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말해줘

왜 그 사람은 잘못하고도 사과하지 않는지, 사과하지 않는 그가 이상한 건지 사과 받지 못한 내가 이상한 건지 궁금했던 적 없나?

쏘리쏘리 수정

이건 연일 브라운관을 장식하던 재벌 총수, 유명인들의 ‘유사 사과 퍼포먼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약속이나 한 듯, 최근 지인들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사과 불능자’에 대한 제보를 쏟아냈다. “사과 안 하는 전염병이 돌고 있나요?”부터 “사과하지 않는 인간들의 DNA는 뭘로 이뤄져 있나요?”까지. 이를테면 버스에서 묵직한 동전 지갑을 내게 떨어뜨리고도 모르쇠 하는 여자, 특유의 ‘갑질’로 분위기를 다 망쳐놓고도 떳떳한 연예인, ‘미안하다’ 하는 게 곧 지는 거라 생각하는 동료. 공감과 이해 능력은 인간 문명을 추동하고 유지시켜온 가장 위대한 능력이고, 미안하다는 말은 인간이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몇 가지 중 하나인데, 어쩌다 이들은 ‘미안하다’는 말 자체를 아예 모르는 것처럼 구는 걸까?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보라. 엄마한테 사과 받는 법, 싸운 언니에게 사과했는데 안 받아줄 때의 대처법, 손해 보지 않고 사과하는 법 등 사과에 대한 대부분의 궁금증은 그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 효율성에 머문다. 그러나 ‘겸연쩍어 사과가 힘들다’는 건 애교이고, 더 큰 문제는 명백한 상황에도 사과할 이유와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과에 집착하는 것은 단지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가 미안하다고 느끼기를 원하며 이는 소통의 기본이다. 그러나 ‘사과 불감증’ 혹은 ‘도덕적 문맹’의 상태는 이런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차단한다. 이런 상황은 종종 나르시포비아(이기적이고 자아도취적인 나르시시스트를 두려워하는 증상)로 발전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이런 문제가 30년 전에도 이미 공론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우연히 1981년 9월 어느 일간지에 실린 칼럼을 찾아 읽게 되었다. ‘거울을 잃어버린 이세(二世)들, 사과에 인색하다’라는 제목이다. “‘미안하다’는 발음을 잊고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의 최후 전달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잘못의 책임은 그릇된 제도가 져야 하고, 낡은 기계에 물어야 하며, 부족한 일손에 지워야 한다고 생각한다.(중략)” 이미 30년 전에도 ‘한길의 남녀가 부딪쳐 넘어져도 사과는 상대방이 해야 한다는 계산에 빠진’ 풍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하긴,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도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애정과 신뢰를 폭발시키는 도화선의
한 끄트머리다.”

사과에 대한 연구가 등장한 건 1970년대 초반, 구체적인 방법론과 본격적인 심리학 연구는 199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전까지 많은 이들은 아마 미국 수필가 O.W. 홈스처럼 생각했다. “사과는 거의 치유될 수 없는 절망적 습관이다. 십중팔구 친구가 그의 결점을 알게 되는 것은 그의 사과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사과의 가치는 재발견됐다. 뇌과학자 정재승과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김호가 공저한 <쿨하게 사과하라>가 정의하듯 “사과는 루저의 언어가 아니라 리더의 언어”라는 식의 가치 말이다. 이는 내향적인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감성은 이성만큼 중요하다 등과 같은 ‘21세기적 첨단의 가치’ 중 하나인 셈이다. 그중 정신의학자 아론 라자르의 말은 종종 인용된다. “사람들은 사과를 나약함의 상징으로 본다. 하지만 사과의 행위는 위대한 힘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여주인공 강태영의 대사로도 충분히 공유 가능하다. “한기주 씨, 미안할 땐 그냥 미안하다고 하는 거예요. 자존심 세우면서 사과하는 법은 없어요.”

수많은 사과의 기술이 난무하지만, 핵심은 매우 쉽고 명료하다.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상처와 분노에 공감하며, 진심을 전하고, 변명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 계획과 사후 처리를 약속하는 것.’ 그러나 <하버드비즈니스리뷰 코리아>의 필자 하이디 그랜트 할버슨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그동안 우리가 잘못된 방식으로 사과를 해왔다는 사실은 놀랍다. 우리는 사과를 하면서 스스로를 용서하고 있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2016년을 뒤흔든 대통령의 사과나 엊그제 남편과 다툰 후 나의 사과나, 이 함정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사과하는 법’에 대해 인류학적인 고찰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사과하는 00가지 방법> <사과의 00가지 언어> 유의 자기 계발서는 더욱 맹렬히 쏟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과하지 않으니까. 정재승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이 현상의 이유를 뇌과학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말’이다. 자기 합리화에 빠지게 될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최선이었다고 왜곡하여 받아들인다. 잘못을 하고도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라고 자기암시 하고 사과하지 않는다. (중략) 인간의 뇌는 기본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걸 싫어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 감정적 판단에 지배되어 방어적 논리에 집착하게 된다. 조직 역시 실수가 있으면 방어할 논리를 찾는 데 집중한다. 특히 법정 논리의 속삭임, ‘나중에 소송 걸리면 인정한 게 되어 불리해’ 같은 식으로. 그 결과 두루뭉술 넘기기, 잡아떼기, 둘러대기 같은 악수가 동원된다.”

동물적 본능을 이기고 전두엽을 풀가동시킨다는 면에서 사과는 인간의 뇌가 할 수 있는 영역 중에서도 가장 고차원적이다. 사과의 유무와 방식 등은 인간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동시에,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잘못했을 땐 사과한다’는 명제는 어린이집에서부터 배우지만, 정작 네 살 아이는 밥상머리 앞에서 생떼를 쓰고도 제대로 사과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모른다. 뇌 구조상 사과의 행위를 구조적으로 취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과할 줄 모르는 어른들, 일종의 ‘감정 지진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얼마 전 친한 연예인과 촬영을 다녀온 후배 에디터는 그녀에게 크게 실망했다고 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그녀에게 최선을 다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인간적인 터치는 있어야 하잖아요. 사과하지 않았다고 화낼 일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없으니 인간으로 보이지 않더군요.” 사과하는 행위는 ‘최소한의 인간성’을 표현할 수 있는 상징. 사과와 용서가 관계를 이어주는 다리라면, 사과의 결여로 인해 ‘공감’이라는 나무토막이 부서지면서 모든 게 산산조각 났다.

정신의학과 전문의 손석한은 <보그>에 ‘사과하지 않는 자’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분위기가 더욱 강해진 건 사실이지만, 사실 그런 사람들은 쭉 존재해왔습니다. 이를테면 무엇이든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도덕성, 사회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기반성도 없죠. 나르시시즘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일 수도 있어요. 감히 나에게 사과를 받으려고 해? 이런 식이죠. 반대로 자존감이 너무 낮은 사람일 수도 있죠. 사과한다는 게 나 스스로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꼴이 아닐까 걱정하는 겁니다.” 더불어 그는 이런 조언을 전했다. “누구든 마땅한 사과를 받지 못하면 불쾌합니다. 무례한 사람이구나, 하면 되는데, 더 나아가 날 무시하나 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내리 깎게 되고 수치심과 분노가 치솟죠. 그 감정에 사로잡히면 사과와는 상관없이 자존감에 문제가 생깁니다. 감정싸움을 하기보다는 그 사람 혹은 그 상황을 객관화하는 편이 좋습니다.”

캐나다 태생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사과란 자아를 두 개로 나누려는 시도”라고 표현한 바 있다. 비난 받아 마땅한 자아와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공감하는 자신, 즉 잘못으로부터 배우고 앞으로 더 잘하려는 자아로 자신을 분리하려 한다는 뜻이다. 두 자아가 모두 사과 안에 있을 때 진정한 사과가 된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건 사회의 통념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상식적인 기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사과하지 않는 이유를 개인이 아니라 시대에서 찾은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말은 매우 납득이 간다.

“우리 사회를 두고 아노미 상태라고들 하죠. 급격하게 다원화되었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신적 가치는 확립되지 못한 겁니다. 식민, 전쟁, 독재로 점철된 근현대를 거치면서 농경사회의 가부장제는 무너졌지만, 나의 선택을 철저히 책임지는 서구식 개인주의가 자리 잡은 것도 아닙니다. 짧은 민주주의 역사를 통해 시민 의식이 정착되고 정의가 구현되는 모습을 지켜본 세월도 많지 않아요. 그 결과 명확한 도덕이 내재화되지 못했어요.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명확히 사과해야 할 기준도 없고,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거죠. 원칙대로 하면 손해 보고, 기회주의적이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인식이 뿌리 깊어요. ‘잘못하면 당연히 사과한다’가 아니라 ‘재수 없어서 비난을 듣게 되었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하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에 대해 날이 서 있어요. 각자가 다 억울한 피해자라 생각하는 분위기가 팽배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쉽게 사과할 마음이 생기지 않죠.”

잡지 에디터란 ‘사과나무 심는 농부’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나는 종종 하곤 했다.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늘 ‘사과를 (따)드려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에디터는 프로젝트의 시작이자 중심이기에 조율해야 할 일도 백만 가지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문제는 어김없이 발생하고, 공식적 주체로서 사과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한땐 그 사과나무가 지긋지긋했다.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이 현상이 부박하고 야만적인 시대를 사는 길 잃은 이들의 쓸쓸한 단면일 수 있다 생각하니, 사과나무를 뽑아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 더 제대로 키워야 하나 싶다.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건강한 ‘사과를 드리는’ 일이 ‘나쁜 놈이 더 잘 잔다’는 범시대적 콤플렉스를 치유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거라는 쓸데없는 사명감마저 든다. 가까운 미래, ‘제발, 사과 좀 합시다’라는 캠페인 플래카드가 나붙는 쓸쓸한 그날만큼은 오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