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마이드는 살아 있다

추억의 아이템이 아니다. 브로마이드는 건재하다. 대량 복제된 현대인의 초상화, 브로마이드가 지닌 고유하고 영원한 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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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마이드를 샀더니 화장품을 주네요.” 요즘 브로마이드의 위상을 말해주는 단적인 문장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아이돌(정확히는 워너원) 브로마이드를 받으려고 구매한 화장품, 과자, 맥주 따위를 수북이 쌓아놓고 찍은 사진이 수시로 올라온다. 내 기억이 맞다면 지금으로 부터 한 달 전, 한반도에는 벼락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날은 1만원 이상 이니스프리 제품 구매시 워너원 브로마이드를 증정하는 이벤트 첫날이었다. 화장품 매장 앞에는 꼭두새벽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이날 SNS에는 브로마이드를 구하려는 자, 브로마이드를 판매하는 자들의 실시간 후기가 쏟아 졌는데 간절함, 동지 의식, 환희 등이 범벅이 되어 웬만한 리얼리티 예능보다 흥미진진했다. 유통업계는 브로마이드를 풀며 반짝 ‘워너원 특수’를 누리는 중인데, 과자 프로모션 때는 마트가 초토화되었고, 맥주 프로모션 때는 숱한 팬들이 취해서 귀가했다(랜덤 증 정이라 원하는 멤버가 나올 때까지 마셔야 했다). 브로마이드의 친정 같은 잡지사도 오랜만에 장기를 펼쳐보였다. 지난 8월호에 <프로듀스 101 시즌 2> 참가자 화보를 실었던 매체 중 가장 먼저 품절된 잡지는 브로마이드를 제공한 매체였다.

“다 상술이지, 뭐. 끼워 팔기!” H.O.T.부터 EXO까지 20년 넘게 팬으로 살아온 지인 P는 전혀 새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로드숍 화장품 브랜드가 남자 아이돌을 모델로 내세우는 이유이고 등신대, 포토카드, 부채 등 갖가지 굿즈 증정 행사가 있을 때마다 팬들이 몰려와 매출을 올려주는 일은 일상이라는 것. 워너원의 경우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그룹이기 때문에 팬층이 넓어 이들의 ‘브로마이드 구하기’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게다가 데뷔 후 첫 브로마이드였다. ‘일코’를 위해 한동안 일반 디자인 상품 같은 굿즈가 인기를 끌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 브로마이드 대란은 확실히 초보 팬들의 천진한 구석이 드러났다.

“지관통에 넣고 안 보더라도 꼭 있어야 해요. 브로마이드가 있어야 앨범이 완벽해지는 느낌이 있어요. 존재를 몰랐으면 상관없는데 알고도 못 가지면, 고등어 회 먹으러 갔는데 눈앞에서 오늘의 고등어가 다 떨어진 기분이에요.” 방탄소년단의 고릿적 팬인 후배 K의 수줍은 비유는 팬덤 문화에서 브로마이드가 가지는 위치를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팬질의 시작과 끝. 하지만 이런 위치 때문에 브로마이드는 오랫동안 팬심의 발현 정도로 여겨져왔다. 음악 평론가 김윤하는 브로마이드의 가치를 묻는 질문에 “앨범의 세계관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가장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라는 답변을 들려줬다. 최종적으로 브로마이드로 선택되는 컷은 A컷 중에서도 A컷이다. 광고라면 광고대로, 앨범 브로마이드라면 또 그 목적에 맞게 뽑아낸 ‘정수’다. 인물의 성격, 외모상 장점, 하는 일의 성격… 모든 걸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해낸 브로마이드는 영화 포스터나 광고 카피가 갖는 대표성만큼이나 상징적이다.

‘스타’라는 존재 때문에 브로마이드가 등장한 것 같지만 대중문화가 발달하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왕의 초상화를 벽에 걸었다고 전해진다. 홍선표의 저서 <근대의 첫 경험>에 따르면 1890년대에 일반인들이 귀인 이나 명인의 초상 사진을 수집했다고 한다. 특히 황제의 어진이 큰 인기여서 <그리스도신문>은 1년 이상 정기 구독자에게 고종의 어진을 석판으로 복제해 증정 했다. 1910년대에는 안중근 의사의 초상 사진이 인기였다는 자료도 있다. 고종 황제와 안중근 의사는 당시의 브로마이드 스타였던 셈이다. 선망과 애정의 대상을 일상에서 보고 싶은 마음. 조상님과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어진과 브로마이드를 걸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기에 10대의 방은 항시 브로마이드로 둘러싸여 있다. 영화 <몽상가 들>에서 테오의 방도, 그래픽 노블 <담요>에서 크레이 그가 그림을 그렸던 레이나의 방에도 브로마이드가 가득 붙어 있었다. 인물에 대한 어떤 기억은 브로마이드가 남긴 잔상이 대신한다. 지인 K는 10여 년째 천장과 현관문에 아이돌 브로마이드를 붙이고 있는데, 잠들기 직전까지 좋아하는 것을 보고 싶고, 출근할 때마다 ‘(널 더 많이 보기 위해) 돈 벌어볼게’라는 다짐을 건네기 위해서라고 했다.

브로마이드는 사이즈로 인해 더욱 특별해진다. 몇 년 전 동물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멜린다 부(Melinda Buie)를 인터뷰한 적 있었는데 그녀는 이런 얘길 들려줬다. “어릴 때 본 소는 정말 거대했어요. 아마 실제보다 열 배 이상 크게 느꼈을 거예요. 그 느낌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큰 그림은 대담하고 직접적이고 예뻐요. 그리고 한눈에 발걸음을 멈추게 하죠.” 그녀는 동물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그리는데 그림이 주는 미적 압도감이 대단하다. 피로시카 도시의 저서 <이 그 림은 왜 비쌀까>에는 초대형 크기는 사진에 회화와 동등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효과를 부여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사진은 유일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림보다 희소가치가 떨어지지만 누구나 원하는 사이즈의 사 진을 가질 수도 없다. 브로마이드 제작 업체가 성행하고 있지만 고해상 파일을 구하는 과정은 쉽지 않기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브로마이드가 필요하다.

브로마이드가 지닌 ‘한정판’이라는 성격도 브로마이드의 존재 가치를 높인다. 세상에 새우깡처럼 언제 어디서나 살 수 있는 브로마이드는 없다. 인쇄물이기 때문에 ‘소진시’ ‘선착순’ 같은 조건을 달고 있고 돈이 많이 드는 건 아니지만 타이밍과 노력에 좌우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얻는 과정이 고생스러울수록 브로마이드의 가치는 치솟는다. 김윤하는 브로마이드를 사는 행위를 LP나 카세트테이프를 다시 찾는 마음과 비슷하다고도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소장 욕구죠.”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이나 아무데서나 울려 퍼지는 스타의 노래를 자신의 것으로 느끼긴 힘들다. 내 공간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어야, 적어도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어야 마음을 나누는 관계가 된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포스터 온리>전이나 전주국제 영화제의 <100 Films, 100 Posters>가 몇 년째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 아닐까요.” 물성에 대한 욕구는 주춤할 순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애정하는 대상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 내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으로의 초대, 애정하는 대상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실물 크기로 바라볼 때 가슴에 이는 감동. 대량 복제되었을지라도 21세기 초상화인 브로마이드가 지닌 힘은 고유하고 영원하다. 오늘도 누군가는 브로마이드를 샀더니 운동화가 따라왔다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