 거죠. 그래서 그것을 오히려 기대하게 되거든요. 이 배우가 내 관점은 이미 이해했고, 거기에 덧붙여서 또 어떤 관점이 있을까. 전 항상 그걸 듣고 싶어요. 그게 제가 배우로부터 얻는 어떤 힘이나 에너지 같은 거예요. 그런 게 있는 배우들이 다른 세계에 있는 배우들인 것 같아요. 배우의 계급을 나누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지만, 강호 선배나, 김혜자 선생이나 틸다에게서는 그런 걸 느꼈어요. 그런 관점이 있는 배우가 초반부터 함께 작업하게 되면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힘이 되죠. 크랭크인 일주일 전에 만나는 게 아니라 준비할 때부터 같이 서로 나누면서, 특히 <옥자>처럼 규모가 큰 영화에서는 길을 잃지 않고 같이 헤쳐나가는 데 엄청난 도움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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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다를 비롯한 배우, 스태프에게 스크립트 전에 옥자를 그린 컨셉션 아트를 먼저 보여주었다고 들었어요. 더불어 이 영화에 대해 매우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야 했을 텐데, 어떻게 설명했나요? 짧고 간단하게 했죠. 이 동물에게 벌어지는 소동인데, 불쌍하게 생기지 않았어? 그럼 배우들이 막 눈이 하트가 돼요. 미국 분들이 동물이나 아이를 볼 때, 우리가 보기에는 다소 과도해 보이는 특유의 리액션을 보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거짓은 아니죠. 옥자의 그림을 보여주면 다들 그렇게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표정으로 무방비 상태가 되었어요. 서로의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면 ‘아~’ 이런 상태가 되듯이. 그다음은 인더스트리에서 흔히 벌어지는 과정이에요. 현실적인 이야기들.

제이크 질렌할과는 첫 작업인데, 그 연기파 배우와의 만남은 어땠나요? 최근 그 친구의 행보가 상당히 과감하잖아요. <나이트 크롤러> <에너미> <녹터널 애니멀스> 같은 영화를 보면 연기도 좋아요. 스펙트럼도 넓어지고. 사실 <옥자>에서도 분량으로만 보면 폴 다노보다 적은 신이 명백한 조연인데, 도드라지는 역이거든요? 사실은 상당히 미친 TV 호스트 역할이에요. 완전 또라이에, 쟤 왜 저래? 그런 역할이죠. 그런데도 그는 출연 결정이 아주 빨랐어요. 시나리오 보내자마자 다음 날인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만났고, 얘기했죠. 요즘 계속 더해가고 있는 과감하고 독특하고 웃기고 특이하면서도 좋은 의미에서 종잡을 수 없는 행보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겠구나 한 것 같아요. <옥자>에서도 정말 이상한 역할이거든요. 너무 재미있어요. 평소 그 친구의 눈이 뿜어내는 이상한 광기같은 게 자연스럽게 담겼는데, 제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배우였어요.

<나이트 크롤러>를 보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이 보여준 눈빛에 버금가죠.(웃음) 폴 다노와는 원래 친구 사이였다는데 상상이 잘 안 가네요. 시나리오도 폴 다노를 생각하면서 썼어요. 2006년에 뉴욕에서 지인 소개로 만났는데, 관객도 몇 명 없는 지하에서 베이스 치면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그때 그 친구가 구질구질한 인디 밴드를 꾸리고 있었거든요.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처음 보고는 정말 특이한데, 연기를 참 잘하는구나 했고요.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맞짱 뜨는 걸 보면서 반했어요. 자연스럽게 미국 갈 때마다 만나며 친해졌고, 함께 작업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계속 어긋나다 이번에 맞추게 된 거죠. 그 친구가 아시아 영화나 한국 영화도 많이 봐요. 이번에 연출가로 데뷔했는데, 주인공이 또 제이크 질렌할이에요. 지들끼리 어떻게 지지고 볶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감독 데뷔를 했어요.(웃음) 지금 후반 작업 하고 있을 거예요. 무척 똑똑하고 좋은 친구예요. 감독 입장을 많이 배려해주고, 인간적으로도 매력 있죠.

<설국열차> 개봉 즈음 이 영화가 새로운 시작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옥자>는 필모그래피의 어디쯤 와 있나요? 막상 <옥자>를 찍고 보니, 그동안 해왔던 모든 걸 한데 휘몰아 감싸 안아 산화하는 게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기생충>부터가 접근 방식 등 모든게 다른 완전히 새로운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지금 마흔아홉인데, 나이와 영화 편수를 대략 산술적으로 계산해보니 한 17편 정도를 찍고 죽으면 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초, 중, 후기로 기계적으로 3등분 한다고 치면 <옥자>를 초기의 마무리로 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기생충>은 정말 이상한 영화가 될 거거든요. <옥자>도 충분히 이상하지만, <기생충>은 더 이상해. 투자가 될지 모르겠어요.(웃음)

개인적으로는 <살인의 추억> 같은 한국의 부조리가 진하게 묻어나는 영화를 만들어주길 강렬하게 바라고 있습니다.(웃음) 왜냐하면 봉준호의 영화야말로 어른이 된 후 잊고 산 이야기의 원초적인 즐거움, 태초의 쾌락, 본질적인 힘을 느끼게 해주니까요. 이야기의 힘을 얼마나 믿나요?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세상을 상대로 뭘 해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영화 역사나 스토리텔링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싶은 그런 야심은 있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 있다면 ‘세상에 나올 만한 이야기는 다 나왔다’ 혹은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거예요. 전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 세상에 나올 스토리의 100만 분의 1밖에 안 나온 것 같아요. 파헤칠 수 있는 게 더 많고요. 그래서 여태껏 세상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 그것이 창작하는 이유예요.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스토리가 사람을 홀리는 방식은 무궁무진하게 새로울 수 있고, 저는 100만 개 중에서 17개 정도 하고 죽을 것 같아요. 그 열 몇 개 정도를 영상 자료원에 남겨서 사람들이 1년에 한 명이건 10년에 두 명이건, 계속 볼 수 있으면 그 자체로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의 힘이 가장 기대되는 영화가 바로 <옥자>죠. 그런가? 스토리가 무지 이상한데요?(웃음)

그래서 더욱더 말이죠. 그나저나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인가요? 그것도 애매해요. 영화가 끝나긴 하는데…(웃음) <옥자>는 제 영화 중에서 최초로 사람이 안 죽어요. 살인 사건도 없고, 사고로도 안 죽는 영화라는 말이 답이 될지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