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

Closer Sapporo

2017.12.13

by VOGUE

    Closer Sapporo

    홋카이도 삿포로는 계절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도시다. 도시에만 머물러도 매 순간 자연의 존재감이 찾아온다. 삿포로의 낮은 짧았지만 삿포로에서 보낸 하루는 종일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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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삿포로로 긴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한여름이었지만 비행기에서 삿포로라는 세 글자를 소리 내어 발음했을 때 눈 내리는 까만 밤이 떠올랐다. 삿포로는 겨울만 있는 도시 같았다. 하지만 아무런 기대 없이 도착한 그곳에 하얀 눈의 흔적은 없었다. 그저 선명하기만 했다. 푸르름이, 상쾌함이, 그 순간이. 나중에 알았지만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사계절이 가장 뚜렷한 지역이었다. 심성이 차분하고 가슴이 따뜻한 이 도시에서 계절은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불쑥 고개를 들면 마루야마산과 눈이 마주쳤고, 채비를 해서 나서면 도요히라강이 보였다. 계절의 드라마는 삿포로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오도리 공원은 자연을 주인공으로 한 공연 무대에 가까웠다. 봄이면 ‘라일락꽃 축제’가, 여름이면 ‘오도리 비어 가든 축제’가, 겨울이면 ‘눈꽃 축제’가 열리는 바로 그곳이다. 삿포로 시내를 돈다는 건, 오도리 공원을 맴도는 일이었다. 다시 삿포로를 찾았던 지난 10월, 오도리 공원은 온통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4시면 해는 어둠 속으로 넘어갔지만 노란색은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저녁 비행기로 도착해 가장 먼저 삿포로 ‘테레비탑’ 전망대에 올랐다. 오랜 여행 습관 중 하나는 여행 첫날 최대한 높은 곳에 올라가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일이다. 지도를 펼친 듯 한눈에 들어오는 도시를 보고 나면 방향 감각이 생긴다. 또한 점처럼 보이는 불빛 하나하나가 사람들이 간직한 별처럼 느껴지곤 한다. 외지인으로 현지인에게 건네는 작은 인사이자 의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147m 높이의 삿포로 테레비탑은 첫날 야경을 보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도달한 90.38m 높이의 전망대에서는 전경뿐 아니라 곳곳의 면면이 생생하게 보였다.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본 삿포로는 자로 줄을 그어가며 만들기라도 한 듯 반듯했다. 자연의 존재감에 종종 잊게 되지만 삿포로는 19세기 중·후반부터 계획적으로 개발된 도시다. 눈이 오면 차선 하나가 모두 눈으로 덮여버리기 때문에 인구나 유동 차량 대비 도로가 넓고, 눈이 오면 흰색 불빛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도시의 불빛을 노랗게 통일해서 밤이면 따뜻한 기운으로 꽉 차오르는 곳. 눈의 왕국은 의도치 않게 도시를 쾌적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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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의 야경은 고베, 나가사키와 함께 일본 ‘신 3대’ 야경으로 꼽힌다. 케이블카를 타고 531m 높이 산에 올라가는 모이와야마 전망대도 삿포로의 야경을 보기 좋은 장소다. 여러 차례 이곳에 올랐던 지인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며 절대 바깥 풍경을 보지 않길 권했다. 궁금증을 꾹 참고 정상에 올라 선물 상자를 풀어내듯 야경을 마주하라는 것. 삿포로 테레비탑보다 더 높이 올라가 내려다본 삿포로는 인간이 창조한 밤하늘이었다. 별빛 가루를 뿌린 듯했고, 몹시 로맨틱했다. 실제로 많은 연인들이 이곳에 올라 사랑을 다짐했다. 야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싶다면 JR타워호텔 35층에 위치한 ‘Sky J’도 훌륭한 선택지가 된다. 프러포즈, 상견례, 비즈니스 미팅 등 현지인들이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으로 프렌치 음식도, 진중한 분위기도 근사하다.

    흔히 ‘산책을 부르는 동네’라고 하면, 걸음을 멈춰서 볼 것이 많은 아기자기한 골목을 말한다. 걸어야만 보이는 것이 많은 곳. 삿포로는 정반대 의미에서 산책을 부른다. 시원하게 뚫려 있는 길은 산책에 생생함을 불어넣는다. 잔잔한 호수가 풍경을 끌어안은 나카지마 공원, 유럽의 대저택을 연상시키는 홋카이도 구청사, 다 자란 나무가 자연스레 산책로를 만드는 홋카이도 대학… 삿포로에는 걸어도 걸어도 또 걷고 싶은 곳이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모에레누마 공원은 탁 트인 드넓은 평지와 언덕이 주는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색다른 공원이다. 원래 쓰레기 폐기장이었던 황폐한 대지를 아름다운 공원으로 바꾼 인물은 세계적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 ‘공원 전체가 대지에 세운 하나의 조각이어야만 한다’는 철학에 따라 설계된 공원에는 유리 피라미드를 비롯, 놀이터, 야외무대 등이 들어섰고 해발 62m의 인공 산 모에레산도 만들어졌다. 하늘로 통하는 길 같은 계단을 올라 모에레산 정상에 서면 방송 카메라가 돌아가듯 전경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데 평지가 빚어내는 입체감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축구장 크기의 260배라는 넓이가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공원 입구에서 자전거를 빌려 둘러보길 권한다. 걸어도 달려도 노력으로 운명이 바뀐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은 질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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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켜보면 여행은 늘 사소한 순간에서 시작되었다. 미용실에서 받아 든 잡지에서 스치듯 넘긴 기사, 어쩌다 리모컨이 멈춰 보게 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잔상이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그곳으로 여행 가방을 꾸렸던 것 같다. 삿포로에서 기차로 30~45분 거리인 오타루로 향했던 건 언젠가 친구의 휴대폰 사진첩에서 봤던 키만큼 기다란 고드름이 맺힌 목조건물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운하 사진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주한 오타루 운하는 엄청나다기보다는 낭만이 새어나왔다. 도시 전체가 매일 축제 한복판에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날 그런 특별한 감정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타루에서는 어떤 교통 패스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목조건물 사이를 걸어 다니면 그만이었다. 가이드북이 오타루에서 해야 할 일로 소개하는 오르골 박물관이나 달콤한 디저트 가게를 찾는 대신 기무라 유키에 작가의 유리공예 작업실 겸 쇼룸 ‘유키에 글라스’에 들렀고, 1899년 창업한 역사 깊은 양조장 ‘다나카 주조’에서 사케 만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해가 넘어간 뒤에는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포장마차촌에 위치한 고다이 스시에 가서 스시 장인이 만들어주는 스시를 맛보았고(많아야 여덟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스시야. 낯선 이들끼리 어깨를 부딪치며 서서 먹는다), 오센트 호텔 ‘캡틴즈 바’에서 오타루 운하의 눈 내리는 풍경을 세피아 톤으로 찍은 이미지를 표현한 칵테일 ‘노스탤지아’를 마셨다. 삿포로 여행 중 오타루는 소설 속 주인공이 들려주는 액자소설 같았다. 같은 책 안에서 연결되어 있지만 오타루는 자기만의 달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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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즈노우타는 삿포로 신치토세 공항을 30분 남겨두고 도착할 수 있는 온천 리조트다. 마음껏 걷고 분주히 돌아다니고 산해진미를 맛보며 도시만 즐겼어도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물의 노래’라는 이름을 지닌 미즈노우타는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시코쓰 호수 옆에 안개처럼 고요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칼데라호인 시코쓰 호수는 아우리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는 호수로 유명하다. 미즈노우타의 첫인상은 료칸보다 숲속 산장 같기도 했는데 로비에 마련되어 있는 화로와 마시멜로, 낮은 책꽂이, 구석구석 느슨하게 놓여 있는 방석 때문이었다. 미즈노우타는 전통 료칸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으면서도 사각거리는 시트가 깔려 있는 침대, 홋카이도 해산물을 창의적으로 요리한 뷔페, 에스테틱 같은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편안한 숙소였다. 일본에서 마사지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비용에 대한 걱정이 앞서지만, 이곳의 에스테틱은 서울과 비슷하거나 더 저렴한 수준. 페퍼민트 오일을 골라 마사지를 받아보았는데 황홀한 졸음이 찾아왔다. 편리한 시설과 별개로 온천은 자연 그 자체였다. 노천 온천에 몸을 담그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을 때 까마귀와 바람과 나뭇잎이 내는 소리뿐, 인공적인 소리는 한 줌도 들리지 않았다. 온천수는 손으로 만져질 정도로 미끌거렸고, 온천수에 담갔던 몸은 태초의 질서를 따라 자연스럽게 재정비되는 기분이었다. 그 느낌이 좋아 늦은 밤과 이른 아침 여러 번 온천을 찾았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의식이었다. 여행지에 대한 가장 큰 칭찬은 ‘그 도시에 살고 싶다’가 아닐까. 삿포로는 앞으로 세 번, 네 번 방문해도 같은 바람을 품게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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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의 맛

    만화 <미스터 초밥왕>의 주인공 쇼타는 오타루 출신이며 일본 맥주의 시작은 삿포로다. 홋카이도는 공기까지도 맛있다.

    TAKU MARUYAMA 삿포로에서 나는 식재료 본연의 맛에 집중한 가이세키요리를 가장 현대적인 공간에서 맛볼 수 있는 곳. 바에 앉아 셰프가 세심하고 노련하게 식재료를 손질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삿포로에서 무엇이 수확되고 잡히는지 그 시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미쉐린 가이드 원 스타를 받았다. 문의 011-615-2929

    COCORO 따끈한 수프 국물에 큼지막한 재료가 푸짐하게 들어가는 수프카레는 1970년대 삿포로에서 시작된 음식이다. 2001년 문을 연 코코로는 송아지뼈, 돼지뼈 등을 블렌딩해서 수프스톡을 만들고, 시중에는 판매되지 않는 홋카이 50호 감자, 아사히카와 지역에서 재배한 쌀 등 식재료를 엄선해 정성껏 수프카레를 끓여낸다. 기본 치킨 카레는 물론 낫토, 라비올리 등을 넣은 메뉴도 수프카레의 신세계를 열었다는 평. 문의 011-758-8758

    KAMADA SARYO 70년 역사를 가진 오래된 민가를 개조한 일본 전통식 카페. 이곳에 가야 하는 이유는 점심에 한정판으로 내놓는 ‘테오리 스시(손말이 초밥)’ 메뉴 때문이다. 16여 가지의 반찬이 재료의 꽉찬 맛을 머금은 채 예쁜 액세서리처럼 나온다. 잘 지은 밥, 주걱, 김발이 함께 나오니 취향대로 예쁘게 싸서 맛보면 된다. 문의 011-616-0440

    INITIAL 지금 삿포로에서는 파르페로 술자리를 마무리하는 ‘시메 파르페’가 유행이다. 깊은 밤 예쁜 카페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들어 알록달록한 파르페를 먹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신선해서 술이 깰 정도. 과일 파르페가 맛있기로 유명한 이니셜은 밤 10시가 넘어도 줄을 서야 한다. 문의 011-211-0490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음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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