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 of Wonderland

원더걸스라는 네버랜드를 떠난 예은은 더 넓은 무대 대신 핫펠트라는 자기만의 음악을 택했다. 환상적인 모험으로 가득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날아가던 19세 소녀는 어느덧 어른이 됐다.

롱 재킷은 로우클래식(Low Classic), 플리츠 블라우스는 쟈니헤잇재즈(Johnny Hates Jazz), 페이즐리 패턴의 컬러 배색 스카프는 크루치(Kruchi).

롱 재킷은 로우클래식(Low Classic), 플리츠 블라우스는 쟈니헤잇재즈(Johnny Hates Jazz), 페이즐리 패턴의 컬러 배색 스카프는 크루치(Kruchi).

긴 동화의 마지막처럼 예은은 마침내 원더걸스라는 네버랜드를 떠났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모험으로 가득하던 환상의 세계는 이미 먼 과거가 되었고, 예은은 지금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서있다. ‘텔미’를 부르던 열아홉 살 소녀는 한꺼번에 10년 치의 나이를 먹은 듯했다. 눈빛은 깊어졌고 목소리는 한층 성숙해졌다. ‘핫펠트’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예은은 초조하거나 불안한 기색이 없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 보인다. 촬영 현장이 된 오래된 골목길은 온 동네 할머니들과 복덕방 아주머니, 길고양이까지 구경꾼으로 나서 마을 축제라도 열린 듯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그녀는 국민 걸 그룹의 춤추는 작은 인형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예은은 비로소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올해 초 원더걸스의 해체 후, 예은은 새 소속사로 힙합 레이블인 아메바컬쳐를 택했다. 다이나믹 듀오가 이곳의 수장이다. 예은은 본명 대신 첫 솔로 활동 때 지은 ‘핫펠트(HA:TFELT)’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Heart’와 ‘Felt’의 합성어로 진심 어린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오래 고민하고 지은 건 아니에요. 그냥 그 당시에 핫펠트가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계속 사용하게 된 거죠. 제가 아메바컬쳐에 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데, 여긴 본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쇼미더머니 6>의 우승자인 행주를 비롯해 지구인, 프라이머리, 크러쉬, 필터, 다 이런 식이니까.(웃음)” 여자 아티스트는 핫펠트가 유일하다. 예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어요. ‘여자 가수는 이래야 한다’는 전형이 없잖아요. 성별을 떠나 저를 한 명의 아티스트로 봐줄 수 있겠다 싶었죠.”

아메바컬쳐와의 첫 만남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는 자신의 솔로 앨범을 준비하며 예은에게 ‘화장 지웠어’의 피처링을 부탁했다. 핫펠트의 첫 솔로 앨범이 공개된 직후였다. 당시 예은은 개코의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개코 오빠가 직접 연락을 해왔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 앨범을 듣고 난 후 여러 사람들에게 연락처를 물어봤대요. 저 역시 다이나믹 듀오의 팬이라 너무 고마웠죠.” 힙합 뮤지션들의 큰형인 개코는 솔로 가수로서 예은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봤다. 앨범 전체를 자작곡으로 채운 핫펠트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히 빛나는 싱어송라이터였다. JYP와의 계약이 만료되어가는 시점에서 개코는 예은에게 다시 한번 먼저 손을 내밀었다.

블랙 슬립 원피스는 미스지 컬렉션(Miss Gee Collection), 데님 재킷은 MM6, 티셔츠는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블랙 싸이하이 부츠는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블랙 슬립 원피스는 미스지 컬렉션(Miss Gee Collection), 데님 재킷은 MM6, 티셔츠는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블랙 싸이하이 부츠는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핫펠트의 새 앨범 <마이네(MEiNE)>의 타이틀곡 ‘새 신발’은 개코의 선물이기도 하다. 원더걸스가 아닌 핫펠트로서 새로운 출발점에 선 예은에게 개코는 새빨간 하이힐이 아닌 편안한 운동화를 건넸다. 노래 가사는 예은의 현재 속마음 같다. “새 신발을 샀어요. 어울리긴 해도 아직 어색해요. 길이 들어야 하겠죠. 걷기도 전에 뒤꿈치가 걱정돼요. 어디로 갈지, 어디로 데려갈지. 두려움 반, 설렘 반.” 눈을 사로잡는 무대의상이나 화려한 퍼포먼스도, 요란한 기계음조차 없다. 이번 앨범에서 예은은 힘을 쭉 뺐다.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람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던 노랫소리는 아득한 기억 저편의 구름이 되어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후드득 빗방울로 떨어졌다. 매력적인 음색이다. 원더걸스 시절엔 이런 개성을 미처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괜찮게 들리나요? 휴, 다행이에요. 아무래도 그룹 활동 할 때랑은 다르겠죠. 그동안 제가 많이 변하기도 했을 테고요. 이번 앨범은 트랙 자체도 그렇지만 보컬적으로도 비우고 간다는 느낌이에요. 담백하고 군더더기가 없죠. 숨 고르기 같달까. 제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직접 쓴 가사는 더없이 솔직하다. “굳이 이런 부분까지 대중들이 알 필요가 있겠느냐는 우려도 있었어요. 물론 듣고 싶지 않은 분들도 있겠죠. 그런데 전 뭘 알리려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써 내려갔을 뿐이에요. 모두들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걸 드러냈을 때 오는 평안이 있어요. 점점 더 저를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대중의 관심을 받는 모든 스타가 그러하겠지만 원더걸스라는 K-팝 브랜드와 실제 예은이 100% 같을 수는 없다. 대중과 스타 사이엔 지구와 달만큼의 거리가 존재하고, 미디어라는 망원경은 늘 오해를 낳는다. 막대한 예산을 투자한 아이돌 그룹이 일종의 기획 상품이라면 그 안에 있는 건 사람이다. 가공된 이미지가 한 사람의 전부일 수는 없다. ‘착하고 예쁜 아이, 바른 생활, 끊임없는 노력’ 같은 좋은 단어로만 누군가의 인생을 설명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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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땐 머리를 빨갛게 염색하고 다녔어요. 키도 지금이랑 똑같아서 밖에 나가면 스무 살이 넘은 줄 알고 대통령 선거 홍보 전단을 주기도 했죠.(웃음)” 남들보다 빨리 사춘기가 찾아온 조숙한 아이는 꽤 오랜 시간 방황했다. 나쁜 마음을 먹거나 잘못된 행동을 한 적도 있다. 한때의 홍역이고 다지나간 일이지만 그 역시 예은의 일부다. “남들이 보는 나와 실제 나의 모습이 많이 다르면 힘든 것 같아요. 그 간극을 최대한 줄여나가려고요. 사람들이 사랑하는 나를 나 역시 사랑할 수 있어야 행복할 테니까요. 만들어진 내가 아닌 진짜 나로서 사랑받고 싶어요.” 물론 원더걸스로서의 시간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예은은 더없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고도 했다. 그건 사실이다. “다만 ‘내가 원더걸스에 꼭 필요한 존재였을까’ 하는 의문은 있죠. 저보다 더 예쁘고 노래도 잘하고, 매력 있는 친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더 잘됐을 수도 있겠다.” ‘텔미’나 ‘소핫’ ‘노바디’는 이제 갓 말을 배운 아이부터 환갑이 넘은 어른까지 누구나 따라 부르던 국민 가요였다. 어쩌면 정말 예은의 말처럼 누가 했더라도 잘될 수밖에 없는 노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핫펠트는? 대체 불가능한, 그야말로 예은의 음악이다.

대학에서 포스트모던 음악을 전공하고 화성학을 배운 예은은 직접 곡과 가사를 썼다. 집 안에 작업실을 두고 작업을 지속해나갔다. ‘나란 책’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펀치넬로에게 러브 콜을 보낸 것도 예은의 생각이었다. 예은은 이번 앨범의 전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만족스러운 앨범이에요. 제 의견이 95%는 반영된 것 같고요.(웃음) 최종 결정권은 늘 저한테 주시거든요. 되게 자유로워요. 정말 감사하죠.” 곡 작업은 뉴욕에서 진행되었다. 핫펠트 앨범 때부터 함께 호흡을 맞춰온 프로듀서가 뉴욕에 있기 때문이긴 하나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페미닌한 느낌의 화이트 원피스는 블루걸(Blugirl), 블랙 컬러의 퍼 코트는 이브 살로몬(Yves Salomon), 귀고리는 트렌카디즘(Trencadism).

페미닌한 느낌의 화이트 원피스는 블루걸(Blugirl), 블랙 컬러의 퍼 코트는 이브 살로몬(Yves Salomon), 귀고리는 트렌카디즘(Trencadism).

이런 시절 예은에게 미국은 꿈의 무대였다. “그땐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보단 막연히 미국에 가고 싶었어요. 월드 투어를 꼭 해보고 싶었죠.” 댄스 동아리와 보컬 동아리에서 줄곧 그룹으로 활동해왔던 예은은 당시 연일 뉴스를 장식하던 JYP의 미국 진출 소식을 보고 원대한 꿈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해외 활동에 대한 비전이 있는 회사 같았어요. 무조건 거기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거죠.” 2009년 본격적으로 미국 활동을 시작한 원더걸스는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했다. 아시아 가수로서도 5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낯선 땅에서의 생활이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예은은 뉴욕을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뉴욕에 가면 리프레시가 돼요. 원래 고생할 때 먹은 밥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하잖아요.(웃음)”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하늘을 날던 소녀는 이제 스물아홉 살이 됐다. “저만이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요. 그래서 자꾸 곡을 쓰게 되는 것 같고요. 제가 만든 곡은 아무래도 제가 가장 잘 부를 수 있을 테니까. 테크닉이나 실력을 떠나 제 생각과 감정이 깃든 음악이잖아요. 더 의미가 있죠.” 예은은 얼마 전 SNS를 통해 어느 팬이 보내온 사연을 얘기했다. 어느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 예은이 쓴 노래를 듣고 큰 위로를 받아 다시 한번 힘을 냈다는 것이었다. 드라마 <드림하이 2> OST로 수록된 ‘Hello to Myself’다. 핫펠트로 솔로 가수로 데뷔하기 전, 예은이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노래였다. “큰 무대에 올라 수많은 관중의 박수를 받는 것도 물론 너무 기쁘죠. 그런데 이건 좀 다른 행복인 것 같아요. 그런 환호가 짜릿한 전율이라면 이건 뭐랄까, 되게 뭉클해요.”

퍼 코트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체크 스커트는 이자벨 마랑 에뚜왈(Isabel Marant Étoile), 앵클 부츠는 보테가 베네타.

퍼 코트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체크 스커트는 이자벨 마랑 에뚜왈(Isabel Marant Étoile), 앵클 부츠는 보테가 베네타.

“아이들은 결국 성장하고, 여기를 떠나야 하며, 요정들은 일찍 죽는다.” <피터 팬>의 이야기다. 네버랜드를 떠나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동화 속 주인공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자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여긴 완벽한 나만의 세계다. 환상적인 모험은 없지만 대신 어디에도 없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저 멀리 있는 목표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이젠 길가의 꽃도 보고 돌아볼 수도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러던데 30대가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걸 명확히 알게 된대요.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줄어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탄탄해지는 거겠죠. 저도 몇 달 안 남았어요.(웃음)” 자기 발에 꼭 맞는 새 신발을 신고 예은이 길을 나선다. 오랜 달리기를 멈추자 비로소 꽃향기가 난다. 지나온 길도 앞으로 나아갈 길도, 알고 보니 사방이 꽃이다. 예은은 지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길을 걷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