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내 공간의 비밀

2017.10.24

by VOGUE

    내 공간의 비밀

    집을 편안한 공간으로 꾸미고 싶다면, 인테리어 팁을 모으는 대신 집을 찬찬히 둘러보라. 매일 그냥 지나쳤던 공간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숨어 있다.

    뷰포인트 고해상

    둘도 없는 부녀간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고마운 점이 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낙향하면서도 당시 중학생인 내게 작은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그 허름한 방은 다양한 스타일의 가구로 채워져 있었다. 좁아진 집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고급 원목 선반이나 차마 버리지 못한 뒤주 같은 것까지, 가족사의 희로애락이 뒤엉킨 공간. 건축가 훈데르트바서는 “집은 제3의 피부”라고 했다지만, 이 집은 든든한 보호막의 느낌이 아니었다. 수용해야 할 현실인 동시에 꿈꾸어야 하는 이유였다. 집에 대한 일종의 상(像)과 함께 취향도 이때 형성되었는데, 지금도 나는 화이트 큐브 같은 벽, 대리석 바닥에 명품 가구가 놓인 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브랜드 옷으로 휘감은 여자가 촌스럽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로, 나는 모던한 가구와 자개장을 함께 놓는 것이 세련된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

    어쨌든 나는 그 공간에서 어떻게든 잘 지내는 나를 스스로 증명함으로써 자존감을 지키려 애썼던 것 같다. “가진 돈이 두 푼밖에 없다면, 한 푼으로는 빵 한 덩이를 사고, 한 푼으로는 백합 한 송이를 사라”는 중국 속담을 실천했다. 그때 수 타운센드의 <에이드리언 몰의 비밀일기 1:13과 3/4살>을 봤다면, 주인공처럼 방을 온통 까맣게 칠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암흑기가 지난 후 난 그 공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지만, 전 세계 심리학자, 신경학자, 건축가, 인테리어 전문가 등은 줄곧 이 문제에 천착했다. 일터와 주거가 극명하게 분리된 산업혁명 직후 치솟은 공간에 대한 관심이 21세기에 들어 다시 거세졌기 때문이다. 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한 이들은 공간심리학, 신경건축학 같은 분야를 개척했다. 그리하여 브리야의 명언 “당신이 먹는 것을 알려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에 버금가는, “사람은 곧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이고, 장소는 곧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같은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의 말을 탄생시켰다. “그 사람의 공간을 보면 그의 심리가 보인다”고 단언한 심리학자 바바라 페어팔도 있다.

    언젠가 스위스의 어느 심리학자와 실내 건축가가 집에 대한 사진 세 장으로 그 집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추측하는 작업을 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있다. 이들이 그때의 내 방을 봤으면 어떤 진단을 내려주었을까? 아니, 지금의 내 집을 보면 어떤 진단을 내릴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공간에서 자신을 표현한다면, 그렇게 표현된 나는 과연 어떤 상태일까?

    “소중한 USM 가구가 전혀 빛을 보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냥 개성 없는 집이 되어버렸잖아!” 며칠 전 우리 집 거실 사진을 본 한 후배의 직언이 궁금증의 발단이 되었다. 퇴근 후 나는 가구를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선명한 블루 컬러의 가구는 뽀얗게 내린 먼지로 퇴색되었다. 서랍은 장난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마저도 자리가 부족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사실 이 가구를 둘째가 비행기 활주로로 쓰는 통에 흠집 난 건 별일이 아니었다. 몇달을 기다려 어렵사리 얻은 루이스 폴센의 PH 3/2 테이블 램프처럼, 이 가구를, 공간을 방치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느 하나 말끔한 곳이 없다는 곳을 나는 그제야 알아챘다. 이 집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내가 립스틱조차 바르고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책 <공간의 심리학>은 “명확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집에 불만이 있고,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고 짜증이 솟구친다면, 그것은 자신의 주거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 내린다. 주거 욕구란 “개인이 주거를 실현하기 위해 가지는 기대나 요구 등을 뜻한다”. 안전, 휴식, 자기 표현, 창의력 발휘, 심미성에 대한 욕구. 나는 집이 안전한 동굴이길 바라는가? 집이 평온한 오아시스이길 바라는가? 집이 소통의 중심지이길 바라는가? 집을 명함이라고 생각하는가? 집을 통해 창의력을 발휘하고 싶은 건가? 아름다운 공간을 동경하는가? 어떤 집에 살고자 하는지를 알아야 문제점도 찾고 만족도도 높일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대단히 심오하지도 않은 이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지금껏 이상적인 주거의 본질에 대해 의식하지 못 했거나, 두루뭉술하게 모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미국의 심리학자는 나 같은 증상을 가진 사람을 무수히 많이 봤다고 했지만, 나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어떤 집에서 살아도 더 좋은 집이 탐났다. 그런데, 나만 그런 건가? 특히 한국인에게 ‘내 집’의 의미는 매우 다중적이다. ‘이 편한 세상’이 아니라 ‘네(내) 편한 세상’(길종상가의 어느 전시 제목처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소수를 제외하고는 집을 대하는 마음은 전혀 편치 않을 것이다. ‘내 집’은 ‘마련(혹은 장만)’이라는 단어와 암수 동체처럼 붙어 다니는 통에 평생에 걸친 ‘무한도전’처럼 인식된다. 집은 나의 ‘인격’이라기보다는 나의 ‘재산’이며, 편안한 집에 대한 욕망과 재화 가치가 높은 집을 향한 욕망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어떤 집에 살더라도 본질적인 긴장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인테리어 전문가 소린 밸브스(<공간의 위로>의 저자)라면 나를 끊임없이 독려할 것이다. 다름 아니라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그녀의 철학은 ‘영혼의 공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됐다. 그녀는 편안하고,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인생까지 바꿀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공간에 있다고 말한다. ‘평가, 방출, 청소, 꿈꾸기, 발견, 창조, 향상, 축하’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단계가 공간과 영혼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킨다는 이론. LA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지은 수영장 딸린 소든 하우스에서 살고 있다는 말로 위화감을 형성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 주장은 꽤 일리 있다. “내가 사는 공간을 실제로 보고 그 공간에 있는 모든 물건에 부착된 내 감정을 직시해야 한다. 인생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내 공간에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개인의 스타일도, 살고있는 장소도, 소득 수준도, 집의 크기도 상관없다.”

    바바라 페어팔이 책의 첫 문장을 “이 책은 인테리어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 쓰고, 소린 밸브스가 종교 지도자처럼 “꿈꾸는 환경을 창조하면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창조할 수 있다”고 피력하는 데는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들은 공히 ‘나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인테리어 팁이 아니라고 말한다. 소파를 어디에 놓고, 벽지를 무엇을 바르고, 어떤 브랜드의 가구를 들이는가보다 중요한 건 바로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공간을 비난하는 대신 지금의 공간을 내 것으로 만드는 첫 단계는 나를 들여다보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말이다. 그러니까, 선반부터 커튼까지 천편일률적인 유명 브랜드로 채워진 집스타그램을 훔쳐보고, 비교하고, 좌절하는 것만큼이나 이 칼럼의 뒤에 펼쳐질 유명 인사들의 공간을 그저 흉내 내는 건 부질없을 거라는 말이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물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건에 대한 사유는 공간으로, 공간에 대한 사유는 일상으로, 일상에 대한 사유는 삶으로 확장된다. 왜 무리해서 특정 가구를 구입했는지(나는 이 세련된 가구를 통해 현재의 안정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왜 신혼에 맞춘 책상이 나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피부 관리를 포기하더라도 적당한 물건이 아니라 완벽한 책상을 들이는 데 더 투자했어야 했다), 왜 부엌에서 거실이 시원하게 뚫린 구조를 선호했는지(좁은 집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왜 침실의 상당 부분을 거대한 책장에 할애하는지(지나친 완벽주의는 쉽사리 책을 쓰지 못하게 했고, 이 수많은 책은 계약 상태로 머물러 있는 ‘나의 책’에 대한 부채 의식의 표현이다) 등등. 공간이 안은 난제를 고민하고 그 공간 속의 나를 직면하는 시간은 꽤 고통스러웠다. 구석구석 구겨 넣어둔 해답 없는(그렇게 보인) 고민이 함께 불거져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행동에 옮겨야 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엄마가 쓰시던 자개장롱, 자개 장식장을 다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서 손도 못 대고 있어.” 오랜만에 만난 옛 상사는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녀가 자개 문짝을 뜯어서 파티션을 만들든, 구본창 작가처럼 틈새 공간 가구로 재탄생시키든, 다른 가족에게 넘기든,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새 인생길에 선 그녀가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공간은 매듭짓지 못한 정서적 문제와 부정적 감정을 전부 간직하고 있다. 누군가의 공간은 내면을 보여주는 거울이며, 마음의 소리가 공명하는 곳이다. 나는 어머니의 추억이 서린 물건이 그녀에게 닻이 되지 않기를, 그곳이 그녀를 응원하는 공간으로 바뀌길 바라게 되었다(그러니, 독자분들 중 자개장롱을 리폼할 수 있거나 추천할 전문가가 있다면 연락 주시길 바란다).

    그날 저녁, 나는 몇 가지 작은 계획을 세웠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전통 의식처럼, 청소를 통해 공간을 정화하면 내 해묵은 고민이 갈피를 잡을지도 모른다. 가장 곁에 두고 싶은 것만 고르고, 딸아이에게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무엇보다 장롱 옆에 처박아둔 피아노를 다시 꺼낼 생각이다. 퇴근 후 집에 들어설 때마다 종종 2교대를 지속하는 듯한 피로감이 엄습한 건 이런 선택을 한 내 잘못도, 아이들의 잘못도 아니다. 일을 할 때도, 아이를 키울 때도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을 우선시했지만, 결코 나를 즐겁게 하지 못하는 이 고약한 습성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피아노를 다시 쳐야겠다. 30년 전 그때처럼, 내 공간을 꾸미는 것이 나 자신을 돌보는 일임을 확인하고 통찰하는 이 시간이 왠지 지금의 내게 결정적 순간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는 내가 이 일을 해낼지 매우 궁금하다.

      에디터
      이주현
      일러스트레이터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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