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To Wear

무명처럼 소박하지만 우아하고 아름다운 디자이너 문광자의 50년.

쪽빛으로 염색한 무명 코트. 드맹의 상징적인 의상 중 하나다. 안에 입은 튤 스커트와 플랫한 메리 제인 슈즈는 레페토(Repetto).

쪽빛으로 염색한 무명 코트. 드맹의 상징적인 의상 중 하나다.
안에 입은 튤 스커트와 플랫한 메리 제인 슈즈는 레페토(Repetto).

<보그> 오디언스에게 ‘아트 투 웨어’라는 표현은 낯설지 않다. 패션학과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진행해온 졸업 작품 전시명이었으니 말이다. 이 표현은 1960년대 미국 예술 운동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 예술과 패션을 결합한 예술의상이라는 뜻으로, 몸을 매개체로 신체를 감싸는 3차원 예술이라고 정의된다. 이미 당신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이미지가 부유할 것이다. 전위적인 작업으로 유명한 디자이너들, 원단으로 만든 거대한 조각 작품을 몸 위에 얹고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는 런웨이 모델, 결코 입을 수 없을 것 같은 옷차림으로 카메라를 모으는 거리의 패셔니스타 그리고 패션이 예술이냐 아니냐에 대한 패션계의 해묵은 주제.

“그들의 세계를 존중합니다. 하나의 미술품으로 값어치가 있을 수 있죠. 그렇지만 옷은 사람이 입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제 기본 철학입니다.” 디자이너 문광자는 테이블 위에서 손을 거두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아래쪽을 짧게 깎아 올린 머리는 흰색과 회색 아크릴 물감의 거친 붓 터치를 연상케 했다. 이번 인터뷰의 촬영을 위해 갈아입은 보라색 무명 코트에서 청명한 느낌이 났다. 풀 먹인 칼라 위에는 바로크 진주 몸통의 박쥐 브로치가 정교한 날개를 펼치고 있다. 올해로 패션 인생 50주년을 맞은 그녀는 작품
성을 지닌 옷을 만드는 것과 작품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것의 차이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중이다. “기본을 지키면서 얼마든지 좋은 옷을 만들 수 있어요. 그걸 무시하는 건…” 그리고 다소 충격적이라는듯 힘주어 말을 이었다. “불쾌합니다.”

문광자는 늘 한국 패션계의 주류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광주를 기반으로 활동했고, 상업적 성공을 추구하기보다 맞춤옷 방식의 소량 생산을 고집해왔다. 2000년대 초 뉴욕 아트 웨어 신의 대표 주자 줄리 셰플러 데일(Julie Schafler Dale)의 갤러리에서 그녀의 레이블 ‘드맹(Demain, 프랑스어로 내일이라는 뜻)’ 옷을 판매한 후부터는 오뜨 꾸뛰르를 넘어서 희소성 높은 의상 제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광자의 아트 웨어는 예술가의 관점에서 옷에 접근하기보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실험 정신과 장인 정신으로 접근한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실제로도 의복의 정체성과 실용성에 엄격한 드맹 의상에 대해 예술품이라기보다 소박하고 기품 있는 옷이라는 인상이 강한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처럼 재킷위에 그은 비대칭 포켓, 다트를 오려내는 대신 안으로 고이 접어 넣어 입체감을 표현하는 방식, 원단을 풍부하게 사용해 둥실 떠오를 듯한 조형미를 드러낸 실루엣은 우아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수준 높은 고객과 전문가들의 눈길을 사로잡아왔다.

드맹의 디자이너 문광자가 무명의 원료인 목화 가지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드맹의 디자이너 문광자가 무명의 원료인 목화 가지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광주에서 드맹을 시작한 후 50년이 지났지만 서울에는 여전히 청담동 매장 한 곳뿐이라는 사실 또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동안 기성복과 해외 진출도 시도해봤고 광주 지역 백화점에 입점해 성공 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 서울 유명 백화점에서도 입점 요청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상업적 시도는 늘 원점으로 돌아갔다(백화점의 맹목적 이윤 추구 위주 시스템, 타 브랜드의 공공연한 카피는 고질적인 문제). 지금의 소규모 운영 방식은 디자이너가 퀄리티를 양보하지 않은 대가다. “그건 저도 어쩔 수 없답니다.” 문광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꽃이 만개하듯 그녀의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만 하죠. 게다가 마음에 들거나 꼭 써보고 싶은 원단은 아무리 비싸도 일단 사고 봅니다. 그래서 수익이 나지를 않아요!” 함께 드맹을 이끌고 있는 문광자의 딸 이에스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떤 면에서 드맹의 사업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비즈니스죠. 우리는 어머니의 작업 방식과 상업성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모녀는 타임머신을 타고 2017년에 떨어진 산업혁명 이전 시대의 시민처럼 토로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똑같은 옷을 입을 수가 있죠?” “우리 옷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입는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어색해요.” “근본적으로 똑같은 옷을 1,000벌씩 만들어서 뿌린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발상 아닌가요?” 등등.

이런 대화는 문광자가 강조하는 ‘하이패션 디자이너가 갖춰야 할 자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결코 대중적인 옷을 평가절하하거나 그 필요성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이건 그저 다른 이야기일 뿐이다. 한 명을 위한 맞춤복은 온전히 그 한 명에게 맞춰져야 하고, 그녀는 그 한 벌의 옷에 아이디어와 노력, 희소성을 담는 데 집중한다. 이런 가치관과 작업 방식은 그녀가 결혼 직후 광주 가정집에서 수많은 상류층 고객을 상대하던 시절부터 쌓아온 것이다. 23세 때 광주 YWCA 건물에서 드맹을 시작한 문광자는 26세에 결혼하고 둘째가 태어나자 자신의 집에서 드맹을 이어갔다. ‘드맹안집’ 혹은 살‘ 롱 드맹’이라고 불렸던 74평 집에는 늘 다양한 원단이 전시돼 있었고, 네 명이 한 팀으로 이뤄진 재봉사 네 팀이 상주했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어린 에스더는 섬돌 위 가지런히 놓인 신발을 보고 누가 왔는지 알아맞히곤 했다. 손님들은 옷을 맞추고 가봉을 하고 며칠 뒤 옷을 찾아갔고, 문광자는 새벽까지 모든 옷의 패턴을 직접 떴다(“다음 날 아침에 재봉팀이 출근해서 바느질을 하려면 그 전에 패턴 작업을 마쳐야 했으니까요.”). 웨딩드레스 숍이 없던 시절이라 직접 만든 웨딩드레스도 수백 벌에 이르렀는데, 결혼식 후에 스커트만 벗고 바로 신혼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미니 드레스와 롱 스커트의 세퍼레이트로 만들기도 했다. 한번은 시댁에 보낼 옷과 결혼 후에 본인이 입을 사계절 옷까지 총 44벌을 한 번에 주문받은 적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많은 걸 배우고 익힌 시기였죠. 모두에게 다른 옷을 해주고 싶어서 같은 옷을 주문하면 안감이나 단추라도 꼭 다르게 하곤 했습니다.”

문광자가 수년에 걸쳐 모은 십자수 작품을 일일이 오려서 패치워크한 무명 드레스.

문광자가 수년에 걸쳐 모은 십자수 작품을 일일이 오려서 패치워크한 무명 드레스.

드맹 옷의 5~10%밖에 차지하지 않음에도 문광자의 상징이 된 무명옷은 의도치 않게 평균 가격대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그녀가 보유한 무명은 대략 1,000필 정도인데 사실상 무명 생산이 중단된 상태라 전부 빈티지 원단이기 때문이다. 양주와 곡성에서 목화 재배를 시도하고 있지만 예전에 생산되던 것만큼 질 좋은 무명 원단을 직조할 수 있을지, 그리고 직조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목화 재배는 노동 집약적이고 아주 고된 일이죠. 점점 공급이 줄어드는 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원단이 된다면 정말 좋을 거예요.” 문광자는 무명 특유의 질박함, 손으로 직조한 원단의 수공예적인 매력에 매료돼 있다. 1992년, 한광석 기능장을 만나면서 처음 무명을 접하게 됐고 두 ‘마스터’는 함께 작업을 하면서 오방색을 넘어선 다채로운 빛깔로 무명 염색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녀는 매장 한쪽 옷걸이에 걸려 있던 무명 의상 중 검은색의 비대칭 칼라 코트를 입어보라고 권했다. 여름용 원단이라는 인식과 달리 적당한 무게감이 기분 좋게 어깨를 감쌌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천은 아래쪽으로 갈수록 충분한 볼륨감을 만들어서 마치 꽃봉오리를 뒤집어놓은 듯 보였다.

잠시 후 에스더가 아름다운 쪽빛 오페라 코트를 입고 등장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쪽 염색의 뿌연 남색이 아니라 아주 깊고 짙으면서도 눈이 시원해지는 순도 높은 푸른색이다.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가 물려받은 고 다이애나 비의 사파이어 약혼반지 같은 푸른색. 아마 문광자와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온 천연염 색장인 한광석의 솜씨일 거다. 빙그르르 돌자 아랫단이 우산처럼 넓게 퍼졌다. 플레어 헴라인은 폭이 고작 33cm인 무명 원단을 솜씨 좋게 재단한 것이다. “크리스찬 디올의 스윙 코트 같아요!”

먹과 숯가루로 염색한 무명 드레스 위에 대나무 십자수를 패치워크했다.

먹과 숯가루로 염색한 무명 드레스 위에 대나무 십자수를 패치워크했다.

한국현대의상박물관에는 문광자의 의상 50여 점이 보관돼 있다. 그중에는 30년 된 고객이 매년 잘 손질해서 보관하다가 기증한 옷 일곱 벌도 포함된다. “요즘 젊은 한국 디자이너들은 갈 곳을 잃었어요. 모두가 크게 성공해서 어마어마한 부를 쌓고 싶어 하죠. 그렇지만 그런 목표를 세운다고 해서 전부 이룰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화려한 전성기는 결코 평생 가지 않고요. 모두가 똑같은 길을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어머니인 디자이너 문광자처럼 그저 자신이 좋고 하고 싶은 것만 해도 괜찮다는 걸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풍족한 삶을 누리거나 많은 유산을 남길 정도로 어마어마하진 않지만, 열심히 일한 대가는 늘있었습니다.” 이에스더는 드맹이 소규모를 유지하면서 브랜드의 원형을 완성하는 단계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무리해서 브랜드를 키우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누군가는 디자이너가 손을 놓을 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문광자에게는 무명을 소재로 자신의 디자인 폭을 더 넓혀 드맹의 아카이브를 확장해야 할 때다. “역사 깊은 하우스에서 전통을 지키며 이어갈 수 있는 건 풍족하고 탄탄한 아카이브 덕분이니까요.” 에스더는 어머니에 이어 언젠가 자신의 딸과 함께 드맹을 운영하는 것에 대해 숙고하고 있다. 문광자 역시 각각 2004년과 2014년에 출간한 〈디자이너 문광자의 무명으로 만든 옷>Ⅰ, Ⅱ가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손녀에게 좋은 교과서가 되길 바란다. 그녀는 옷을 입는 사람은 그 옷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는 거라고 말했다. 그 인격적 만남은 최종적으로 그 옷을 만든 디자이너와의 교류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다시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진심으로 옷과 진지하게 마주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아요. 아직도 그 한 벌의 옷을 향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