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저널리즘에 대하여

현시대의 패션 잡지라면 저널리즘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좀더 야심 차고 현명한 저널리즘을 추구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바, 이 글이 자기반성이자 자기 고백적임을 순순히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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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의 다정하고 오랜 친구와 절교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패션 저널리스트 중에서 퓰리처상 수상자가 없다고 비아냥거렸기 때문이다. 일단, 그건 엄연히 사실이 아니다. 로빈 기브한(Robin Givhan)이라는 여자가 2006년 패션 저널리스트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바 있다. 1917년에 생긴 시대착오적인 상이라 폄하해도, 퓰리처상이 ‘드디어’ 패션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비평이 문학으로 인정받은 시간보다 패션 비평이 비평으로 인정받은 시간이 훨씬 길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순간이랄까. 참고로 로저 에버트가 영화 평론가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건 1975년이었다.

어쨌든 <보그>를 거쳐 <워싱턴포스트>에서 활동해온 기브한의 비평은 런웨이에만 머물지 않았는데, 이를테면 독일에 간 콘돌리자 라이스 전(前) 미 국무부 장관의 옷차림에서 양국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읽고, 미셸 오바마의 바캉스 룩에서 정권의 전략을 발견하는 식이었다. “난 절대 패션에 얽매이지 않으며 패션 매거진이 시키는 대로 옷을 입은 적도 없다”던 기브한에게 디자이너와 패션 잡지가 어떤 축하 메시지를 전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수상 이유는 명확했다. “패션 비평을 문화 비평으로 변모시키는, 위트 있고 정교하며 관찰적인 에세이.” 내겐 이 문장이 패션 잡지의 미래처럼 느껴졌다.

패션 저널리즘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수십 편의 논문으로도 부족하지만, 새삼 호기심이 생겨 백과사전을 뒤져봤다. 라틴어인 ‘Factio’에서 유래한 ‘패션’의 어원은 ‘유행하다’ ‘창조하다’라는 뜻. 또 저널리즘이란 ‘매일매일 기록한다’는 뜻의 라틴어 ‘Diurna’에서 유래, 프랑스어로 주르날(Journal)이 되고, 정기간행물을 뜻하는 ‘저널’로 자리 잡았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유행하는 것을 쓴다’는 뜻인 동시에 ‘매일매일의 창조를 기록한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애초에 저널리즘이란 매일 쓰는 행위를 통해 ‘의견과 지성을 교환한다’는 함의를 품는 셈이다. (산업과 문화를 아우르는) 패션이라는 세계에서 (결과물이자 오브제인) 패션이라는 대상을 둘러싼 사건과 의견을 기록함으로써 만들어내는 (패션 안팎을 아우르는) 지성의 장이라 말한다면 너무 거창할까?

예전 한 디렉터 선배는 한 국어교사가 수업 교재로 <보그> 기사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주 했는데, 그녀의 유난했던 자부심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나는 지금도 패션 잡지에서 일한다고 밝힐 때마다 출처 모를 호감과 무시, 그 비슷한 시선을 동시에 느낀다. ‘감각적으로, 재미있게 살겠네’와 ‘그래 봐야 패션 잡지지’. 인터뷰 중 이런 말도 종종 듣는다. “저의 부모님은 만화책과 패션 잡지를 마음껏 읽게 하셨어요.” 이는 그들이 얼마나 자유분방했는지를 증명하고, 해외의 패션 잡지일 경우에는 경제력까지 가늠하게 하는 팩트로 활용된다. 광고가 많다는 건 시장에서 호평받고 있음을 입증하지만, 독자들은 프라임타임대의 인기 드라마 앞뒤로 광고가 많다는 건 인식조차 못할지언정 ‘광고로 가득 찬 잡지’는 싫어한다. 이런 댓글도 봤다. “잡지의 기사란 아무리 잘 써도 소모적일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다.” ‘소모적’이라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매달 콘텐츠를 쏟아내기 때문인가? 잡지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인가? 유행을 좇기 때문인가? 상업적이기 때문인가? 그러나 이런 이중적 시선을 마냥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내 멋대로 생각해왔다. 이것을 패션 잡지를 ‘읽을거리’ 혹은 ‘창조물’로 기대한다는 것의 반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

패션 잡지에서 글 쓰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질문마다 나는 부지런히 ‘시대를 충실하게 기록하는 것’이라 답해왔다. 일상을 아우르는 미시적인 의미의 시대 말이다. 패션 잡지를 만드는 이들은 미적 감각 혹은 형식이 내용을 변혁할 수 있다고 믿는 인종이지만, 그렇다고 무책임한 유미주의자는 아니다.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자기 삶의 미적 규칙을 부여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고, 그 힘이 자기 삶을 자율적 원리에 입각해 긍정의 역사로 창조한다’는 굳건한 믿음 때문이다.

패션 잡지에서 글 쓰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질문마다 나는 부지런히 ‘시대를 충실하게 기록하는 것’이라 답해왔다. 일상을 아우르는 미시적인 의미의 시대 말이다. 패션 잡지를 만드는 이들은 미적 감각 혹은 형식이 내용을 변혁할 수 있다고 믿는 인종이지만, 그렇다고 무책임한 유미주의자는 아니다.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자기 삶의 미적 규칙을 부여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고, 그 힘이 자기 삶을 자율적 원리에 입각해 긍정의 역사로 창조한다’는 굳건한 믿음 때문이다.

다만 만 레이가 사진을 찍고, 장 콕토가 글을 쓰고, 앤디 워홀이 일러스다만 만 레이가 사진을 찍고, 장 콕토가 글을 쓰고, 앤디 워홀이 일러스트를 그리고, 수전 손택이 여자의 삶에 대해 논했던 그때 그 시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제타바이트급 디지털 콘텐츠가 시시각각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까지 글과 이미지를 순식간에 전달하는 거대한 뉴스 매체로 활약하는 시대! <옥자>를 만든봉준호는 지난달 인터뷰 자리에서 “극장 개봉이건 넷플릭스 개봉이건 중요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는 어떤 매체에서도 가치를 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저널리즘의 상황은 좀 다른 것 같다. 스타 기자 출신인 언론학 교수 제네바 오버홀저는 “우리가 알던 저널리즘은 끝났다”고 말했다. 특히 <비욘드 뉴스>의 저자 미첼 스티븐스는 매체 환경의 변화에 따라저널리즘의 본질과 저널리스트의 역할도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일이 벌어지는지 전하는 기자가 아니라 진행되고 있는 것에 대해 현명한 관점을 제공해주는 능력 있는 저널리스트”의 존재가 절실해졌다는 것이다.

패션 잡지도 예외는 아닌지라, 그 존재 가치를 겨냥한 의구심이 난무한다. 해외 패션 잡지가 지난 100년 넘게 차곡차곡 만들어온 업적을 한국의 패션 잡지가 단 20년 만에 이뤄냈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더라도, ‘패션’과 ‘저널리즘’ 두 가지가 각각 충분히 성숙하기도 전에 ‘패션 저널리즘’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스스로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닥친 것이다. 사실 디지털의 파워는 속도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에 대한 접근 혹은 권한의 문제다. 인터넷과 SNS가 ‘모든 이들의 기자화’를 실현시킨 건 정보원, 취재원의 독점적 영역을 허물었기 때문일 텐데, 마찬가지로 패션 잡지 기자들의 가장 거대한 임무이자 권한이었던 컬렉션은 이제 누구든 안방극장에서 인터넷 생방송으로 참관할 수 있게 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잘 팔리던 소재인 여행, 취향, 정보 위주의 기사는 앞서가는 독자에게 소구하지 못하고, 압도적 스케일의 자본의 미학을 전면에 내세우는 행위 역시 구태의연하다.

미첼 스티븐스는 “대부분의 뉴스가 발생과 동시에 퍼지는” 현시대에는 다름 아닌 ‘지혜의 저널리즘’이 필요하다고 피력한다. ‘빛나는 지적 특종’이라 표현한, 일종의 진화된 저널리즘. 그는 전통적으로 통용되어온 육하원칙의 5W,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왜(Why)를 다음과 같은 5I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교양 있고(Informed), 지적이며(Intelligent), 흥미롭고(Interesting), 통찰력 있으며(Insightful), 해석적인(Interpretive). 내가 사는 세상을 내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글(혹은) 기사라는 건 정보나 뉴스를 나열할 때보다 훨씬 많은 연구와 지성, 분별력과 독창성을 갖추어야 가능한 결과물이다. 이런 요소를 모두 충족시키는 훌륭한 글을 쓸 수만 있다면, 퓰리처상 따위와는 상관없이 나는 기꺼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겠다 싶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저널리즘의 진화된 강령이야말로 패션 잡지에 완벽하게 적용되기도 한다. 매번 매끄럽게 수행하진 못했을지언정, 표면으로 드러나는 크고 작은 사실 이면에 숨은 맥락을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는 건 패션 잡지가 늘 주지해온 방식이었다. 지금도 일부 전통 저널리스트들은 이런 ‘해석 저널리즘’을 두고 게으른 ‘엄지손가락 빨’라 비아냥거리지만, 속도전에 목숨 거는 매체가 무시하거나 지나치는 상황을 들추어 이야기하고, 같은 대상도 실눈을 뜨고 지켜보는 ‘우아한 관찰주의자’들이 바로 패션 잡지 기자들이다. 저널리스트에서 소설가로 변신한 톰 울프가 말한바, “앞으로의 저널리즘에는 더 많은 개성, 에너지, 활력, 기교가 필요하다”는 건 패션 잡지에서는 오래된 수칙이다. 무려 200년 전, ‘저널리즘의 혁신가’ 제임스 고든 베넷 1세가 전신의 등장과 함께 ‘단순한 저널리즘’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잡지 문학’이 생존할 거라 덧붙인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렇듯 저널리즘의 요건은 근대에서 현대로, 다시 첨단으로 옮겨오고 있는데, 태생적으로 이런 미덕을 갖춘 잡지는 왜 후퇴하고 있을까? 때마침 시대를 잘 만난 셈인데, 왜 잡지 저널리즘의 시대는 점점 저물어가는 것처럼 느껴질까? 그런 의미에서 “요즘 같은 시절에 패션 저널리즘이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는 후배들의 푸념에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만약 언젠가 잡지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그건 저널리즘이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저널리즘을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라고, 저널리즘을 지레 포기할 일이 아니라 더욱 야망 있고 현명한 저널리즘을 구현해야 한다고 말이다. 요즘 패션 잡지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제대로 대면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블랙 상의에 블랙 선글라스, 은발의 단발로 셀린 광고를 장식한 존 디디온(Joan Didion)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미국 <보그>의 피처 에디터로 활동한 그녀는 이후 최고의 논픽션 작가, 저널리스트, 소설가로 평생을 살았다. ‘소설처럼 읽히는 저널리즘’, 즉 뉴 저널리즘의 기수로 꼽히는 그녀는 늘 말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미디어다.” 언젠가 이 세계를 떠나더라도, 잡지가 기억해야 하는 진실이자, 영원히 내가 잡지를 존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이쯤 해서 창간 21주년를 맞이한 이번 뷰포인트는 존 디디온의 말을 실현하고자 하는, 패션 잡지 종사자의 자기반성인 동시에 자기 다짐임을 고백해야겠다. 화려한 욕망과 첨예한 시대정신이 뒤섞인 패션 잡지의 자기모순적 태도야말로 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확실한 키워드라는 점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통해서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뷰포인트’, 즉 ‘관점’이라는 칼럼명이 이달처럼 크게 와 닿은 적도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