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Love, Story

영화 〈옥자〉의 두 여주인공 틸다 스윈튼과 안서현을 옥자의 고향에서 만났다. 그들이 레드 카펫으로 향하기 전 〈보그〉 카메라 앞에 섰다.

틸다 스윈튼이 입은 우주복 프린트 시어 드레스, 검은색 스틸레토 힐, 안서현이 입은 스트라이프 네크라인의 흰색 레이스 소재 원피스, 스트랩 샌들, 왼팔의 참 장식 브레이슬릿은 샤넬(Chanel).

틸다 스윈튼이 입은 우주복 프린트 시어 드레스, 검은색 스틸레토 힐, 안서현이 입은 스트라이프 네크라인의 흰색 레이스 소재 원피스, 스트랩 샌들, 왼팔의 참 장식 브레이슬릿은 샤넬(Chanel).

“정확히 15분 있어요, 선생님!” 이곳은 서울 시내가 훤히 보이는 호텔의 25층 스위트룸. 검은색 드레스를 품에 안은 샤넬 PR 담당자와 재단사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비상 상황’은 이날 촬영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틸다 스윈튼이 입기로 예정된 샤넬 2017 오뜨 꾸뛰르 드레스가 2017 F/W 컬렉션 드레스로 바뀐 것이다. 전날 이미 피팅까지 마쳤기에 오늘 새 옷을 입고 레드 카펫 행사장에 가려면 여기저기 수선이 필요한 상황. 다행히 007 작전보다 더 신속하고 신중한 ‘수선 작전’을 마치고 정확히 15분 후 드레스는 틸다의 방으로 배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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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준비를 마친 배우 안서현이 하얀 작약 색깔을 닮은 드레스를 입고 촬영장으로 내려왔다. 수줍게 촬영장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처음 건넨 말. “틸다는 오고 있나요?” 순간 지난 칸 국제영화제에서 열린 <옥자> 프레스 콘퍼런스 때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안서현을 바라보는 동료 배우들(틸다 스윈튼은 물론 제이크 질렌할, 릴리 콜린스, 폴 다노까지!)의 ‘꿀 떨어지는’ 눈빛이 SNS에서 연일 화제가 된 게 생각났다. 틸다와 안서현 두 사람의 연기 경력에는 22년이라는 시간의 차가 존재했지만 이를 가볍게 뛰어넘을 만큼 둘의 친밀함은 제3자가 보기에도 충분히 온화해 보였다. “세계적인 배우들, 감독님과 함께해서 영광이었어요. 제 배우 인생에서 둘도 없을 기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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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모두가 기다리던 인물이 방금 전 수선을 마친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등장했다. 핏기 없는 석고상 같은 얼굴을 한 틸다가 룸으로 들어오자 초현실적 느낌을 불러일으키던 긴장감도 모조리 사라질 지경이었다. 179cm나 되는 큰 키의 여배우는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띤 채 악수를 청했다. 맞잡은 그녀의 손은 서늘했지만 이내 나의 손을 꽉 잡자 번쩍 현실감이 들었다. “한국엔 친구가 많아요. 그래서 서울은 올 때마다 늘 고향 같은 느낌이 든답니다.”

틸다가 한국을 방문한 건 샤넬 서울 크루즈 컬렉션이 열린 2015년 <보그 코리아> 촬영 이후 2년 만이다. “와우, 전 이런 오래된 카메라가 좋아요.” 그녀가 자신 앞에 놓인 4×5인치 대형 린호프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세계적인 명배우답게 뷰파인더를 응시하는 것 자체로도 우아한 ‘아우라’를 풍겼다. 그러나 그녀는 짧은 시간의 촬영일지라도 타국에 영화 홍보를 하러 왔으니 ‘해야만 하는’ 일의 연장 선상으로 여기지 않고 현장의 모든 스태프가 전력을 다하도록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 시작은 본인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는 것부터였다. “서현과 제가 여기 소파 의자에 앉아서 ‘거울’처럼 똑같은 포즈를 하면 어떨까요? 양손을 모아 무릎에 얹고, 다리는 꼬아서요!” 그녀는 스태프들의 아이디어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주저 없이 실행에 옮기는 타입이었다. “사진가가 말한 대로 ‘크게’ 포즈를 취하고 싶은데, 드레스 목 부분에 달린 메탈 장식 때문에 여기까지만 몸을 숙일 수 있어요. 이 정도가 최선인데 괜찮을까요?” “서현과 손을 잡으라고요? 오,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틸다가 여러 포즈를 취하느라 옷이 흐트러질 때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준 건 그녀의 연인이자 아티스트 산드라 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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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사소한 것에도 자기 의견을 반영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그녀이기에 <옥자>의 중심이 되는 장면에서 입을 옷을 골랐다는 얘길 들었을 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옥자>에서 맡은 캐릭터 루시 미란도에서 제가 사랑하는 샤넬의 모습이 바로 보였습니다.” 루시는 미국의 대기업 ‘미란도’의 CEO로 식량난 해결을 위해 ‘슈퍼 돼지 프로젝트’를 전 세계적으로 시작하는 인물이다. 유전자 개량으로 태어난 돼지 옥자는 미자(안서현)의 둘도 없는 반려동물이었으나 우수한 슈퍼 돼지로 선발돼 뉴욕으로 가는 것이 영화의 큰 줄거리. “루시가 자신이 만든 슈퍼 돼지 대회에서 옥자에 시상하는 장면을 보고 지난 샤넬 서울 크루즈 쇼 때 제 시선을 사로잡은 분홍색 한복을 떠올렸습니다. 이 옷을 입으면 루시의 강렬한 모습과 그녀가 슈퍼 돼지 대회 우승국인 한국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표현하기에 완벽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샤넬에서 영화 의 주인공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를 위해 제작한 옷 두 벌. 서울에서 열린 2016 크루즈 컬렉션의 피날레 의상이다. 분홍색 실크와 시폰으로 만들었으며 앞가슴 쪽의 댕기 리본이 포인트다.

샤넬에서 영화 <옥자>의 주인공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를 위해 제작한 옷 두 벌. 서울에서 열린 2016 크루즈 컬렉션의 피날레 의상이다. 분홍색 실크와 시폰으로 만들었으며 앞가슴 쪽의 댕기 리본이 포인트다.

틸다가 고른 이 옷은 당시 컬렉션 피날레에서 모델 지혜가 입고 나온 단아한 실루엣의 분홍색 한복 드레스다. 실크와 시폰이 겹겹으로 된 이 드레스의 포인트는 가슴에 달린 검은색 옷고름. 틸다를 위해 제작한 영화 의상에서는 대신 올리브색 벨벳 옷고름이 달렸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보니, ‘한국’ 하면 떠오르는 전통 의상, 즉 1차원적 레퍼런스로 버무린 코스튬처럼 보이지 않고 영화의 배경인 2017년과 잘 어울리는 옷으로 샤넬의 2016 크루즈 드레스만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틸다는 영화에서 쌍둥이로 나오기에, 샤넬은 같은 재질과 길이의 튜브 톱 드레스를 한 벌 더 제작했다. <옥자>에서 고급 실크로 만든 틸다의 샤넬 의상과 안서현의 옷을 비교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안서현의 옷은 틸다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좀더 검소해 보이도록 코튼과 리넨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틸다는 영화에서 샤넬이 지난해 쿠바에서 선보인 2017 크루즈 컬렉션의 분홍색 와이드 라펠 재킷도 입고 나왔다. 물론 이 옷 역시 자본주의 세상의 중심에 있는, 성공한 CEO 루시 미란도의 이미지를 보조하는 역할이다.

에서 루시 미란도, 미자 역을 맡은 틸다 스윈튼과 안서현.

<옥자>에서 루시 미란도, 미자 역을 맡은 틸다 스윈튼과 안서현.

틸다 스윈튼이 샤넬과 인연을 맺은 건 지난 2009년 베를린 영화제 레드 카펫 의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그녀는 2013년부터 브랜드의 공식 앰배서더로 활약했고, 당시 칼 라거펠트는 틸다의 고향이기도 한 스코틀랜드에서 영감을 받아 2013 파리-에든버러 공방 컬렉션 의상을 틸다에게 입혀 광고 사진을 찍었다. 틸다가 샤넬의 얼굴이 된 건 그녀가 블록버스터와 실험 영화를 넘나드는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으며, 패션 디자이너들의 뮤즈이기 때문이다. 또 스스로가 현대미술 퍼포먼스의 주체로도 나선 바 있는 전방위 예술가이자 그녀의 행보가 기존의 규칙을 거부하고 혁신을 추구하는 샤넬의 정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단 하나의 틀에 집어넣는 것을 싫어해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 그녀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틀로도 가둘 수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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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강렬했던 촬영을 마치고, 서둘러 안서현과 한국 팬들이 기다리고 있는 레드 카펫 행사장으로 발길을 옮겨야 하는 틸다 스윈튼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지난 2년간 준비한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당분간 큰 부분을 차지할 <옥자>를 세 단어로 말해달라고. 그녀는 온화한 미소로 막힘없이 대답했다. “훌륭한(Great), 러브(Love), 스토리(Story)!” 그녀가 한국에 머문 며칠 동안 자신의 팬들에게, 그리고 <보그>에 전한 메시지와 다름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