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쥐라산맥에서 사진가 배병우는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모필에 먹과 물을 듬뿍 적신 붓처럼 수묵화를 닮은 그의 사진은 미처 기록되지 못한 과거의 시간을 숲과 나무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준다.

‘Anchay Series’

‘Anchay Series’

사 진 가 배병우는 160년 전 루이 비통의 발자취를 따라 프랑스 쥐라산맥의 깊은 계곡을 걷고 또 걸었다. 물레방앗간이 있던 자리, 가난한 목수의 아들 루이 비통이 태어난 곳. 그가 앙쉐(Anchay) 지역을 찾은 건 2014년 봄이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 숲 한가운데에 이른 그는 숙소 주인을 통해서야 세월호 사건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온통 나무로 둘러싸여 외부와 단절된 작은 마을이었다. 루이 비통이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집은 폐허로 남은 채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매일 새벽마다 그 집을 찾아가 마음의 기도를 드렸어요. 그러고는 차를 타고 60km 떨어진 곳까지 나가 주위를 찍었죠.”

한때 국내에서 ‘3초 백’이라 불릴 만큼 유명했던 모노그램의 창시자이자 오늘날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가 된 루이 비통의 창립자 루이 비통은 열네 살이 되던 해인 1835년, 쥐라산맥의 고향 마을을 떠나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 어린 소년이 파리에 도착하기까지는 무려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엄마의 자궁을 연상시키는 물레방앗간은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지 성장하는 데가 아니에요. 증기기관차가 발명되면서 물레방앗간이 쇠락해가던 시점이기도 했고요.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라도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사람한테는 절대 공짜가 없습니다. 위대한 인물에겐 늘 역경이 있게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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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부터 8월 27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는 루이 비통의 세계 순회 전시 <Volez, Voguez, Voyagez: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에서 배병우의 앙쉐 시리즈는 루이 비통의 역사적인 가방과 함께 전시된다. 루이 비통은 원래 여행용 트렁크를 만들면서 시작된 브랜드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스무 살 무렵부터 일평생 온갖 산과 바다와 섬을 누비며 이 땅의 자연을 카메라에 담아온 배병우에겐 삶 자체가 여행이다. 그러한 기질적 유사성 때문일까? 미술계의 거대 컬렉터이기도 한 루이 비통의 아르노 회장은 이번 프로젝트를 배병우에게 의뢰하기 훨씬 전부터 그의 작품을 소장해왔다. “파리 본사의 회장 집무실에 제 작품이 걸려 있다고 들었어요. 특이하게도 소나무가 아닌 감나무 사진을 선택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컬러로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흑백 소나무 사진을 고르는데 말입니다. 그게 참 묘해요. 컬러로 된 소나무 사진을 제일 먼저 구입한 게 엘튼 존이었거든요.”

이번 전시에서 배병우의 작품은 귀스타브 쿠르베의 그림 ‘오르낭 지역 주변 풍경’과 나란히 놓인다. 쿠르베의 고향이기도 한 오르낭 역시 앙쉐와 마찬가지로 쥐라산맥에 위치한다. 19세기 프랑스 화가와 21세기 한국 사진가가 긴 시간을 넘어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셈이다. 하지만 그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정반대다.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인 쿠르베가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본다면, 배병우는 지극히 서정적이다. 그의 작품은 사진이라기보다는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느낌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렸던 <한국 미술: 여백의 발견>전에서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맞은편에 배병우의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Anchay Series’

‘Anchay Series’

빛과 어둠이 적절한 농도를 맞춘 시간, 사방이 적막에 젖은 바로 그 순간, 그가 포착해낸 풍경은 몽환적이고 아득하다. 그리고 특유의 아름다운 여백은 어떤 말이나 글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빛의 농담을 이용하기 때문에 저물녘과 새벽녘에만 촬영을 한다. 여수 금오도의 산등성이도, 알람브라 궁전의 뒷산 소나무도, 쥐라산맥의 평화로운 숲도 비슷한 분위기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모든 사진 속엔 배병우의 한국적인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가 찍으면 그 장소가 어디든 다 제 것이 된다고들 하더군요. 해외에서 저에게 사진을 의뢰하는 것도 그 때문일 테고요. 정서가 다르잖아요. 그들 입장에선 저만의 스타일로 표현한 자연을 보고 싶었던 거죠.”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맞아 배병우를 샹보르의 고성으로 초청했던 샹보르성 전시 큐레이터는 그의 사진에 대해 19세기 독일 화가 다비드 프리드리히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극적인 묘사로 자연의 숭고미를 그린 낭만주의 화가처럼 “후광과 베일같이 깔리는 안개가 실경의 흑백사진을 현실과 거리가 먼 픽션으로 다가오게 하는 마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전자의 그림엔 사람이 있고 후자의 경우엔 자연만 존재한다는 게 둘 사이의 다른 점이다. 배병우는 개인적으로 수입하고 있다는 와인 한 병을 주방에서 꺼내오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 독일 화가는 기독교신자거든요. 그런데 나는 바쿠스 신자, 즉 술꾼이니까 다를 수밖에요.”

생명공학 농법으로 만들었다는 프랑스산 와인을 마시며 그는 한동안 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2만 병의 와인을 보유하고 있는 파리의 한식집과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지은 스페인 리오하의 초특급 와이너리 호텔… “루이 비통의 생가가 있던 쥐라산맥 지역 와인은 다 화이트예요. 우리나라 대관령처럼 해발 600~800m 정도 되는 고지대거든요. 여기서 좀 내려가야 포도밭이 있지. 이곳 와인은 그냥 그래요. 그런데 뭐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 동네 와인이 제일 맛있다고 하니까…” 그는 여수의 별미라는 가자미를 안주로 꺼내놓았다. 여수는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 루이 비통의 기나긴 여정이 산꼭대기에서부터 출발했다면 카잔차키스의 소설 속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그의 방랑은 남쪽 바다에서부터 바람을 타고 흘러간다. 그는 한때 직접 요트를 몰고 신안군 주변의 섬을 돌며 곳곳의 숨은 비경을 필름에 담은 적도 있다. “사실 이 작은 나라도 아직 다 가보지 못했어요. 우리나라 섬 3,300개 중에 한 200개 정도 갔을까? 우리나라도 참 자연이 재미있어요. 한류와 난류가 만나면서 계절마다 생선도 바뀌잖아요. 어제도 제주도에서 사진을 찍다가 왔어요.”

‘Anchay Series’

‘Anchay Series’

소나무 사진가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의 작업실 마당엔 소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작업실은 물론 집 안 어디에도 자신의 사진 한 점 걸어두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온갖 종류의 책으로 공간을 빼곡히 채운다. 타센에서 출간한 초대형 사이즈의 헬무트 뉴튼 사진집부터 일본어 원서와 만화책, 잡지, 추리소설, 엘불리 레스토랑의 전설적인 요리사 페란 아드리아의 요리책, 디자인 서적과 철학 서적이 이러저리 얽혀 있다. “내가 원래 ‘잡독’이거든요. 술도 아무거나 먹고.”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칭기즈칸 관련 책이다. 허영만 화백이 그려준 칭기즈칸 그림을 비롯, 심지어 화장실 변기 뚜껑에도 몽골에서 사왔다는 칭기즈칸 사진이 붙어 있다. “나는 칭기즈칸 신봉자예요.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사람이잖아요. 위대한 인물이죠.”

배병우는 언젠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명대 말기의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동기창은 예술가는 타고난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여행하면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도 했죠.” 그는 또 한번 먼 길을 오를 것이다. 정복자의 칼과 창 대신 예술가의 카메라를 들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서. “비행하라, 여행하라, 항해하라.” 이건 루이 비통의 정신이기도 하다. 배병우의 사진 작품을 비롯해 루이 비통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과 유명 인사들의 여행 가방을 볼 수 있는 루이 비통 순회 전시는 오는 8월 27일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