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폴 맥카시는 ‘세상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가’와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포스트모더니스트’ 사이 어디쯤 존재할까? 답을 찾기 전 우선 그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야 했다.

폴 맥카시 고해상

폴 맥카시는 악명 높은 예술가다. 몇몇 작품만으로도 작가의 실체보다 이미지에 압도당하게 한다. 이를테면 난쟁이 의 머리를 한 입에 넣어버리는 머리 큰 백설 공주나 성교하는 것처럼 마구 뒤 엉킨 백설 공주와 난쟁이 혹은 밤비의 무리 같은 완성도 높은 조각 작품은 실로 당혹스럽다. 혹은 파리 방돔 광장에 설치된 항문 자위 기구 모양의 크리스마스트리나 로테르담의 유명 관광지에 그걸 든 채 우뚝 서있는 산타클로스 같은 공공 작품의 존재도 한몫했을 것이다. 결국 방돔 광장에 설치된 트리는 고고한 프랑스인들의 거센 반발은 물론 급기야 작품을 훼손하는 테 러를 당한 후 곧 작가의 결정에 의해 철거되었지만(“토론이 아니라 폭력이 일어나는 위험한 곳에 작품을 둘 수 없다”), 이 정도는 점잖은 편이다. 고약한 심미안을 자랑하는 그의 전시에서 이런 경고문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어린이들에겐 적합하지 않고, 도전적이라고 여길 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전시입니다” 혹은 “이 전시는 누드, 폭력, 노골적인 성인용 내용을 포함합니다”.

대체 이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그로테스크한 충격의 향연이었다. 오달리스크처럼 지나치게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백설 공주와 아주 지저분한 색정광 난쟁이들이 출현하거나, 실제 포르노 배우들이 뒤샹의 작품을 몸으로 재해석하거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최악의 미개인 ‘야후족’이어야 가능할 법한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폭력, 식욕, 섹스, 살인 이상의 온갖 디오니시안적인 것들로 점철 된 전시 중 특히 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였음에도 2주 만에 1만1,000 명의 관객을 모으며 그는 그해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명으로 꼽혔다. 불쾌하고 역겨운 제스처로 점철된 전시의 대대적인 성공이 그의 명성 혹은 악명에 어떤 보탬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분명한 건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동시에 원하는 것을 만듦으로써 혐오와 공포를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폴 맥카시가 ‘세상에서 가장 논쟁적인 예술가’와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동시대 예술가’ 사이의 어디쯤 위치할지 더욱 궁금해졌다는 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9월 14일부터 10월 29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그의 전시에는 경고문이 없다. 이를테면 욕망으로 터질 듯한 백설 공주 대신 덩그러니 두상(‘White Snow Head’)만 있고, 성기가 자라는 피노키오 대신 프란시스 피카비아의 작품 ‘여인과 우상’을 재해석한 ‘피카비아 아이돌 (Picabia Idol)’ 시리즈가 있다. 케첩으로 피 칠갑을 한 모습을 선보이는 대신 자신의 몸을 본뜬 조각을 잘라 만든 조각과 그림 ‘컷업(Cut up)’ 시리즈도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대중문화예술산업, 미디어 중심주의, 소비 제일주의, 서구 문화를 겨냥하기 위해 자신을 혹독히 비판하거나, 발기부전으로 무기력한 분노 상태의 남성성을 까발리거나, 바보들의 신념으로서의 향수를 자극하는 등의 충격요법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성적이고, 현학적인 방식이다.

LA에서 오래 활동해온 폴 맥카시는 자신이 할리우드 영향권에 있었음을 인정해왔는데, 특히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사용하는 ‘스핀오프’ 개념을 차용한 작품을 선보인다. 그의 사전에서 스핀오프란 어떤 프로젝트에서 파생된 또 다른 시리즈. 폴 맥카시의 설명에 따르면 백설 공주와 피카비아, 이 두 가지 스핀오프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가 이번 전시의 관전 포인트다. 재미있는 건 스핀오프가 ‘코어’ 작업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조각 과정에서 일종의 뼈대 역할을 하는 코어는 통상 완성된 조각 작품에서는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폴 맥카시는 잊히거나 버려지는 코어를 몰딩하고, 그 몰드를 다시 몰딩함으로써 결과와 과정의 의미를 전복시키고, 결국 조각의 안으로 들어가는 은유적 수사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탄생한 피카비아의 재해석 버전(‘Picabia Idol’), 이를 만든 코어(‘Picabia Idol Core’), 그리고 이 코어를 만든 코어(‘Picabia Idol Core Core’)는 같으면서도 같은 작품이 아니다. 한편 자신의 몸을 본떠 만든 모형을 다시 3D로 스캔한 후 모델링을 거쳐 우레탄 레진으로 제작하고, 이를 마구 절단해 붙여 만든 조각과 그림 ‘컷업’ 시리즈는 코어 시리즈와는 또 다른 과정의 적나라함을 선포한다. 폴 맥카시의 균열된(절단된) 몸으로 가득 찬 ‘컷업’은 B급 호러 영화 같기도, 비틀어진 자화상 같기도, 현대판 지옥도 같기도 한데, 어쨌든 과정 자체를 분열시킨 코어 시리즈 작품들과 절묘하게 연결된다.

화이트 큐브에 등장한 코어와 몰드의 존재는 ‘안과 밖’ ‘내면과 외면’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신화의 내면 구조’ 등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철학적인 화두를 던진다. 폴 맥카시는 60년대에 만든 ‘스컬 카드’의 예를 들어 설명했 다. “마스크처럼 두 개의 눈구멍이 뚫린 카드에 줄을 매달아 얼굴 높이로 걸었어요. 카드는 회전을 하는 동시에 내부도, 외부도 없죠. 관객들은 그 마스크처럼 생긴 카드에 얼굴을 대곤 했지요. 그걸 만들었을 때 나는 인지에 대 한 존재론적 경험을 하고, 예술계 밖을 보게 되었어요. 내부와 외부적 현상 혹은 외부적 현상을 내부적 이미지로 바꾸는 과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 죠. 그 후 ‘Dead H’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알파벳 H 모양의 조각이라 보 이지 않는 공간이 있었어요. 저는 이걸 미니멀리즘적 내적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파벳 H는 인간(Human)의 약자이며, 결국 그가 보이는 것이 면의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예술가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백설 공주가 중요한 작품이긴 하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영상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 회화인 것도 아니죠. 그 장치들은 꽤 실제적이고, 다른 작품과도 굉장히 연결되어 있어요. 이번 경우에는, 제 얼굴처럼, 저는 그걸 거의 클래식한 조각처럼 두었어요. 그러니까 동상만큼 개인적이고 고전적이예요. 여기엔 좀 이상한 극이 진행되고 있어요. 몸의 일부를 잃어가는 몸 따위의 것들, 인류가 행하는 폭력 그리고 요즘 세상의 인류애를 무의식적으로 반영하죠. 우리가 경험하는 폭력의 이미지 혹은 제가 개인으로 대표하는 이미지, 그리고 우리 모두 각자가 이런 폭력을 느끼고 있다는 게 중요해요. 이건 신화적인 이미지의 변화이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이런 것들이 반드시 결과로만 보이는 건 아니에요. 그들을 세상에 어떻게 보여줄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품들의 세계가 단순히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두고 봐야죠.”

이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나는 난교하는 작품을 봤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그동안 그를 상당히 잘못 알고 있거나, 아예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먼저 오해를 풀어야 했다. 오해가 이해로 변모하는 그 지점이야말로 이 거대한 작가의 진실에 한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K2 전시장에서는 폴 맥카시의 스핀오프 작품인 ‘White Snow Head’ 시리즈와 피카비아의 작품 ‘여인과 우상’을 재해석한 ‘Picabia Idol’ 시리즈를 선보인다. 이 두 가지 작품 시리즈는 모두 ‘코어’ 연작이다. 특히 피카비아 시리즈는 코어의 코어까지, 캐스팅의 과정을 단계별로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과정과 결과, 내부와 외부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더불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상징적으로 제시하며 그 진화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K2 전시장에서는 폴 맥카시의 스핀오프 작품인 ‘White Snow Head’ 시리즈와 피카비아의 작품 ‘여인과 우상’을 재해석한 ‘Picabia Idol’ 시리즈를 선보인다. 이 두 가지 작품 시리즈는 모두 ‘코어’ 연작이다. 특히 피카비아 시리즈는 코어의 코어까지, 캐스팅의 과정을 단계별로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과정과 결과, 내부와 외부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더불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상징적으로 제시하며 그 진화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폴 맥카시는 잘나가는 조각가다

사실이다. 소싯적 미술계는 이 위험한 남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쩔쩔맸지만, 요즘 그는 여느 현대미술가만 큼이나 바쁘다. 얼마 전에 들른 LA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에서는 고급 목재를 깎아 만든 백설 공주와 그녀의 친구들이 또 질펀하게 놀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열 개의 뫼비우스 띠가 오버랩되어 돌아가는 형국인 그의 작업 에서는 극히 일부다. “스튜디오에서는 언제나 많은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요. 이 순간도 서구와 미국 문화를 다룬 비디오 작업 ‘스테이지코치 (Stagecoach)’가 한창일 거예요.” 내가 본 게 맞다면 ‘스테이지코치’는 1939 년 존 웨인의 영화인 <역마차(Stagecoach)>를 그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영상인데, 여전히 누드와 폭력은 심리적, 물리적인 도전 의식을 불어넣었다.

어쨌든 그가 진짜 바쁜 이유는 정작 매체나 장르의 구분이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며, 덕분에 폴 맥카시의 작업 세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합적이다. 5년 전 기자 간담회에서 들은 그의 말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난쟁이 작업은 조각이지만 일종의 퍼포먼스이기도 합니다. 나는 과정을 행위 예술로 보는데 일단 내가 조각을 시작하여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과정이 많이 개입되고, 어떤 행위가 가해지죠. 조각이지만 행위 예술과 같은 퍼포먼스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1960년대 젊은 폴 맥카시는 백남준처럼 무대에서 가구를 부수는 퍼포 먼스를 선보이던 행위 예술가였다. 그는 가장 급진적인 아나키스트의 방식으로(이를테면 핫도그나 소고기에 성기를 끼우는 식) 자기 신체를 탐구했다. 자신과 세상을 예술의 재료로 쓴 셈인데, 그런 그가 80년대에 조각에 손을 댄 것도 몸의 확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각을 하기로 하면서 나는 몸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어요. 아주 현실적인 몸. 이를 위해서는 목 아래부터 무릎까지, 몰드를 만들어야 했지요. 그때부터 나는 다른 걸 위해 몰딩하는 게 아니라 몰드 자체를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30년 전의 일이다.

그는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다. “‘컷업’을 만들기 전에 나는 ‘Paul Cut Up’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건 영상 작품이에요. 내 몸을 캐스팅 한 ‘Life Cast’를 만들었고, 조각으로 만들어 잘랐죠. 그리고 ‘Life Cast’를 자르고 있는 나 자신의 영상을 찍었어요. 작품이 나의 물리적 존재와 너무 많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내 작업은 행위 예술적이에요. 내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도 한몫하죠. 지금 이 순간도 내 몸은 부패하고 있으니까요.”

 

폴 맥카시의 작품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이유나 시작이 어떻든 나는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어떻게 규정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뒤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조각의 형식과 관련했을 때, 어떤 조각이 각기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 때, 또 그것이 어떤 형상을 갖추고 있을 때 나는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요. 이 조각이 어떤 것에 대해 과감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더욱 그렇죠.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겁니다.” 폴 맥카시가 취한 극단적인 방식은 모든 미적인 것에 반대하는 행위처럼 보였다. 이를 통해 오히려 우리를 길들인 미적 기준이 무엇인지 재고하게 만든다. 그가 디즈니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디즈니 캐릭터를 변태성욕자로 만든 것도 신화화된 대중문화의 고압적인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기 위해서였고, 제프 쿤스의 마이클 잭슨 조각(잭슨과 그의 애완 침팬지를 바로크 양식으로 다룬)을 존중한다면서 기묘하고 앙상한 조각으로 풍자한 것도 클래식한 조각의 정의와 엄청난 값을 매긴 예술 산업에 ‘똥’을 던지기 위해서였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전혀 아름답지 않지만 왠지 아름다운 작품을 발견했다. “처음 나의 누드를 캐스팅한 ‘Life Cast’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어요. 거기에 바지 없이 셔츠만 입혔더니 좀 낫더군요. 그걸 긴 아웃도어 의자에 앉히고 ‘Dreaming’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그리고는 수염 없이 옷을 벗고 누운 몰드를 만들었어요. 내가 몇 년 동안 갖고 있던 검은색 문 위에. 그 작품 의 제목은 ‘Horizontal’이었죠. 그러니까 ‘Dreaming’에서 ‘Horizontal’로의 변화는 나의 죽음에 대한 이미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인 셈이에요.”

지난 2012년 폴 맥카시의 아홉 난쟁이가 점령했던 K3 전시장에서는 작가 자신의 몸의 향연이 펼쳐진다. 자신의 나신을 본떠 만든 도형을 절단하고 재배치해 만든 조각과 그림인 ‘컷업’ 시리즈. 지난 60~70년대 자신의 몸을 이용한 행위 예술가로 활발하게 활동한 폴 맥카시는 여전히 몸을 이용한 영상, 조각, 페인팅 등을 선보이고 있다. 몸을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연결 고리로 해석하며 예술의 소재로 활용해온 그의 작품 철학은 ‘컷업’ 시리즈에서 심리적인 측면을 건드린다.

지난 2012년 폴 맥카시의 아홉 난쟁이가 점령했던 K3 전시장에서는 작가 자신의 몸의 향연이 펼쳐진다. 자신의 나신을 본떠 만든 도형을 절단하고 재배치해 만든 조각과 그림인 ‘컷업’ 시리즈. 지난 60~70년대 자신의 몸을 이용한 행위 예술가로 활발하게 활동한 폴 맥카시는 여전히 몸을 이용한 영상, 조각, 페인팅 등을 선보이고 있다. 몸을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연결 고리로 해석하며 예술의 소재로 활용해온 그의 작품 철학은 ‘컷업’ 시리즈에서 심리적인 측면을 건드린다.

폴 맥카시의 작품은 잘 팔리지 않는다

얼마 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재단이 환경보호를 위한 경매를 열었는데, 그 중 폴 맥카시의 조각 ‘White Snow, Bambi’가 출품, 화제가 되었다.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가 지구를 살리자는 취지에 공감해 이 작품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패션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의 인스타그램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컬렉터이기도 한 그는 자기 집을 공개하며, 에드 루샤, 리처드 프린스, 게르하르트 리히터, 존 커린의 작 품과 함께 폴 맥카시의 작품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잘 팔리는 작품과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명확히 구분하며, 이번 전시가 그 일환인 셈이다.

폴 맥카시는 정치적인 작가가 아니다 폴 맥카시는 나의 에코 백이 마음에 든다며 껄껄거리며 웃었다. 고양이 네 마리 위에 ‘KITTENS AGAINST TRUMP’라 쓰인 J. 모리슨의 작품. 트럼프와 미국 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토론할 시간은 없었고, 그가 직접 정치 이슈를 발언한 적도 없었지만, 아메리 칸드림과 집단 트라우마 그리고 사회적 질병의 은유로서의 기괴한 우화를 다루는 맥카시의 비판 능력은 온갖 불쾌한 장면 이면에 깔린 중요한 전제다. “나는 인간의 조건을 질문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바로 정치적이라고 생각하죠. 우리가 만들어낸 실제(현실)가 이상하고,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직접 대면하는 것, 서구 문화가 어떻게 구성되어왔는지를 보는 것, 그 문화의 폭력성과 물질적 성장의 관계를 아는 것, 그 모든 것의 모순까지. 그리고 당신은 그 안에서 더욱 구체적인 정치적 요소를 봅니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지 혹은 인종차별과 여성 혐오 같은 문제. 내 작품의 일부는 그런 문제를 아주 구체적으로 다뤄요. 디즈니랜드 혹은 할리우드를 비판하는 식으로. 동시에 이는 나 스스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해요.”

영상 작품에서 폴 맥카시는 월트 디즈니를 연기하면서 이름을 월트 폴 (Walt Paul)로 바꾸었다. “내가 그 사람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거든요.” 그는 디즈니랜드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세계에 속해 있고, 서구 문화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내 안의 모순을 비판하기로 한 거예요. 이건 피하기 어려운 문제죠.”

폴 맥카시는 제정신이 아니다

폴 맥카시의 지난 도록에는 매그너스 아프 피터슨의 글 ‘폴 맥카시의 40년 작품 세계를 요약하고자 하는 시도’가 실려 있다 (요약이 아니라 요약하려는 ‘시도’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업 세계는 너무 심오하고 방대하다).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동정심이 강하고, 겸손하며, 박식하고, 꼼꼼할 뿐 아니라 학생들의 성장을 독려하는 스승이며, 그에게 영감을 주는 작가들에게 큰 찬사를 보내는 성공한 예술가다.” 다른 기사에서도 맥카시를 “자비롭고 진실한 사람”이라고 한다. 보통 작가론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인간 자체에 대한 언급은 사실 그의 작품이 얼마나 기괴한지 강조하는 동시에 ‘저돌적이고, 끔찍하고, 요란하여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작품과 그를 분리시킨다. 인간성을 알 도리는 없지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가 매우 진지한 예술가라는 사실이다.

이번 전시의 부제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양한 작품의 유기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건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이번 전시 작품은 이렇게 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저는 그 작품을 의도적으로 엮죠. 이번 전시가 저의 요즘 관심사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면에서 Endeavor(노력, 시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는 숨을 고른 후 덧붙였다. “아티스트의 무언가가 제가 생각하는 무언가와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요. 한 작품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 중요합니다. 연결된 작품은 우리가 작은 부분을 보게 만들고, 그렇게 믿게 합니다. 전체 작업 세계에 대한 아이디어는 제게 꽤 중요해요. 그리고 그것은 그 작품의 역사가 가진 잠재력과 아티스트들이 만든 네트워크로서의 예술로 나를 이끌어요. 나는 70년대, 미술을 네트워크라고 표현한 구타이 그룹 예술가의 말을 잊을 수 없어요. 그전까지 ‘Art’와 ‘Network’를 함께 쓴 걸 보지 못했습니다.”

뒤샹이 변기를 전시장에 갖다놓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술”이라고 선언했고, 요셉 보이스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징의 대상물”이라고 했다면, 폴 맥카시는 “세상의 모든 아이디어는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여전히 가능성과 생각이 곧 예술임을 믿어온 이 순정적인 73세 예술가와의 만남은, 그래서인지 자못 감동적인 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