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Bye bye

2017.12.21

by VOGUE

    Bye bye

    2017년 우리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머릿속을 환하게 밝힌 문화, 예술, 패션, 뷰티, 라이프 이슈를 총정리했다. 내일이 더 즐겁길 바라며 돌아본 올해의 안부.

    Bye-bye

    대국민 오디션과 침실 중계
    꽃보다 예쁜 여행의 히트 이후에 여행 가서 먹고, 친구 따라 여행 가고, 이젠 그 친구가 한국으로 여행 오는 프로그램 등이 넘쳤다. 이제 방송가에서 여행은 물러가는 중. 사생활은 여전히 관심사다. 연예인의 육아 예능처럼 아이의 귀여움을 빌미로 남을 엿보는 프로그램이 풍미하다, 아무 초인종이나 누르고 밥을 얻어먹으며 일반인의 살림살이를 공개하는 사태까지 이어졌다. 이제 카메라는 누군가의 침실로 들어간다. <동상이몽> <신혼일기> <효리네 민박> <싱글와이프> 등은 거짓이든 진짜든 부부 생활을 보여준다.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로 포장하지만, 결국 전보다 더 강한 관음증이 낳은 프로그램. 하지만 역시 최고의 TV 트렌드는 오디션이다. 벼랑 끝에 몰린 줄 알았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강다니엘을 필두로 신세계를 열었다. <프로듀스 101>의 성공은 성공보다 더한 단어를 찾아야한다. 업계에서는 초반에 “과연 또 오디션이?”라고 우려했다지만 웬걸. 불황에 쪼들리는 방송국의 돈길을 터주었다. 비싼 광고와 PPL이 붙는 수준을 벗어나, 오디션 프로그램이 수십 개의 사업(광고, 음반, 행사, 해외시장 등)을 파생한다. 11명 멤버들은 11개의 기업이 되어 11개의 소속사도 키워낸다. 오디션 프로그램 하나가 엄청난 매출을 불러온 것이다. 이 머니게임에 너도나도 가열차게 몰려들고 있다. 이순재 교장 선생님의 <아이돌학교>가 개교하더니,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더 유닛>을 비롯해 양현석마저 <믹스나인> 으로 뛰어들었다.

    몸이 기억하는 여행
    요즘 홍콩에 쇼핑이 아닌 트레킹을 하러 간다. 용의 척추를 닮았다는 산길 ‘드래곤스 백’을 걷는 것. 영국 여행자들이 개발한 코스로 유럽이나 북미권에선 이미 유명하나, 한국에선 최근 주목받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공식 기내지 의 김면중 편집장은 “몸으로 체험하는 여행이 주류가 되고 있다”고 평한다. 관광지를 ‘구경’하고 여행 증거품(사진)을 남겨오는 것은 옛일. 캘리포니아 관광청의 이번 시즌 테마도 ‘아웃도어 여행’이다. 내년엔 서호주 카리지니 국립공원의 폭포수에 몸을 던지고,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대자연을 걷는 것처럼 더욱 격한 체험으로 발전할 것. 아직까진 일본 규슈 올레길(왠지 힙스터의 필수 여행지처럼 떠올랐다) 걷기처럼 설렁설렁한 난도가 주를 이룬다. 국내에서 해마를 보기 위해 구룡포에서 스킨 스쿠버를 하고, 서핑 인구가 늘어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목표 지향적(사진과 결과물)인 여행에서 탈피해, 여정 자체를 즐기며 몸(자신)에 집중하는 여행으로 한 단계 올라선 셈이다. 어찌 보면 요즘의 ‘자기 집중형’ 세대가 부른 자연스러운 여행 트렌드인 듯하다. 물론 여전히 에어비앤비가 강세이고 에어텔이 사라진 자리에 일일 투어가 자리 잡는 해이기도 했다.

    스타여야 통하는 공연
    강력한 정치사회 이슈 덕분에 올해 공연 시장은 여전히 위축됐다. 유명세가 입증된 명작, 내한 공연 위주로 살아남았다. <캣츠>를 비롯해 <시카고> <드림걸즈> <지킬앤하이드> 내한 공연이 좋은 성과를 얻었고, 연말엔 <시스터액트>를 선보인다.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 출신 뮤지컬 배우들의 대중적 인기도 공연으로 이어졌다. 시즌 1 스타인 고은성, 고훈정을 비롯해 백형훈, 기세중, 박유겸이 대표 주자. 프로듀서였던 마이클 리의 단독 콘서트도 매진이다. 덕분에 시즌 2에서는 이충주, 배두훈 등 기존의 실력파 뮤지컬 배우들이 출연했다. 공연계의 연예인 흡수도 여전했다. 그중에도 신선한 무대는 뮤지컬 <헤드윅>으로 변신한 유연석, 뮤지컬에 데뷔한 <마타하리>의 임슬옹, <컨택트>의 김규리다. 손동운(하이라이트)과 이호원(호야)도 뮤지컬 첫 무대를 가졌다. 연극도 마찬가지. 상반기에는 문근영과 박정민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화제를 모았고, 봉태규가 오랜만에 <보도지침>으로 무대에 섰으며, 류승범이 <남자충동>, 박광현이 <인간>, 샤이니 키가 <지구를 지켜라>로 연극에 데뷔했다. 하반기에는 오지호가 고선웅 연출의 <라빠르트망>, 이태임이 <리어왕>으로 무대에 올랐다. 연말에는 고전을 원작으로 한 작품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라노>와 <벤허>가 물러간 자리에 <햄릿: 얼라이브>와 <안나 카레니나>가 뒤를 잇는다. 역시나 실험적이기보단 고전 이라는 입증된 배경을 업어야 관객에게 통한다는 믿음이 엿보인다.

    역사를 다루는 시도들
    올 한 해 흥행 여부를 떠나 화제의 한국 영화를 보자. <택시운전사> <군함도> <아이 캔 스피크> <박열> <남한산성> <대립군> <보통사람> <더 킹> 등. 모두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매개로 한다. 김현민 영화 저널리스트는 “중국과의 치욕, 일제강점기, 독재 정권이 빚어낸 아픔들이다. 한국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다양한 시도가 있던 해다”라고 얘기했다.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한 한국 사회의 상처를 다룬 작품 <재심>, 다큐멘터리인 <공범자들> <저수지 게임> <노무현입니다> 등도 같은 맥락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스파이더맨> <블레이드 러너> <킹스맨> 등 판타지와 미래를 넘나든다면, 한국 영화는 과거와 현재의 ‘실제’ 아픔에 머물렀다. 최근까지도 역사의 한가운데 있음을 몸으로 체험한 우리이기에 이러한 작품이 개봉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물론 수백억의 제작비 환수를 위해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논란에 휩싸인 작품도 있지만, <아이 캔 스피크> 같은 수작도 낳았다. 민주화항쟁을 다룬 과 안시성 전투를 다룬 <안시성> 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올 한 해 한국 영화의 포스터를 모아놓으면 죄다 남자 배우뿐이라는것. 여배우가 전면에 드러나는 영화는 좋은 호응을 이끌어낸 <여배우는 오늘도>를 비롯해 <악녀> <더 테이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장산범> <여교사> <미옥> 정도이다. 또한 <청년경찰> <브이아이피>에서 문제가 됐듯이 영화 속에서 살해당하는 여성에 대한 창의력 부재의 잔인함은 여전했다.

    가지 치는 서핑
    서핑은 캠핑, 러닝과 더불어 요즘 운동 트렌드를 대표하는 키워드다. 셋이 모이면 그중 하나는 서핑을 하거나, 그의 친구라도 하고 있다. 특히 서핑 인구가 폭풍성장함에 따라, 양양뿐 아니라 서해와 남해 일대에 다양한 서핑 지역이 개발되었으며 많은 서핑 숍이 생겨났다. 서핑하기 좋은 바다를 해외로 찾아다니는 ‘서핑 트립’ , 미지의 세계 속 파도를 찾아 떠나는 ‘서핑 모험’ 또한 부상했다. 라이프스타일과 결합해 서핑을 테마로 한 바와 카페도 압구정과 한남동 일대에 속속 생겼다. 서프보드 디자인도 하나의 예술로 인식되며, 아티스트나 디자이너들이 서프보드를 캔버스화하는 작업도 시도했다. 서핑을 즐기는 방식도 기존보다 좀더 다양해졌다. 패러글라이딩과 같은 대형 카이트를 공중에 띄우고 서프보드를 타는 ‘카이트 서핑’ , 카약을 타고 노를 저어 즐기는 ‘카약 서핑’ , 손에 핸드 보드만 끼고 파도를 타는 ‘보디 서핑’ 등 다양한 갈래를 시도했다.

    페미니스트 읽기
    서점가를 장악한 소설 중 하나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다. 2016년 10월에 출간됐지만 단연코 2017년의 베스트셀러다. 육아에 지쳐 커피 한 잔 마시는 30대 주부가 “팔자 좋다”는 냉소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묘사해 여성들의 공감을 샀다. 이를 필두로 페미니즘이 비소설뿐 아니라 소설 분야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데이트 폭력과 여성 혐오 등을 다룬 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강화길의 <다른 사람>, IMF 이후 여성에게 가해지는 청년 세대의 폭력을 그려낸 박민정의 <아내들의 학교> 등이 있다. 최근엔 조남주, 구병모, 최은영 등 여성 작가 일곱 명이 참여한 페미니즘 테마소설집 <현남 오빠에게>가 출간됐다. “며느리라는 이유로, 아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딸이라는 이유로 받아 마땅한 고통은 없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괴롭힘당할 이유 같은 건 없다”는 최은영 작가의 말에서 책 방향을 알 수 있다. 이들 페미니즘 소설은 우리가 매일 겪지만 뭔가 정리가 안 되던 불편함을 있을 법한 사건과 인물을 등장시켜 명확히 활자화함으로써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유행에 편승해 페미니즘이란 동어를 반복하며, 페미니스트라 할 수 없는 필자의 글로 독자를 떠나보내기도 한다. 또한 대부분 20~40대 여성들의 처우만 얘기하기보다는 보다 폭넓고 다양한 대상이 등장해야 한다. 페미니즘이란 출판 장르가 자리잡기 위해 더 많은 필자를 발굴해야 함도 물론이다.

    휘몰아치는 스마트 스피커
    소위 4차 산업혁명의 시대다. <더 기어>의 김정철 편집장은 “지금 반도체 산업이 사상 최대 실적을 내는 것도 당연하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자율 주행차, 비트코인, 빅데이터 클라우드, 반려로봇을 비롯한 로봇 등 이런 단어가 쉴 새 없이 오르내린다. 수많은 이슈가 있는 해지만, 그중 스마트 스피커를 빼놓을 수 없다”고 얘기했다. 사물인터넷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인공지능이며, 현재로선 중간 디바이스가 필요하다. 냉장고나 TV 같은 큰 가전 기기는 늘 켜두거나 이동과 교체가 힘들기에, 블루투스 스피커가 자연스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알다시피 아마존이 ‘알렉사’라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스마트 스피커로 포문을 열고 시장을 선도했다. 에코닷, 아마존 탭 등 후속 제품 역시 마찬가지. 아마존에 이어 구글의 ‘구글 홈 ’, 애플의 ‘홈팟 ’, 마이크로소프트의 ‘하만카돈 인보크’ 등도 출시됐다. 국내도 역시 치열하다. SK텔레콤의 ‘누구’는 현재까지 10만 대가 팔렸으며 지난여름엔 야외 사용에 용이한 ‘누구 미니’를 선보였다. KT도 ‘기가지니’를 출시했고, 포털인 네이버의 ‘웨이브’ , 카카오의 ‘카카오미니’ 등도 시장에 뛰어들었다. LG유플러스도 네이버의 인공지능 플랫폼 ‘클로바’를 탑재한 스피커를, 삼성전자는 자체 AI 플랫폼 ‘빅스비’ 등을 결합한 차세대 스피커를 내년에 출시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지금 인터넷에는 각종 스마트 스피커를 비교 분석하는 게시물로 가득하다. 사물인터넷이 우리생활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 한 해다.

    뜨거운 펫티켓
    이케아를 비롯한 가구 브랜드가 반려동물을 위한 가구 라인을 론칭하며, 반려동물만의 라이프스타일 시대가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하지만 개에 물려 사람이 사망한 사건 이후, 모든 쟁점은 그것에 모였다. 심지어 ‘개파라치(규칙을 어긴 견주를 고발하고 포상을 받는 제도)’를 도입하잔 얘기까지 나온다. 다행인 것은 그동안은 ‘펫밀리’를 위해 얼마나 고급스러운 제품과 서비스가 출시됐는지만 얘기했다면, 이젠 반려동물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토론이 이뤄진다는 점. 정부조차 유기견 방지, 동물 학대에만 정책을 집중해왔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은 입양부터 교육, 양육까지 어떤 준비와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반려견을 키우지 않는 사람들도 반려견을 보고 소리치거나 만지지 않고, 산책하는 개가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무관심할 것 등도 당연하지만 무시되던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즉 펫밀리들은 펫티켓을, 다른 이들은 에티켓을 지켜야 한다는 각성과 기준을 얘기하는 것. 어디까지가 펫티켓이고, 에티켓이냐가 가장 뜨거운 부분. 외출 시 목줄을 착용해야 하지만 반려동물 전용 공간에선 목줄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 공격적인 반려견이라는 의미가 어느 범주 까지인지 등 논의가 활발하다.

    Girl Power
    여성들이여, 봉기하라! 수십 혹은 수백 년 후 역사책에는 21세기가 제2 여성운동의 시기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여성 인권 의식을 환기시키는 것은 전 세계, 전분야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동시다발적인 현상은 경이로운 수준인데, 유행이라면 뭐든 받아들이는 패션계에서도 주요 디자이너들(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 프라발 구룽, 미쏘니 패밀리)이 여성주의 운동을 반영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특히 2017 F/W 시즌은 위민스 마치와 때를 같이해서 패션 위크 참석자들이 운동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동안 패션계는 다른 산업에 비해 여자의 비율이 압도적임에도 여성에 대한 성차별과 인권 문제를 암묵적으로 간과해온 게 사실. 4대 도시 패션 위크의 여성복 브랜드, 특히 유명 하우스의 경우 남성 디자이너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고, 나이 어린 모델을 대하는 태도 는 거의 착취 수준이다. 사진가 테리 리처드슨의 성추행, 성폭행 문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이슈가 돼왔지만 할리우드 제작자의 지속적인 성 추문이 불거진 후에야 공식적인 대처에 나섰다. 모델 캐스팅 때 벌어지는 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한 비난 또한 올해 초 잠깐 불거졌다가 잠잠해진 상황. 패션계에서는 페미니스트가 패셔너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꾸준히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대견하기도 하다. 다만 그런 주장 때문에 그녀가 비난받지 않기를 바랄 뿐.

    루머의 루머의 루머
    패션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뿌연 안갯속을 헤매고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전문가와 소비자, 하이엔드와 스트리트 컬처의 충돌과 타협. 오랫동안 지켜온 권위와 체계에 도전 받고 있는 패션계는 바벨탑이 무너진 직후의 혼돈 그 자체.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올해 패션계에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소문과 루머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소문의 형태 는 몇 가지 타입으로 추려진다. 디자이너 A는 하우스에 불만이 많고, 하우스 B는 디자이너를 갈아치우고 싶어 하고, 디자이너 C는 하우스 D를 떠나 하우스 E로 갈 예정이라는 식. 물론 이런 식의 소문은 패션계에 늘 존재해왔다. 다만 과거에는 공식 발표 전에 비밀이 새어나와서 결국 사실로 밝혀진 게 대부분이었지만 올해의 소문은 그야말로 근거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 랑방의 선택은 옳았나? 셀린은 언제까지 피비 파일로를 잡아둘 수 있을까? 루이 비통의 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자리를 보전할 것인가?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선택은 누구? 그래서 버버리의 공석을 대체할 인물은? <뉴욕 타임스>의 바네스 프리드먼은 이 모든 뜬소문이 근본적 불안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업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디자이너들의 결과물은 그들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바이어와 소비자 중 그 누구도 확고한 방향성과 취향이 결여된 의상,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잘 팔리는 스타일을 적당히 버무린 옷에 돈을 쓰지 않는다. 결국 의문과 의심만 남기는 옷은 사람들 사이에 무성한 소문만 생산할 뿐. 그렇지만 해가 바뀐다고 해서 이 모든 게 깨끗하게 정리될 거 같지는 않다.

    사랑보다 안전거리
    ‘썸’도 사치였던 한 해였다. 돈이 없어 연애를 포기하는 단계를 지나, 연애 자체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 ‘비연애자’가 증가했고, ‘데이트 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안전 이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덕분에 10여 년 전에는 최악의 이별 방식으로 손꼽히던 ‘포스트잇으로 이별 통보’가 ‘카톡으로 이별 통보’로 모습을 달리하여 성행해도 이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별하는 데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도‘힘 조절’을 하게 된 것. 덕분에 남의 연애를 보며 대리 만족할 수 있는 TV 프로그램이 은근한 인기를 누렸다. 한집에서 모여 살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애감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준 <하트시그널>, 정부의 어떤 저출산 대책보다 강력했다고 평가받은 추자현 · 우효광 커플의 <동상이몽>, 남사친, 여사친의 심리를 보여준 <내 사람 친구의 연애>, 안전한 고막 애인과의 통화를 담은 <내 귀의 캔디 2> 등 획기적인 기획력이 없었음에도 사람들은 ‘임 생각’이 나는 밤이면 ‘다시보기’를 눌렀다. 출연자들의 진심이나 실제 연애 여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간질간질한 설렘의 감정은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되고 충족되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나쁜 남자의 선두 주자 제이 지가 “사과할게. 나는 감정이 없었기에 당신의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고 놀았어”라며 과거의 여자들에게 반성하는 신곡을 발표했는데, 이는 남자들도 ‘울고 싶을 때 울고,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하겠다!’는 다짐으로 읽혀 큰 이슈가 되었다. 과연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남자들과 연애는 ‘찌질담’으로 치달을 것인가, 성숙한 교감으로 발전할 것인가. 안전거리에서 지켜볼 일이다.

    욜로 VS 김생민
    욜로, 휘게에 이어 라곰까지. 이쯤 되면 대한민국의 정신 건강은 지구 반대편 국가가 책임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욜로, 휘게, 라곰 중에서도 승자를 꼽는다면? 단연 ‘욜로’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말로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산다는 ‘욜로’는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당연히 희생하던 억눌린 영혼들의 마음에 자유의 불을 지폈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고 외치는 욜로 정신은 하고 싶은 분야로 전직을 하고, 불쑥 여행을 떠나고, 취미 생활에 몰두할 수 있는 용기와 명분을 선사해주었다. 하지만 상반기 욜로 열풍이 하반기 김생민의 영수증 정신으로 마무리된 건 참으로 자연스러운 아이러니. ‘돈은 안 쓰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조언을 하지만 효도, 사랑, 자기 계발 등 누구나 올바르다고 믿는 가치에 대해서는 따뜻한 ‘그뤠잇’을 날리는 김생민은 묵묵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는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줬다. ‘어떻게 살 것 인가’에 대해 양극단에서 고민이 깊은 해였다.

    베트남 퀴진의 확장
    맛집 리스트에 가장 자주 이름을 올린 레스토랑의 국적은 베트남이다. 그동안 쌀국수 혼자 베트남 음식을 대변했다면 올해는 분짜, 넴, 반쎄오 등으로 횡적 확장을 이루었다. 힙스터들의 동네에 베트남 현지 맛을 그대로 재현한 식당이 생겼고, 맛집 좀 다닌다는 사람들은 쌀국수를 하노이식, 호찌민식으로 구분해서 평가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퀴진의 확장 이면에는 올한 해 최고 인기 여행지였던 베트남 다낭이 있다. 방송에서 <신서유기> <배틀 트립>을 본 사람들은 베트남에 가서 분짜를 먹거나, 베트남에 못 가도 분짜는 꼭 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게다가 방송을 통해 확인한 베트남 음식은 호감 있고 친숙한 재료로 익숙하되 신선한 맛을 보장하며 그 어느 나라 음식보다 저렴하고 맛있어 보였다. 이 모든 심리가 맞물려 베트남 퀴진은 마니아를 넘어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숱한 프랜차이즈를 낳았으며 데일리 해장 메뉴에 북부 하노이식 쌀국수를 올려도 될 정도로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

    편의점의 열일
    ‘이마트24’의 등장으로 일본 편의점을 향한 부러움의 감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몇 년 동안 혼밥의 해답이었던 편의점이 건강을 챙기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이마트24’ 패스트푸드 옆자리에는 ‘내추럴푸드’가 놓였다. 나트륨과 지방 함유량을 줄인 도시락, 샌드위치, 샐러드는 하루에 두 번 들어오는 족족 완판될 정도로 인기다. 노브랜드, 피코크 등 미식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마트 PB 상품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고, 냉장고 앞에 서면 냉장고 문이 열리는 등 온갖 하이테크 기술이 실험적으로 가동되고 있기도 하다. 코오롱LSI 외식사업팀 최정운 팀장은 “편의점과 식당의 경계가 무너졌다. 편의점 음식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이제 식당은 소셜라이징의 목적이 있을 때 가는 곳이 되었다” 라고 전했을 정도. 한편 롯데마트 서초점은 식사와 장보기를 함께 할 수 있는 ‘그로서란트(Grocerant)’로 떠올랐다. 고기나 랍스터를 구매하면 그 자리에서 구워주고 아보카도를 구매하면 과카몰리를 만들어주는식. 뉴욕, 홍콩, 런던 등 주요 도시에서 유행하고 있는 다이닝 트렌드가 과연 서울에서도 자리 잡을 수 있을지 배부른 마음으로 지켜보는 중.

    워너원의 독식, 그리고…
    지드래곤, EXO, 방탄소년단, 위너 모두 기대만큼 훌륭한 음악을 내놓았지만 올해의 주인공이 워너원이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 평론가 김윤하는 “음반, 음원, 해외 등 팀에 따라 다른 강점의 활약상을 보여줬지만 화제성에서만큼은 워너원이 평정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한 해”라고 돌아봤다. ‘내 손으로 뽑은 아이돌’에게 피어오른 애정의 강도는 배 아파 낳은 자식 그 이상. 멤버 구성은 물론 타이틀곡 선정까지 귀엽고 공손하고 섹시하게 물어보는 워너원으로 인해 우리는 한번이라도 더 미소 짓고 살았다. <언프리티 랩스타>로 이름을 알린 헤이즈는 래퍼가 아닌 믿고 듣는 보컬리스트로 자리매김했고, 젝스키스가 돌아왔지만 언니네 이발관은 영원한 안녕을 고했다. 한편 인디 신에서는 CD 대체재로 머천다이즈 상품이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책 형태의 음반, 카세트테이프 등 다양한 형태로 음반이 발표되었고 에코 백, 티셔츠 등 굿즈는 뮤지션을 ‘물적’으로 즐길 수 있게 해줬다. 의외의 히트곡을 꼽자면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같은 노랫말은 트로트에 EDM이 접목된 사운드에 실려 중·고등학생까지 춤추게 만들었다. SNS 입소문으로 뒤늦게 히트 친 이 노래로 김연자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한편 레이블이라는 간판이 뮤지션의 가치를 증명하는 척도로 등장하기도 했다. 브랜드를 보고 옷을 구매하듯, 레이블을 보고 음악을 찾아 듣게 된 것. 혁오, 검정치마 등이 소속된 하이그라운드 소속 프로듀서 밀릭의 앨범이 호평 받았고, 선미의 ‘가시나’의 성공 뒤에는 테디가 설립한 더블랙레이블이 있었다. 발매를 앞둔 Joe Rhee & 24는 더블랙레이블 소속이라는 타이틀만으로 음악성을 인정받는 분위기다. 닭과 달걀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빛나게 해주는 형국.

    뷰티의 극단적 온도
    뷰티 업계는 올 한 해 ‘빈인빈 부익부’를 곱씹었다. 헤리티지를 더욱 견고히 지키는 럭셔리 브랜드거나, 귀엽고 재치 발랄해 인스타에 찍어서 올리고 싶은 브랜드거나. 모든 분야를 아우르던 브랜드는 오히려 설 곳이 좁아졌다. 밀레니얼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노력 덕분에 츄파춥스 립글로스, 바나나맛 우유 핸드크림 같은 귀엽고 예쁜 제품이 쏟아졌다. 주목받고 싶은 마음의 갈증 한쪽은 팝 컬러가 채워줬다. 버건디 립스틱, 그린 쿠션, 오렌지 쿠션 등은 바르면 적당한 채도로 녹아들지만 제품 자체는 쨍하고 화사해 자랑하기 좋았다. 과거에는 연말 등 특정 시기에만 콜라보레이션을 했다면 올해는 연중무휴 콜라보레이션을 이어간 것도 특징. 콜라보레이션은 브랜드의 스토리를 꾸준히 집필해나갔다. 도드라졌던 제품군은 향수. 컨셉이 확실할수록, 니치할수록,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취향의 시대를 지나 취향이 대중화된 시점에 이른 것. 비싼 제품에 가치를 두거나, 싼 제품으로 즐거움을 누린 2017년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미술
    <퍼블릭아트> 정일주 편집장은 2017년 한국 현대미술 키워드로 ‘아시아’ ‘여성’ ‘복고’를 꼽았다. 국공립은 물론 사립 미술관과 아트센터에서 ‘아시아’ 타이틀을 단 전시가 봇물을 이뤘다. 그동안 미국과 유럽 등에 집중했으나 2013년과 2015년 마시밀리아노 지오니와 오쿠이 엔위저가 꾸린 베니스 비엔날레 영향으로 제3국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올해 본격적으로 아시아를 주목한 것. 다른 문화계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질문이 미술로도 발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전시도 큰 흐름을 주도했다. ‘복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전면에 복고를 표방하거나 제목으로 제시하지 않고 전체적 톤과 매너에 자연스럽게 흡수시킨 기획이 많았고, 중간중간 복고 작가 혹은 작품이 묵직하게 중심을 잡아줬다. 정일주 편집장은 “복고는 어쩌면 현대미술 바탕에 깔린 기조 중 하나일지 모른다. 모든 예술이 과거를 기반으로 새로운 개념을 개발하고 변형시키는 것 아니겠나”라고 덧붙였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이슈는 ‘디렉터십과 큐레이터십’. 디렉터와 큐레이터의역할은 어떻게 다른지, 어디까지가 공조이고 어디부터 월권인지 등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버려져 있던 시대적 공간이 우리 일상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서울로7017, 여의도 SeMA 벙커, 마포문화비축기지, 경희궁 방공호, 신설동 유령역이 그것. 서울로에 설치된 ‘슈즈트리’ 등 논란거리도 많았지만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역사에 작품을 전시하는〈타이포잔치 2017: 몸〉 〈2017 서울 아트스테이션〉과 같은 공공 미술 프로젝트 덕분에 서울은 그야말로 ‘예술이 흐르는 도시’였다.

    환경과 사회와 뷰티
    미세먼지 이슈는 화장품 산업 전반을 바꿔놓았다. 쫀득한 크림, 물광 메이크업 트렌드의 질주를 막은 주인공이 바로 미세먼지다. 항시 공기를 떠도는 미세먼지 때문에 피부에 달라붙을 여지가 있는 메이크업을 피하게 된 것. 파운데이션 질감은 실키하고 매트하게, 크림은 텍스처가 가볍고 피부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피부 보호막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센서티 브용’ ‘아이가 써도 됩니다’ 같은 수식어가 붙은 제품이 사랑을 받았다. 전 국민을 상실감에 빠뜨렸던 상반기 정치 이슈는 개인의 행복추구권에 불을 지폈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전국 마트에 버터, 삼겹살 품귀 현상을 빚은 ‘고지방 저탄수화물 다이어트’는 극단적 다이어트라는 결론으로 막을 내렸지만 적이라고 생각하던 지방이 사실 몸에 이로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질 좋은 지방에 대한 관심은 방탄 커피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중. 건강에 대한 관심은 홈 뷰티족의 증가도 가져왔다. 홈 케어 뷰티 디바이스는 나날이 발전, 거실의 풍경을 마치 에스테틱처럼 바꿔놓았다.

    다시 시작
    세상이 바뀌었다. 김공회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2017년에 벌어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현직 대통령의 파면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결과 자체보다 더 특기할 것은 그 과정이다. ‘거리의 권력’이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부터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지배하였고, 이어진 조기 대선에서 민주 진영을 대표하던 문재인 후보를 안정적으로 대통령에 당선시킨 것이다”라고 말했다. 새 정권은 ‘폐’ 구조 청산, 정계·재계·법조계·언론계 등에 고착화된 잘못된 관행을 손보고 필요에 따라 사람을 바꾸기 위해 분주했다. 그는 이어 “IMF 경제 위기 이후 ‘경제성장’이라는 명목으로 희생해온 노동자들, 불안정한 노동시장에서 반강제적으로 자영업으로 내몰린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활력과 희망을 되찾게 해주는 것도 시급하다. 이를 위한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그들의 소득을 늘려주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내년부터 적용될 최저임금의 다소 파격적인 인상은 그 신호탄이다. 놀랍게도 ‘그날’ 이후 일상에서 변화를 체감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대기업에 다니는 지인은 탄력 근무제가 시행되었다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지인은 응시 기회가 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무엇보다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를 독립 언론사가 아닌 SBS에서 방송했다. 그야말로 재갈이 풀린 기분이다.

      에디터
      조소현, 김나랑
      그래픽 아티스트
      이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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