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 상

술 한 상 제대로 받는 호쾌함이 여전한 여행.

“술 한 상 내 온다”는 표현은 지긋한 어르신들이나 건넬 법한, 혹은 사극이나 수십 년 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어울리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곳들에 가면 예의 그 ‘술 한 상’을 받아 보는 이채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거금을 들여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한정식이 아닌, 누구나 오가며 들러 그 드문 대접을 받고 호기롭게 술 잔 기울일 수 있는 곳. 뭔가 풍성해야 제격일 듯한 가을에 딱 어울리는 그런 술 맛 나는 여행이 될 것이다.

 

막걸리 한 주전자에 빼곡해진 안주 접시, 전주 막걸리

전주는 한옥 마을로 대표되는 그 고즈넉한 정취에 반해 찾기도 하지만 사실 이 오랜 도시가 자랑하는 다양한 먹거리에 홀려 찾게 된다. 맛도 그렇지만 음식이 나오는 방식이나 조리법이 여느 여행지에서 만나기 힘든 것들이 많다. 그 가운데 전주 막걸리는 술 맛 자체가 뛰어나서라기 보다 그 술이 나오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아서이다.

우선 한옥마을 주변, 풍남문 지척의 남부 시장 안이나 전주 시내 여러 곳에서 이 ‘전주 막걸리’를 내는 집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자리에 앉으면 손님 수에 따라 막걸리 주문이 ‘알아서’ 들어간다. 주전자 하나에 대략 3병이 담겨 나오는데, 가격이 2만 원 정도로 여느 술집의 막걸리에 비하면 비싸다. 그 이유는 그 다음 테이블 위에서 설명된다. 하나씩 둘씩 안주 접시들이 상을 채우기 시작하더니 금세 상을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접시 위에 포개진다(이 때 괜히 교통정리 한답시고 접시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김치 콩나물국, 전류, 찐홍합, 조기조림, 꼬막, 묵, 과일, 소라, 돼지 머릿고기, 문어, 홍어가 차려지고, 계절에 따라 구성은 약간씩 달라지지만 대충 세어봐도 20여 가지는 쉽게 넘긴다.

안주 값은 따로 받지 않는다. 물론 서너 가지 별도의 안주를 준비하고는 있는데, 굳이 따로 시킬 필요는 없다. 안주의 구성은 탄력적이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더 주문하면 안주의 종류와 수준이 올라간다. 재료가 떨어지지 않고 넉살만 좋으면 안주 리필도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젓가락 한 번 스치지 않은 채 놔두고 나오는 안주가 있을 만큼 푸짐함과 다양함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지간한 전주의 막걸리집은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 서두르지 않으면 엉덩이 붙이기 힘들다.

 

질리도록 해산물 안주를 즐길 수 있는, 통영 다찌

술 한 상 차림의 진수를 만나는 또 다른 곳은 경남 통영이다. 이곳에는 꽤나 오래된 술 문화인 ‘다찌’가 있다. 다찌가 어디서 시작된 말인지는 그 유래가 명확하지는 않다. 그나마 ‘다찌노미(立飮み)’, 즉 서서 마시기에서 앞 글자만 따 왔다는 해석이 힘을 얻는다. 바삐 배를 타고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테이블에 서서 술 한 잔 마시고 주인이 알아서 내 주는 안주 한 점 입에 털어 넣었다는 식이다.

그런데 실제 ‘다찌집’에서 나오는 술과 안주를 보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의아스럽기 짝이 없다. 일단 사람 수에 따라 상차림의 규모가 이미 정해진다. 예외는 없다. 일행 중 술을 마시지 않는 이가 섞여도 그는 ‘인두세’를 내야 한다. 그래도 그 인두세는 고스란히 진귀한 안주로 되돌아 오니 서러워할 일은 아니다. 원래 통영식 다찌문화는 술만 주문하면 안주가 딸려 나와 한 상 가득 차려지는 식이었다. 요즘 가격으로 따지면 소주 한 병에 1만원 정도이다. 지금은 2인상 혹은 3인상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술이 추가되면 옛날 식으로 한 병 당 1만원 정도씩을 더 받는다.

이곳 역시 관건은 안주이다. 술값이 비싼 데는 상 위에 가득 부려지는 안주가 그 값어치를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여러 활어회가 구이나 찜, 회, 볶음으로, 게와 새우, 갯가재, 제철 조개 등 갑각류나 어패류 역시 찜이나 구이로 상의 빈틈이 보일라 속속 채워진다. 여느 횟집에서 주문한다면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을 법하지만 이런 상차림을 매일 손님들에게 한꺼번에 한다면 단가는 떨어질 것이다. 믿음직한 건 정해진 안주 없이 그날그날 물 좋은 해산물로 장을 봐서 음식을 장만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들렀을 때 요즘은 구경도 하기 힘든 털게가 상에 올라 일행들의 탄성을 뽑아 내기도 했다.

이곳도 전주 막걸리집처럼 술이 추가하면 안주의 수준과 종류가 점점 ‘업그레이드’된다. 그 기대감에, 플라스틱 물통에 술이 얼음 가득 채워져 나오는 모습도 재미있어 한 잔 두 잔 기울이다 보면 술병이 늘어가는 마법에 취하는 그런 곳이 통영 다찌집이다.

 

통 크게 한 상 차려 먹는 바닷가 술 문화, 마산 통술집

통영과 머지 않은 마산(지금은 창원이라는 행정명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마산 사람들에게는 ‘마산’이다)의 어시장 가까이나 역시 바다가 지척인 신마산 등에는 다찌집과 비슷한 ‘통술집’이 나름의 술 문화를 만들어 왔다. 이곳 역시 술을 주문하면, 혹은 가게에 따라서 인원 수에 맞춰 술이 나오면 알아서 셀 수 없이 많은 안주가 차려지는 술 문화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통영과 다름 없이 해산물을 주 재료로 하지만, 조금 더 도시적인 손길이 가미되었다고나 할까? 찜과 회, 조림, 구이에 더해 전, 볶음 등 보다 더 다양한 재료와 조리법으로 맛은 풍성해진다.

마산의 통술은 일제강점기때부터 이 고장에 정착한 술 문화라고 한다. 일설에는 통영의 다찌집에 한 상 차림을 전수한 것도 마산이라고도 한다. ‘통술’은 말 그대로 통에 술을 담아 팔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바닷가 사람들의 통 큰 술 기세에 딱 어울리는 음주법이다.

통영과 마산에서 이렇듯 진귀한 해산물로 알아서 한 상 떡 하니 차려 나오는 술 문화가 자리잡은 데는 아무래도 이 지역들의 옛 정서와 산업 구조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배에서 막 내려 수중에 제법 돈도 생긴 뱃사람들의 호기로움에 자잘하게 안주를 고르고 주문하는 일은 성이 차지 않았다. 그냥 “술이나 한 상 내 주소”라고 말 한마디면 모든 걸 알아서 해 주길 바랐을 터이고, 어지간히 싱싱하거나 귀하지 않은 안주는 그들을 만족시키기 힘들었을 터였다. 마산은 그 뒤 수출자유지역이 조성되면서 더 많은 돈이 돌았던 곳이니 이런 한 상 술 문화는 누구나 즐기게 되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통술집들이 꽤 밀집한 ‘통술 거리’가 신마산, 합포구 두월동 일대에 조성되어 있다. 해산물을 즐기는 술꾼이라면 마산행을 결정할 충분한 이유를 경험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