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알코올 라이프

착상을 새롭게 전환시킬만한 것이 위스키 말고 뭐가 있을지 묻던 헤밍웨이가 듣는다면 기절초풍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가장 힙한 언더그라운드 문화는 ‘무알코올 소셜라이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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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밤에 술은 언제나 주연이었다. 2차로 맥주, 3차로 막걸리와 소주, 4차로 테킬라를 마시고 춤을 추다가 눈을 뜨면 아침인 나날이었다. 밤새 술집을 전전하다가 맞이하는 아침 해는 얼마나 눈이 부셨던가. 건강한 간을 굳게 신뢰하며 각종 술을 퍼부은 결과, 딱 30대 중반에 몸이 고장 났다. 온몸에 오돌토돌한 발진이 올라오고 견디기 힘든 가려움이 지속됐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피부과를 찾았더니 의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진단 결과를 말했다. “노화 현상이네요.” 그리고 무기징역에 가까운 선고를 내렸다. “술을 끊으십시오.”

뉴욕에 사는 내가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양의학은 효과가 없다며 한의원을 찾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무엇이든 먹어도 되는 체질입니다만 술은 안 됩니다. 끊으세요.” 그 말에 또 스트레스를 받은 나는 편의점에 들러 네 개 1만원인 맥주를 사 들고 친구 집을 찾아가 노화의 힘겨움을 하소연하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면 온몸이 극도로 가려워 진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다. 헤비 드링커 청춘이여, 안녕. 그제야 나는 슈퍼마켓에 맥주가 아닌 다른 음료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매장 길목마다 현재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탄산수 ‘라 크로이(La Croix)’가 탑처럼 쌓여 있다. 자연 향을 가미한 무칼로리 탄산수는 어떤 죄책감도 느낄 필요가 없는 깔끔한 맛이다. 설탕물 소다를 거부하는 뉴요커들의 건강 강박증 덕분에 페리에와 산펠레그리노가 이끌던 탄산수 마켓에 신제품이 쏟아지는 중이었고 나는 날마다 다른 맛의 탄산수를 마시며 맥주 탄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또 다른 선택지는 콤부차다. 발효로 인한 산미와 부드러운 탄산 때문에 콤부차는 ‘무알코올계의 샴페인’이라 불리는 음료다. <비밀의 숲>을 보며 필스너 맥주 한잔이 간절해질 때마다 탄산수와 콤부차가 내 곁을 지켰다.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이 멀쩡해지는 탄산수로 버티던 와중에 무알코올 요정을 만났다. 알고 보니 임신한 여자들이말로 무알코올 세계의 전문가들이었다. 임신한 친구가 권장하는 무알코올 투어는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뉴욕 소호에 오픈한 무알코올 칵테일 팝업 바 ‘더 드럭 스토어(The Drug Store)’에 앉아 레몬, 생강, 민들레 뿌리, 숯을 넣은 디톡스 칵테일을 마시거나, ‘노마드(Nomad)’ 호텔 바에 앉아 자몽과 패션 프루츠 탄산수에 바닐라 향을 첨가한 ‘파라다이스 시티’를 홀짝였다. 웬만한 와인 리스트보다 긴 티 리스트를 자랑하는 티하우스 ‘하니앤선스 (Harney&Sons)’의 여름 한정 아이스티와 트렌디한 주스 바에서 바로 섞어주는 요상한 주스가 우리의 알코올 대체 음료가 되었다.

또 다른 임산부 지인은 무알코올 맥주와 무알코올 와인을 추천했다. 맥주와 와인의 양조 공정을 거치지만 중간에 알코올을 제거하는 무알코올 맥주와 와인은 이보다 심심할 수 없는 맛의 음료다. 얼마나 맛이 별로냐면, 괜히 음주 시절의 알코올 노스탤지어만 부추기는 데다 걱정 없이 술 마시는 사람들을 ‘위너’라고 부러워하며 자괴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맛이다. 이토록 무알코올 술에 회의적이었던 나는 영국에서 건너온 무알코올 위스키 ‘시드립(Seedlip)’을 한 모금 맛보고 나서야 금주자로서 밝은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미국산 오크통에 여러 가지 스파이스를 각각 증류해 섞은 다음 숙성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무알코올 위스키인 시드립은 제법 드라이진의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사실, 맛보다는 대중적이지 않은 무알코올 음료의 진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 반해버렸다. 하이볼 술잔을 들고 있는 애주가에겐 시시할지 모르나, 무알코올 음료계는 꽤 엄청난 노력을 하며 진화 중이다. 술을 대체하는 음료는 해결된다 해도 술자리에 대한 갈증은 어떻게 해소할까? 놀랍게도 세상에는 술 마시는 자들의 거만한 눈빛에 연연하지 않고 무알코올 소셜라이징을 독자적인 문화로 만들고 있는 이들이 있다. 미국 곳곳을 순회하며 아침 크루즈 파티를 기획하는 ‘데이브레이커(Daybreaker)’ 집단은 자신들의 행보를 ‘이른 아침 댄스 무브먼트’라고 칭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춤을 추면 뇌에서 도파민, 세로토닌, 엔도르핀 등이 분비되어 더 행복해진다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맨 정신으로 춤을 추는 이 이벤트는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에서 시작되어 뉴욕,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홍콩, 도쿄를 지나 이제 서울에서 함께 춤출 사람을 모집 중이다. 한편,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된 도시 휴양 이벤트 ‘업리프트 프로젝트(Uplift Project)’는 주말 동안 힐링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티켓을 오픈할 때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매진된다. 주말 별장에 모인 사람들은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과 건강식을 먹고, 명상을 하고, 차를 마시고, 요가를 하고, 침묵 산책을 한다. 이벤트를 론칭한 자들의 취지는 아주 단순했다. “정상적으로 놀고 싶어서요.”

모두 함께 술에 취해 있는 도시의 풍경 아래선 ‘맨 정신’과 ‘정상’이 파격적인 행보가 된다. 건강상 이유로 술을 못 먹는 나 같은 사람을 비롯해, 보다 건강한 삶을 추구하려는 젊은이들이 무알코올을 새로운 트렌드로 제시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술로 푸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데다 후유증이 심하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챈 자들이다. 게다가 취중진담에 회의를 느끼고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타인과 소통하는 것을 추구한다. 술을 안 마시는 소셜라이징이 힙한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되어버리다니, 정말이지, 21세기의 삶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나의 도시는 이렇지 않아’라며 고개를 흔들 법한 건강한 세상이다. 이런, 갑자기 술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