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모델이 ‘슈퍼모델’이라는 왕관을 쓰기란 더 어려워진 시대가 됐다. 디자이너는 모델보다 인플루언서를 찾고, 팝 스타가 패션지 커버를 장식한다. 그나마 켄달 제너처럼 유명한 가족을 두거나, 지지 하디드처럼 수천만 명의 팔로어를 대동해야 ‘슈퍼’라는 타이틀을 손에 쥘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때로 이 모든 장애를 뛰어넘는 매력을 지닌 모델이 등장하곤 한다. 패션지 표지와 유명 브랜드의 광고, 일류 런웨이 등을 모두 섭렵한 2017년의 모델 말이다. 지금 그 행운을 손에 쥔 아가씨는 이태리 북부의 작은 마을 브레시아(Brescia) 출신의 비토리아 체레티(Vittoria Ceretti)다.

지금 패션계의 얼굴이 비토리아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 우선 그녀는 지난 3월 미국 <보그>에 이어, 5월 프랑스, 4월과 9월 일본, 9월 이태리 <보그> 커버에 연이어 등장했다. 또 베르사체와 랑방의 가을 광고에 출연했으며, 샤넬과는 새로운 뷰티 광고 계약을 맺었고, 스티븐 마이젤이 촬영한 티파니의 새 향수 광고도 곧 공개될 예정이다. 게다가 중요한 쇼에 오르는 기회 역시 놓치지 않았다. 지난 7월 꾸뛰르 기간에는 디올과 샤넬 등의 런웨이는 물론 프로엔자 스쿨러 런웨이도 밟았다.

“이 모든 것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긴 해요.” 지난 7월 뉴욕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만난 비토리아가 1년간 스스로의 활동을 돌이켜보며 말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학교 생활과 모델 일을 동시에 하느라 정신없이 달리기만 했어요.” <보그 코리아> 10월호 표지 촬영을 앞둔 그녀는 고교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절친(모델 야스민을 포함한)’들과 함께 마이애미로 여행을 다녀왔다. 살짝 그을린 피부를 매만지며 비토리아가 덧붙였다. “정말 정신없이 놀았어요. 올여름의 예고편이라고 할까요?”

아직까지 친구들과 노는 게 그저 즐거울 나이지만, 비토리아는 아주 현명하게 모델 일에 임하고 있다. “늘 친구들과 가족이 도전해보라고 했어요. 열네 살이 되던 해 여름, 모델 콘테스트 광고를 보고 마음먹었죠.” 그리하여 다소 어린 나이에 밀라노와 런던,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모델 일을 시작했다. “사실 저는 한국에 간 적도 있어요! 화장품 광고를 찍으러 갔는데, 일정이 너무 짧아 아무 기억이 없어요.” 이태리 억양을 찾을 수 없는 빼어난 영어 실력으로 모델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비토리아는 무척 성숙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생각 못했어요. 하지만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경험은 쉽게 가질 수 없는 법이죠.”

비토리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좀더 우아한 시절의 이태리 미인들이 떠오른다. 안토니오니 영화 <정사> 속 모니카 비티 혹은 펠리니의 <8과 1/2> 속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를 비롯한 이태리 영화 황금시대의 히로인들 말이다. 특히 하트형 이마 선과 짙은 눈썹, 그윽한 눈매는 그녀만의 매력이다. 아니나 다를까, 돌체앤가바나가 맨 먼저 비토리아를 발견하고 브랜드의 ‘익스클루시브’ 모델로 점찍은 것도 이런 이태리 고유의 아름다움 덕분이다. 그런면에서 비토리아는 한동안 맥이 끊긴 이태리 출신 슈퍼모델의 후계자로 손꼽힐 만하다. 이사벨라 로셀리니, 카를라 브루니, 마리아칼라 보스코노를 이을 매혹의 세뇨리타 말이다.

<보그>는 바로 그런 비토리아의 다채로운 매력을 담고 싶었다. 클래식한 아름다움은 물론, 성숙하고 농염한 여인, 그리고 환상적인 패션 아이콘으로서의 모습까지. 그 시작은 순수함이었다. 거의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비토리아가 프라다의 파란색 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사진가 강혜원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자 르네상스 시대 초상화 속 여인을 떠올리게 했다. 곧 스태프 중 누군가가 “올리비아 핫세를 닮았어!”라고 소리쳤다. 재빠르게 아이폰으로 이미지를 검색한 비토리아는 곧 “어떤 면에선 닮았군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싶었는데, 좀더 길러야겠어요”라고 답했다.

비토리아의 뛰어난 집중력과 손 빠른 스태프의 솜씨 덕분에 촬영은 물 흐르듯 진행됐다. 우리는 비토리아 머리에 ‘헤어피스’를 붙였다가 떼었고, 잔뜩 볼륨을 줬다가, 모조리 물에 적시기도 했다. 또 눈두덩에 파란색 아이섀도를 더하고, 입술에 짙은 붉은색을 바르는가 하면, 아이라인을 까맣게 칠했다. 무엇보다 비토리아는 이 모든 걸 편하게 즐기는 듯했다. “맘껏 변신할 수 있어서 즐거워요. 하지만 여전히 ‘저’일 수 있어서 좋아요.” 마지막으로 모든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적신 채 촬영이 끝나자 그녀가 외쳤다. “브라보! 정말 즐거웠어요.” 환하게 웃던 그녀는 한국 스태프가 가르쳐준 손가락 하트를 연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토리아가 표지에 등장하는 10월호를 준비할 즈음, 다시 한번 그녀에게 연락을 건넸다. “이번 여름은 정말 즐거웠어요. 유럽에 있는 네 개의 섬에서 휴가를 즐겼어요.” 지중해에 자리한 섬에서 신나게 여름을 즐긴 그녀는 가을이 왔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운 듯했다. 학교를 졸업한 지금, 여름 동안 미래를 계획해보기도 했을까? “아직은 일에 집중하고 싶어요. 어쩌면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할지도 모르지만요.” 당장 다음 주에 어느 도시에 있을지도 모르는 지금,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쉽진 않다. “10년 뒤 제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 못하겠어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