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the man who became a history

2017.12.08

by VOGUE

    the man who became a history

    에드 루샤는 LA 일대 예술의 개척자이자 문화의 충실한 기록자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의 간결하고도 시적인 작품과 존재가 미국 서부를 위대한 곳으로 만들었다.

    F_0464_F

    로스앤젤레스라는 도시에 대한 절대적인 인상을 만든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에드 루샤(Ed Ruscha)의 그림과 사진은 매우 강력하다. 캘리포니아의 황량한 이미지가 메시지를 압도하는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한 장면처럼 그의 그림 속 도시, 공허하나 대단한 희망을 품은 광활한 땅에는 빛바랜 황금빛 꿈이 새겨져 있다. 에드 루샤식의 ‘미국 신화’가 해피 엔딩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비극적이며, 몽상적이며, 외로움이 반복되는 출구 없는 세계에 가까웠다. 그의 작품을 보다 보면 이 무방비의 도시에 고립된 것 같기도, 완전히 분리된 것 같기도 하다가, 과연 이 도시가 실재하는 도시인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른다. 사실 할리우드와 스타의 존재감을 덜어내고 나면, LA의 매력은 언뜻 잘 보이지 않는다. 있긴 하겠지만, 투명하다. 그러나 투명하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 에드 루샤는 투명한 도시의 매력을 그림과 사진에 녹여내는 데 평생을 바쳤다.

    F_0326

    그런 점에서 단언컨대, 1937년생 예술가인 에드 루샤는 LA 예술, 문화의 개척자 이자 충실한 기록자다. 이것은 실제 캘리포니아 전반의 역사와도 정확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미국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페인팅, 사진, 드로잉, 필름, 아트 북 등의 매체를 두루 활용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주차장, 주유소, 수영장, 옥상 전망, 아파트, 할리우드 사인 등을 시대의 감정적 흥망성쇠를 담담하게 구술하는 누군가의 포트레이트처럼 펼쳐 보였고,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의 삶과 풍경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그려냈다. 그의 그림에서 종종 나타나는 시네마스코프 형식은 이 차분하고 사실적인 작품을 영화 같은 감상으로 바꾸어내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엄연하게 존재했던 진실(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을 맞닥뜨리게 된다. 어느 시대에든, 기록자는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의 그림 속 LA의 풍경은 그래서 모두 주변에서 본 것이었다. 무명 시절, 친구가 모는 트럭 뒤에 서서 사진을 찍을 때도, 성공한 예술가가 된 후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풍경을 찍을 때도 제3자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지난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드 영 미술관(de Young Museum in San Francisco)에서는 <에드 루샤와 위대한 미국 서부> 라는 위대한 이름의 전시를 연 바 있으나, 재미있게도 에드 루샤가 활동을 시작한 1950~60년 당시 LA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몇몇 갤러리 이외에는 중요한 미술관도, 예술가로 살고자 하는 자도, 이들의 작품을 사고자 하는 이도 별로 없었다. 앤디 워홀, 로버트 라우센버그처럼 잘나가던 작가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듯 뉴욕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에드 루샤는 마법의 도시로 가지 않았다. 너무 추웠고, 복잡했으며, 무엇보다 그냥 LA가 좋았기 때문이다. 남의 어깨너머로 세상을 봐야 하는 뉴욕이었다면, 에드 루샤가 객관적인 관찰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산뜻하고도 초월적인 시선으로 도시를, 세상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 너무 친숙한 것을 완벽하게 애매하게 만드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물론 좀더 빨리 유명해졌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FK_0424

    스튜디오에 당도했을 때, 우리는 뒤뜰부터 먼저 둘러보았다. 작가의 오두막 같은 작업 공간을 중심으로 주차장과 정원 그리고 공터가 사이좋게 자리를 나누고 있었다. 그 옆에는 족히 50~60년은 되어 보이는 포드의 빈티지 자동차가 서 있었다. “그의 첫 번째 프린트 에디션에 나왔던 차입니다. 오클라호마에서 가져왔지요. 역사가 긴 자동차예요. 거미줄도 쳐져 있고, 냄새도 좀 나지만 조각품 같아 보이죠.” 나는 언젠가 읽었던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1956년 당시 열여덟 살이던 루샤는 고향인 오클라호마를 떠나 1950 세단을 몰고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아트 스쿨에 입학했다.” 이 문장이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한 청춘 영화의 내레이션처럼 느껴지는 건 꽤 타당했는데, 그럴 법한 것이 이 순간이 바로 ‘아티스트 에드 루샤’의 시작 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100명씩 ‘LA 드림’을 꿈꾸며 이 도시로 넘어온다는 사실이 매일 뉴스를 장식하던 시절이었다.

    “예술적 커리어의 기반이 되는, 가장 중요했던 전시는 무엇이었습니까?” 에드 루샤가 <보그>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1962년 패서디나 미술관(Pasadena Art Museum)에서 열린 전이었습니다.” 부연 설명이 필요 없었을 정도로, 이 전시는 유명하다. 팝아트에 초점을 맞춘 첫 번째 미술관 서베이 전시이자 미국 아트 신에서 팝아트의 움직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당시 재능 있고 혈기 왕성한 미국의 아티스트들, 로이 리히텐슈타인, 짐 다인, 앤디 워홀, 필립 헤퍼톤, 로버트 도드, 조 구드, 웨인 티보 등과 함께 에드 루샤도 이 기념비적인 전시에 참여했다. 막내였던 그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카슨-로버트 광고 회사에서 레이아웃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전시 차량 인쇄 문구나 햄버거 표지판을 그래픽으로 디자인하던 에드 루샤는 예술의 새 시대를 결정적으로 알린 전시를 통해서 앙팡 테리블로 주목받게 된다.

    F_0331

    수십 년이 흘렀고, ‘무서운 아이’는 ‘시대의 어른’이 되었다. 약속 시간,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은은한 백발의 에드 루샤는 자신의 눈 색깔만큼이나 푸른 셔츠에 베이지색 팬츠를 입고 있었다. 정직하고 강직하며 품위 있는 농부 스타일인 그는 안경을 들고 카메라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셔터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왜 촬영이 빨리 끝나지 않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가 낮지만 젠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가 사진에서 빠져야 한다면 이야기해주세요.” 그럴 리가. 20년을 알고 지내도 속을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스터리한 이 남자의 기분을 가장 정확하게 아는 건, 어딜 가나 그를 쫓아다니고 함께 포즈를 취하던 반려견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에드 루샤가 포착한 LA의 풍경에는 사람이 없다. 그의 LA가 왜 그렇게 쿨하고 미니멀하며 영원할 것처럼 보였는지에 대한 짧은 답이기도 했다.

    모르긴 해도, 이 도시의 모든 미술관은 에드 루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을 것이다. LA가 이 대단한 아티스트를 키워냈다는 점을 자못 자랑스러워하듯이, 그의 작품은 다른 소장품 중에서도 독립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번에 나는 에드 루샤의 대표작인 ‘Standard Station’ 시리즈 중 불타는 주유소 버전인 ‘Norm’s, La Cienega, on Fire’(1964)부터 사진 작품인 ‘Fountain, Sunset, Hollywood (1999), 그리고 유명한 워드 페인팅(Word Painting) 작품을 대거 볼 수 있었다.

    에드 루샤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는 그림 위에 단어를 오버랩하거나 단어만 그리는 기법이다. 그의 작품이 미국 문화에 대한 간결하고도 시적인 접근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단어의 존재에 힘입은 바 크다. ‘Oof’ ‘Boss’ ‘Mint’ ‘Desire’ ‘Smash’ ‘Heavy Industry’ ‘Noise’ ‘Won’t’ 같은 평범한 단어부터 ‘Honey… I Twisted Through More Damn Traffic to Get Here(자기야… 엄청난 교통 체증을 뚫고 여기까지 왔어)’ ‘That Was Then This Is Now(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 ‘Thermometers Should Last Forever(난방기는 영원해야 해)’ ‘Pay Nothing Until April(4월까지는 아무것도 지급할 수 없어)’처럼 뜬금없는 문장도 있다. 사람들의 말, 라디오나 영화에서 건져 올린 것들 중 순간적으로 선택된 단어들이다.

    그의 단어 게임에 참여하다 보면 종종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단어의 본래 뜻과 그림을 연결시키려는 시스템이 내 머릿속에서 작동하지만 별 연관성을 찾지 못한 상태로 실패한다. 당시 작가의 심적 상태를 예측하고 단어 모양이나 색과 연결시켜보지만, 그 역시 실패할 공산이 크다.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순간부터가 실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연적인 좌절의 과정을 통해 단어는 이미지로 인식되고, 읽히되 읽히지 않으며, 미술관을 떠난 후에도 유령처럼 떠돈다. 그의 워드 페인팅은 마찬가지로 단어를 이용하는 로렌스 와이너나 조셉 코수스 같은 작가들을 떠올리지만, 그의 단어들은 뜻을 전해야 하는 목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르다.

    F_0445

    실제 에드 루샤의 스튜디오에는 다양한 버전의 사전이 구비되어 있었다. 사실 이 스튜디오는 작업실이라기보다는 도서관 혹은 아카이브 룸에 가깝다. 모두 공개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현재 흥미롭게 보고 있거나 구상 중인 사진, 텍스트, 드로잉, 스크랩 자료가 즐비했다. 족히 수천 권은 되어 보이는 책에서는 현존하는 아티스트 중 웬만한 이들의 이름은 다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책이 있는가보다 더 놀라운 건 책 자체다. 아티스트들의 책에 대한 애정은 유명하지만, 에드 루샤는 이를 작업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그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도 책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대단히 예술적이고 값비싼 책이 아니라 그냥 책. 그는 아티스트가 직접 책 만드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시절, 책 만들기를 즐기면서, “대체 이게 뭐야?”라는 반응을 이끌어냈고, 그 자체로 만족했다. ‘Artists Who Do Books’(1976)라는 문장을 그린 작품도 있다. 그리고 수십 년 후 최근 가고시안 갤러리는 루샤의 영향을 받은 미국, 유럽, 아시아의 수백 명 넘는 아티스트들이 직접 출판한 책을 전시의 형태로 보여줌으로써 에드 루샤에게 오마주를 표했다.

    F_0453

    에드 루샤가 찍은 사진을 슈타이들이 엮은 에는 기념비적인 책 등의 오리지널 레이아웃이 실려 있다. 그 책에서 크리스티안 뮬러는 이렇게 쓴다. “루샤는 자신을 개념 미술의 대표자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의 사진집은 댄 그레이엄, 로버트 스미슨, 안드레아 거스키, 토마스 스트루스 등의 예술가와 사진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팝아트와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의 느낌을 모두 가진 이 예술가는 수십 년 동안 그를 어떻게 정의할지 모르는 평론가들을 쩔쩔매게 만들었고, 그 혼돈이 정리된 직후부터 작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으며, 지금도 젊은 아티스트들은 그를 영웅으로 여긴다. 여전히 먼 곳에서 그를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 그를 만나기 위해 온 우리 같은 이들을 볼 때 그는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온다. “그들이 그렇듯, 저도 때때로 놀라요.”

    F_0406

    LA 아트 신의 중심에 서는 동안에도 에드 루샤는 매일 아침 6시가 되기 전에 기상했고, 스튜디오에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그리느라 애쓰는 대신 그는 침착하게 세상을 바라보았다. 2018년 6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열릴 전시를 준비하는 것도, <보그> 질문지에 대한 위트 있는 대답을 쓰는 것도 여전히 그의 몫이다. 그는 그저 길을 따라 걸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다름 아닌 에드 루샤 본인이 만든 길이다.

    FK_0420

    아직도 백악관에 당신의 그림이 걸려 있나요?
    아니요, 전혀요. 오바마 대통령이 ‘Indecision’이라는 제목의 제 그림을 걸어두었죠. 그는 그 작품의 제목이 자신을 정의한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어요. 우리의 새 대통령은 금에만 관심이 있는데, 저는 금을 다루지 않아요.

    이 스튜디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그 순간에 당신은 주로 무엇을 하고 있나요?
    대부분의 시간을 부서질 것 같은 의자에 앉아서 보내요. 그게 꼭 제가 게으르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고요.

    지금, 당신은 ‘미국적’이라는 걸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와서 믹서에 넣고 돌린 후 지도의 USA 영역에 부어요. 그게 미국이죠.

    F_0380

    내게는 당신이 만들어낸 LA의 다양한 작업이 LA 그 자체로 각인되어 있어요. LA가 앞으로 어떻게 변하든, 그건 변함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포착해서 세상에 알린 LA의 이미지 중 수정하고 싶은 게 있나요?
    LA가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걸 보는 게 짜증이 나요. LA에 온 후, 나는 이 지역의 몇몇 요소만 뽑아내서 탐구했어요. 그게 큰 그림 속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배워가는 방식이에요.

    당신의 작품이 LA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LA는 이미 사람과 자동차로 가득 찼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빠르고 다중적인 면이 있죠. 모든 것이 나의 관심을 끌고 있어요.

    F_0370

    수십 년을 이곳에 살아온 선배로서, 최근 LA의 아트 신에 대한 소회는 어떤가요?
    LA의 아트 월드에는 매일 수백의, 아니 수천의 뉴 페이스들이 새로 등장하고 있어요. 아주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정도로 말이죠.

    당신의 작품은 항상 현실적이고 객관적이며 그 어떤 대안적인 동기도 없는 듯 보여요. 이러한 작품 경향과 예술가로서의 관점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많은 예술 2017작품은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구성되어 있죠. 나의 예술은 그런 수많은 것이 뒤섞인 형태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의 혼합체라고나 할까요.

    최초의 ‘시각적(예술적, 미술적) 경험’은 무엇이었나요?
    히긴스 블랙 인디아 잉크(Higgins Black India Ink)를 깨끗한 흰 종이에 엎질렀을 때였어요. 잉크가 마르자 균열이 생기고 아름다워졌지요.

    Really Old, 2016 Acrylic on canvas, 114 x 76 inches 289.6 x 193 cm

    Really Old, 2016
    Acrylic on canvas,
    114 x 76 inches
    289.6 x 193 cm

    개인적으로 당신이 만든 ‘Boy Scout Utility Modern’체를 좋아해요. 이 폰트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요?
    그 글자체의 모양에는 어딘가 미숙한 면이 있어요. 곡선이 전혀 없죠. 내가 만들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누군가가 디자인해 사용했을 것입니다. ‘보이 스카우트’라는 단어는 모험을 떠오르게 하죠.

    글자에 애착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산산조각 난 길거리 안내판에서 우연하게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목격했어요. 내게는 정말 멋진 대상이었죠.

    ‘왜’라는 질문을 좋아합니까?
    저는 ‘주사위를 던지다’라는 표현을 좋아해요. 각 면에 뭐가 있는지를 알아낸 후에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 그냥 주사위를 던지기만 하면 되죠.

    몇 년 전, 매거진에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쓴 글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1940), <세비지 아이(The Savage Eye)>(1960), <프라이빗 프로퍼티(Private Property)>(1960), <더 월즈 그레이티스트 시너(The World’s Greatest Sinner)>(1962), <영광의 길(Paths of Glory)>(1957)이 포함되어 있죠. 여기에 더 추가하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까?
    여기에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의 <막다른 골목(Cul-de-sac)>(1966)을 추가해야겠군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Untitled, 2015, Acrylic on Canvas, 182.9×315cm, RUSCH 2015.0052

    Untitled, 2015, Acrylic on Canvas, 182.9×315cm, RUSCH 2015.0052

    당신은 단어를 직관적으로 떠올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혹시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나요?
    ‘프레스토(Presto)’! 마치 ‘Volià(프랑스어로 ‘자!’ 혹은 ‘이거 봐!’와 같은 의미)!’라는 것과 비슷하죠. 무언가 발견했을 때 쓰이는 단어예요.

    작업의 수많은 과정(구상, 작업 실행, 완성) 중 어떤 단계에서 가장 희열을 느끼나요?
    구상 단계가 가장 매력 있는 것 같아요. 그 개념을 실행에 옮겨서 망치기 직전의 순수함이 있잖아요.

    당신은 천국으로 가는 문을 만들고 싶은가요,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문을 만들고 싶은가요?
    모든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작품이 연기처럼 나오길 바랄 거예요.

    당신의 작업이 수십 년 동안 단순히 ‘변화’가 아니라 ‘진화’라고 얘기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나의 예술적 변화는 한 개인의 일대기와 같아요. 또한 음식이 위에서
    아래로 소화되는 것처럼 순리대로 진행되었어요.

    Jelly, 1967, Oil on Canvas, 50.8×60.0cm, RUSCH 1967.0005

    Jelly, 1967, Oil on Canvas, 50.8×60.0cm, RUSCH 1967.0005

    몇 년 전 당신이 게티 뮤지엄에 기증한 수많은 자료, 사진, 필름 등은 예술일까요? 아니면 역사적 도시 기록일까요? 어떻게 보면 예술과 역사적 기록은 하나예요. 래리 가고시안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1960년대 후반에 그를 처음 만났어요. 지난 30년이란 긴 세월은 제게 뭔가 꽤 괜찮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래리의 관객은 다양했고, 덕분에 나는 넓은 세상과 접촉할 수 있었죠.

    반 고흐는 이렇게 말했죠. “내 작품으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명백히 나의 의무다.” 당신은 돈과 예술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나요?
    돈은 예술가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예술가를 물지 않아요.

    지난 마이애미 바젤에서 존 발데사리를 봤어요. 그런 행사에 가볼 생각은 없나요?
    아니요, 없어요. 존 발데사리의 말이 기억나네요. “아트 페어에 가는 아티스트는 당신의 부모가 침대에서 섹스하는 걸 지켜보는 것과 같다”고 했죠.

    Oaf, 2009, Acrylic on Museum Board Paper, 101.6×76.2m, RUSCH 2009.0272

    Oaf, 2009, Acrylic on Museum Board Paper, 101.6×76.2m, RUSCH 2009.0272

    예술가 인생에서 가장 위기인 적은 언제였나요? 예술가에게도 위기가 기회일 수 있을까요?
    크고 작은 부정적 사건이 때로는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이제껏 당신이 들은 비평가나 언론의 평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이었나요?
    제가예술가로 사는 동안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워싱턴 D.C.의 미국 의회도서관 (Library of Congress)에 보낸 라는 제 책의 기부를 거절하는 편지였어요. 거절 사유가 없다는 사실에 매우 실망했어요. 저는 도서관은 어떤 책이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설령 불쾌한
    서적이라도 말이죠.

    이 책은 컬렉터에게 사랑받는 아이템이 되었고, 잘 보관된 첫 번째 에디션은 최대 2만5,000달러까지 매겨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결정이 너무 근시안적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당신에게 미래란 어떤 의미인가요?
    미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건 진정한 미래로 우리를 인도하는 매력적인 일이죠.

    History Kids, 2009, Acrylic on Canvas, 91.4×121.9cm, RUSCH 2009.0005

    History Kids, 2009, Acrylic on Canvas, 91.4×121.9cm, RUSCH 2009.0005

    젊은 예술가의 어떤 점을 존중하고, 또 어떤 점을 싫어합니까?
    좋은 점: 그들은 무모하고 자신만만하다. 싫은 점: 그들은 무모하고 자신만만하다. 당신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는 어디에서 영감을 받나요? 저는 제가 영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영감을 받아요. 말하자면 제 영웅은 종종 2~4인치 크기의 나무 조각 같은, 죽어 있는 것들이죠. 결론은, 나무는 숭고한 대상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겁니다.

    한 가지 일을 수십 년 동안 하면서 산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걸 운이라고 생각하나요, 운명이라고 생각하나요?
    운이든 운명이든, 저는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제 작업에 질리지 않는다는 게 더 중요해요.

    다섯 살짜리 아이가 묻습니다. “예술이 뭔가요?” 뭐라고 답하면 좋을까요?
    ‘예술’이라는 단어는 너무 모호하고 터무니없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예요.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어요. 그리고 누구나가 말하는 모든 것이 바로 예술이에요.

    예술가로서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요?
    기억되지 않는 건 죽음 위의 죽음 같아요. 저의 작업과 정신을 당신의 마음 한쪽에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에디터
      윤혜정
      포토그래퍼
      HYEA W. KANG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