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의 목적

영화에 대한 오랜 꿈들이 드디어 현실과 만나는 공간. 영화제는 매년 찾아오는 계절처럼 일상이 됐지만, 여전히 초심의 강렬한 떨림이 흘러넘친다.

영화제의목적 사진 다시

지난여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겪은 일이다. 에피소드 1. <지우개 전쟁>이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초청받은 감독이 있었다. 예명인 듯한 이름은 ‘아키라’. 13세다. 프로듀서인 엄마와 함께 GV(관객과의 대화) 무대에 올라왔다. <지우개 전쟁>은 지우개를 모델링해서만든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스타 워즈>와 <스타트렉>에 대한 오마주로 감독의 ‘덕후’ 기질이 가득했다. 마지막 질문은 진행자인 내가 던졌다. “혹시 속편을 기획하고 있나?” 소년 감독은 대답했다. “거의 완성했다. 이번엔 연필이 주인공이다.” 그러면서 수줍게 덧붙였다. “내년에 이 영화로 다시 부천에 왔으면 좋겠다.” 영화제의 평범한 GV 중 하나였겠지만, 소년에겐 인생이 바뀌는 특별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에피소드 2. CGV 부천이 있는 현대백화점 뒷골목이었다. 명함을 나눠 주는 사람이 있었다. 무슨 영업인가? 알고 보니 그는 감독이었고, 영화 제목과 이름이 박힌 명함을 나눠 주면서 부탁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면 자신의 영화를 보러 와달라고. <인질의 극>, 채승철 감독. 우연찮게 본 영화였다. “감독님 영화, 봤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자기 영화를 본 사람을 처음 만난 듯 기뻐했다. 힘겹게 만든 데뷔작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절실함이었다.

에피소드 3. 배효민 감독의 <슈팅걸스>. 선수가 열세 명밖에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서 전국 대회 우승을 일궈낸 삼례여중 축구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다. 영화도 매우 힘든 상황에서 만든 듯했다. 제작비 문제로 계속 촬영이 끊기며 의도하지 않게 사계절을 담을 정도였다. 상영이 끝나고 관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시간이 다 되어 “마지막 질문을 받겠다”고 하자, 6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어느 아주머니가 손을 드셨다. 감독의 어머니였다. “우리 아들, 영화 만드느라 고생 참 많이 했습니다.” 어쩌면 감독은 어머니께 자신이 만든 영화를 보여드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악조건 속에서도 영화를 기어이 완성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제 영화제는 우리에게 너무 평범한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출범할 때만 해도, 그것은 신기하고 낯선 풍경이었다. 한국의 영화 마니아 문화가 정점에 달한 1990년대 중반, 전국에서 모여든 시네필들은 영화 잡지에서나 접하던 작가 영화의 거장들을 직접 만나고 ‘극장 개봉작’이 아닌 ‘이상한 영화’들을 라이브로 접했다. 예술영화의 세계적 흐름과 일반 관객이 일대일로 대면하는, 문화적 에너지가 폭발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후 부천과 전주에서 국제영화제가 열렸고 웬만한 지자체는 필름 페스티벌을 열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크고 작은 영화제를 모두 합하면 약 100개 정도가 된다.

‘영화제의 목적’이라는 테마로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잠깐 막막했던 이유다. 영화제는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일상에 어떤 목적이 있을까? 이제 영화제는 때가 되면 당연히 열리는, 입춘이나 동지 같은 ‘절기’처럼 느껴진다.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반복 행사인 거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의미’를 만날 수 있다면? “영화제가 이런 이유로 열리는 건 아닐까”라며 그 목적성을 헤아릴 수 있다면?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영화제가 지닌 이중성 때문일 거다.

영화제는 레드 카펫으로 상징되는 축제면서 동시에 영화에 대해 품어온 오랜 꿈들이 드디어 현실과 만나는 공간이다.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어 대중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선보이는 사람들의 ‘날것 그대로의 초심’은 때론 설렘으로, 혹은 절박함과 뭉클함으로 다가온다. 앞에서 언급한 에피소드 외에도 수많은 사례가 있었다. 멕시코의 어느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직접 소개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20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왔다. 또 스페인의 어느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고향에서 꼭 개봉되었으면 좋겠다며 한국의 낯선 관객들 앞에서 눈물을 짓기도 했다. 떨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기쁨에 들떠 환호하고, 그 어떤 반응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진지하고, 작은 칭찬에도 감격하는 사람들. 10여 년동안 이런저런 영화제에서 GV를 진행하며 느낀 가장 생생한 감정은 이런 초심의 강렬한 떨림이다.

따지고 보면 영화제를 치른다는 건 꽤 복잡한 일이다. 예산을 확보해야 하고 프로그래머가 작품을 확보하
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홍보 과정도 치열한 경쟁이며, 해외 게스트를 초청하는 것도 피곤한 조율의 과정이다. 그럼에도 이 번거로운 이벤트가 존재해야 한다면, 영화제가 아니고서는 드러나기 힘든 소박하지만 고유한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신작 소개’의 통로라면 영화제는 마켓과 다를 바 없을 것이며, 유명 감독과 스타들이 그 주인공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제의 진짜 주인공들은 영화와 방금 첫사랑을 시작한 영화인들이며, 그들의 영화를 관람하고 공감하며 ‘초심의 순간’을 목격하는 관객들이다. 장차 영화는 결국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소비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영화제는 미래의 영화에 대한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순수한 형태의 투자일 것이다.

시상식도 마찬가지다. 어느덧 여배우의 노출 패션 행사로 변질된 감도 있지만, 그나마 시상식에 빛나는 순간이 있다면 누군가를 격려할 때다. 2015년 청룡영화상이 생각난다. 여우주연상 후보에 김혜수, 전도연 등이 올랐지만 트로피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의 이정현이 안았다. 워낙 저예산 영화였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영화에서 이정현의 연기는 어마어마했다. 시상식은 그런 숨겨진 능력자를 발굴하고 평가하며 그들의 미래를 격려하는 자리이며, 이것은 영화계의 앞날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자에 대해 뒤늦게나마 그들의 가치를 알려주는 일. 이것은 영화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친구이자 동료로 인정해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