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처방전

오늘도 요약본으로 책을 읽고, 클립 영상으로 TV를 감상했지만, 동시에 요약본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자랑한 자신을 반성했다. 사고의 종말에 대한 우려가 높은 가운데, 그럼에도 요약본이 가진 미덕을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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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가로 유명했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리더십 비서관’이라는 자리를 만든 적이 있다. 그에게는 리더십에 대한 자문 외에도 책, 칼럼, 논문 등을 읽고 요약해서 보고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하루에 한 번 책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하니, 리더십 비서관은 ‘독서 비서관’이었던 셈이다. 부러워하기엔 이르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대통령보다 훨씬 많은 독서 비서관을 두고 있다.

앱 블링키스트(Blinkist)를 알게 된 건, 전 세계에 ‘피케티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토마 피케티의 저서 <21세기 자본>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 책 구매자의 2.4%뿐이라는 아마존의 설문 조사 결과 덕분이다. 나머지 독자들은 800여 페이지 가운데 20여 페이지를 전후로 책장을 덮어버렸다고 한다. 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두꺼운 책의 흔한 운명. 블링키스트는 이런 인간미 흐르는 이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논픽션 베스트셀러를 선정, 간단하게 요약해주고 ‘누가 읽어야 할까?’ ‘누가 이 책을 썼는가?’를 함께 정리해서 제공하는 것. 휴대폰을 들여다볼 시간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한 오디오 파일도 있다. 투철하고 친절한 정신에 보답하듯 사용자는 100만 명에 이른다.

이 밖에도 순항 중인 책 요약 서비스는 여럿인데, 대체로 비슷한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다. 4분 만에 책의 핵심을 파악해드립니다(Four Minute Books), 30분만 투자하면 책 전체를 읽은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어드립니다(Over Drive) 같은 식. 카드뉴스 형식으로 책을 요약해주거나 그래픽과 같은 비주얼로 정리해주는 서비스도 있다. 처음부터 요약된 종이 책을 선택할 수도 있다. 구매할 때 마음과 달리 냄비 받침으로 사용하는 책의 제목을 아마존에서 입력해보라. ‘Summary of’로 시작하는 <사피엔스> <린 인>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정식으로 요약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보다 서평 블로거와 같은 개개인의 활약이 활발하다. 특히 요즘 눈에 띄는 이들은 북튜버(Book과 Youtuber의 합성어)다. ‘겨울서점’ 김겨울, ‘책읽찌라’ 이가희 등이 대표적이다. 유튜브 채널에서 구독할 수 있고, 교보문고 ‘북TV’ 코너와 ‘커넥츠북’으로 새 단장한 리브로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이들의 방송은 1~2시간에 걸쳐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북캐스트보다 짧고 간결하다. 초대 손님이 있거나 ‘휴가지에 가서 읽는 철학책’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처럼 주제가 있는 날도 있지만, 보통 책 한 권을 3~10분 사이로 요약해준다. 심야방송 DJ처럼 차분하고 목소리도 좋아서 라디오처럼 틀어놓거나 잠들기 전 ASMR 대용으로 듣기에도 좋다.

한편 올해 상반기 독서법 분야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른 책은 <1시간에 1권 퀀텀 독서법> <1만권 독서법>이었다. <1시간에 1권 퀀텀 독서법> 저자 김병완은 단호하게 묻는다. “언제까지 책을 한 자씩 읽을 것인가?” 그는 우뇌를 활용하고 무의식을 활성화하는 훈련을 통해 1시간에 한 권씩 읽는 독서법을 제안하고, <1만권 독서법> 저자 인나미 아쓰시는 많은 책을 읽어 ‘큰 덩어리’를 만드는 방향으로 독서법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주체만 바뀌었을 뿐, 핵심은 같다. 책이 두껍다면 혹은 내용이 너무 많다면 ‘요약하라’.

요약의 기술이 매끄럽게 안착한 분야는 사실 TV다. 방송사들이 제공하는, 혹은 팬들이 사심으로 제작한 ‘클립’은 정규 방송의 정수만 모아놓은 요약본이다. 클립은 TV를 보는 라이프스타일을 아예 바꿔놓았다. 지인들은 말하곤 한다. 이제 영상 클립으로만 TV를 보는 것 같다고. 시청자들은 1회를 본 뒤, 풀 버전으로 볼지, 클립으로 볼지 결정한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나는 어제 놓친 드라마 앞부분을 클립으로 챙겨봤고, 저녁에 잡혀 있는 배우의 인터뷰를 위해 16부작 드라마를 15분 요약본으로 감상했다. 지인 L은 영상 클립으로 공해 같던 콘텐츠로부터 자유를 찾았다. 그녀에게 요약본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으로만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편집할 수 있는 도구”다.

 

알고 있다.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지다 못해 휘몰아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요약본’을 보고 있지만, 이미 삭제된 부분에 대한 걱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행간이 보이지 않는 요약본은 오판과 오해를 부르고, 때로는 부작용도 따른다. 주변에서 한결같이 하는 얘기는 답답해서 더 이상 책 한 권, TV 프로그램 한 편을 온전히 보기 힘들다는 것. ‘하이라이트’만 보다 보니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리듬이 빨라졌다. 디테일을 보는 법을 잊은 것 같다는 고백도 있다. 미리 평가를 결정한 채 요약본을 보니 예상한 재미와 지식만 얻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약본만이 갖고 있는 미덕을 본다. 잘 만들어진 요약본은 원본 그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가령 재미있는 북튜버의 영상은 음악 듣기, 웹툰 보기와 동일하게 소비될 수 있다. 요약본은 선택에 부담감을 덜어주어 때로는 관심사를 넓게 확장시키는 데 일조한다. 평소라면 SF소설을 구입하지 않았을지라도 요약본이라면 선뜻 페이지를 넘긴다. 요약본은 접근 장벽이 높은 콘텐츠를 널리 알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앞서 언급한 두꺼운 책이 대표적이다. 요약으로 가벼워진 텍스트는 블로그, SNS 등을 타고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요약본을 보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점도 장점이다. 질문, 반박이 오고 가는 사이 핵심이 또한 번 추려진다.

한 포털 사이트는 올해 핵심 사업으로 ‘음성 비서’를발표하며, 긴 내용을 몇 줄로 요약해서 제공하는 기능도 구현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독서 비서관이 AI로 교체될지 모를 이 중대한 뉴스는 ‘뉴스 브리핑’을 통해 알게 된 소식임을 아울러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