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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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 미학

2017-12-28T21:41:34+00:00 2017.12.27|

오늘도 창문 너머에서는 갖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 작은 틀은 해방구가 되기도, 기대를 상징하기도, 자유를 뜻하기도 한다. 총체적 오브제로서의 창의 미학, 그 상상력이 나의 새해 일상에 미치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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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파리의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개인전을 할 때 15구 근처에 있는 아파트호텔 아다지오(Aparthotel Adagio)라는 호텔에 묵었어요. 60년대의 가구로 꾸며진 방 중에서도 강렬한 주홍빛 커튼이 특히 인상적이었죠. 커튼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며 촬영을 해보았어요. 그러다 보니, 파리가 종말의 화염에 휩싸인 듯 붉은 도시로 변모해 있더군요.” 그때 이후로 사진작가 구본창은 새로운 도시, 낯선 호텔에 도착할 때마다 창밖의 풍경을 촬영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무런 소리 없이 오로지 풍경으로만 인식된 무중력의 방콕 도시도, 사막 한가운데 있는 듯한 환상을 주던 샤르자 새벽하늘의 이지러진 반달도, 조선시대 도공들의 아픈 역사를 흔적 없는 일상으로 치환하던 나고야의 어느 호텔 직원의 모습도, 모두 창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구본창의 카메라에 담긴 풍경이다. 호텔 창문을 통해 어떤 도시를 기록한다는 것이야말로 이방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순간적이고도 상징적인 행위다. 도시에서 영원한 거라고는 돌밖에 없지만, 그때의 ‘창밖 풍경’은 사진작가뿐 아니라 순수한 관람객인 내게도 그 도시 자체로 영원히 각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창 너머 세상을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시도는 또 다른 아티스트 마테오 페리콜리로 하여금 뉴요커들의 일상에 발을 들이게 만들었다. 그는 뉴요커 60여 명이 매일 보는 창밖 풍경을 세밀화로 그림으로써 ‘창문은 인생 각자의 틀’임을 강조한다. 셰프 마리오 바탈리는 “창 너머 워싱턴 스퀘어에는 20세기 대중문화사가 통째로 담겨 있다”고 썼고,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물탱크부터 에어컨, 배기관까지, 뉴욕의 간접 자본이 한데 모여 있는 풍경, 진짜 좋다!”고 감탄했다.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시적인 아름다움이 담긴 경치에서 건축의 정서를 발견하고, 의학박사이자 작가 올리버 색스는 여전히 자신을 흥분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털어놓는다. 저술가 알렉 윌킨슨이나 주노 디아스 같은 이는 히치콕의 <이창>을 들먹이지만, 더욱 흥미로운 건,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책 <창밖 뉴욕>의 서문을 쓴 폴 골드버거의 말처럼 창밖 풍경을 이야기할 땐 어쩔 수 없이 창 너머 세상만큼이나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예술가든 아니든, 창문을 찍는다(혹은 그린다)는 행위는 어떤 함의를 품고 있다. 출장을 갈 때마다 무명씨들의 창문 안을 훔쳐보길 즐길 뿐인 나 같은 이들도 있고, 이런 창문들만 찍는 사람들도 있다. 포르투갈의 사진가 안드레 곤사우베스는 유럽 곳곳을 다니며 창을 찍었고, 이를 이어 붙여 하나의 추상화로 탄생시켰다. 장화진이라는 작가는 ‘프레임은 언젠가는 깨지고 해체된다’는 의미에서 굴절된 역사를 상징하는 서대문형무소의 창틀을 디지털 이미지로 평면화했고, 화가 김봉태는 창문의 드나듦, 처음과 끝이 계속 이어지는 창문의 속성을 예술적 화두로 확장시켰다. 한편 건축가 쓰카모토 요시하루는 <창을 순례하다>라는 책에서 전 세계 모든 건축물의 창을 보여줄 태세로 창을 분석했다. 포르투갈 아마레스 수도원 호텔의 창부터 두브로브니크 상점의 창이 어떤 형태인지 보는 것만큼이나 그의 말은 인상적이다. ‘창은 라이프스타일이다.’ 제도화된 기능을 초월하는 삶의 활력을 주는 대상으로서의 창을, 건축학 중에서도 가장 다양한 행동 요소가 집중된 대상으로서의 창을 일평생 탐색해온 ‘창의 행동학’ 연구가답다.

며칠 전 파리에 사는 한 선배는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병실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나는 그녀가 이순의 나이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전날까지 <보그>에 원고를 보낼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그녀의 눈이기에 창밖 풍경을 포착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에 대한 답장으로 나는 한남동에서 찍은 창밖 풍경 사진을 보냈다. 파리 그리고 서울에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가장 긴한 대화는 지금 창을 통해 보고 있는 풍경을 나누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창밖 풍경은 편지인 동시에 증강현실이었던 셈이다.

피터 팬이 대문이 아니라 창문을 통해 네버랜드로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성탑에 갇힌 라푼젤에게 창을 통해 보는 세상이 전부였음을 떠올려본다면, 인간은 창을 통해 건물 혹은 어떤 세계의 내부와 외부를 오가는 행동 자체에 뿌리 깊은 판타지를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심지어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홀리가 데이트 도중 이상한 남자에게서 도망쳐 폴의 집으로 피신할 때도, 그녀는 화장실 창문을 통해 빠져나온다. ‘순수한 미국’의 마지막 시기, 뉴욕의 눈부신 순간을 포착한 영화에 잘 어울리는 낭만적인 일탈이다. 그러니, 서사무엘의 ‘창문’을 흥얼거리며 옛 연인과의 추억만 되새기던 친구가 자꾸만 창문 사진을 찍는다면, 바람과 햇빛만 드나드는 창에 집착한다면, 그건 ‘지금 이대로 길을 잃어도 좋으니 다른 세상으로 떠나고 싶다’는 은밀한 신호임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창이라는 물건 혹은 대상 자체가 태생적으로 벽이라는 울타리를 파괴하는 역할이지 않나.

한편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은 창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매우 실질적이고 실천적이다. 더 중요하게는, 보다 본질적인 변화에 대한 깊은 욕구와도 맞닿아 있다. 몇 해 전, 일로 만난 한 러시아인 친구는 한국 사람들이 창문 하나 없는 집에 들어갈 때 가장 슬퍼 보인다고 했다. 문화적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에게 ‘창문 없는 집’은 누군가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자, 벗어나고 싶은 절망의 순간이자, 설사 불가능할지라도 언젠가는 이루고 싶은 (나무나 야경, 산이 보이는 집에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창밖 풍경에 초연할 수 없는, 혹은 집착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결혼 전 한때 나는 오로지 창밖 풍경을 위해 고단함을 자처했다. (마트가 가깝다는) 안온함과 (교통의) 편리함, 그리고 (치안상의) 안전함까지 모조리 포기했다. 창밖 풍경은 친구 혹은 연인과의 관계처럼 내가 선택할 수 있을지언정 바꿀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해, 나를 희생해서라도 멋진 ‘놈’을 만나 품에 안고 싶었다. 그러기만 하면 서울의 어느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창문 앞에 책상을 놓고 날마다 그 풍경을 보고 또 보며 어떤 예술 작품과도 맞바꿀 수 없다고 스스로 도취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풍경의 감흥에 무뎌졌다. 그리고 창문 앞에서 책상을 치우고 나서야, 커피라도 마시면서 창밖 풍경을 보는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움직일 때에야 비로소 창은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그리는 틀’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창은 기후, 풍토, 사회적  종교적 규범, 건물의 용도 등 그 장소가 요구하는 조건에 대해 매우 실천적으로 응답하는 동시에 그곳에 한데 어울려 있는 다양한 요소의 섭리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는 상상력을 부여한다.” 쓰카모토 요시하루는 <창을 순례하다>에서 이렇게 썼다. 그의 말에 따르면 창은 도시의 리듬과 패턴을 만들어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깊이를 투영한다. 하지만 이 유서 깊은 아파트 공화국에서 스타일이라는 걸 굳이 찾아야 한다면, 새시(Sash)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마테오 페리콜리가 그린 창에는 창틀이 풍경에 새로운 긴장감을 선사하는 프레임이 되지만, 우리의 새시는 프레임을 금기시한다. 애매한 회색 새시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이 깊이에서 정지하듯 맺혀 질감의 향연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산울림의 노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의 첫 소절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소위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창 너머의 세상이 현실과 분리된 판타지가 아니라 겨우 프레임 하나로 나뉘어 있을 뿐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기대감이 거세되고 욕망만 남은 아파트의 창이라고 해도, 결국 우리는 살아야 하기에, 나와 세상을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를 멈출 수는 없다. 창은 티브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똑같은 창밖 풍경이 없다. 같은 층 혹은 같은 열에 있다고 해도, 하다못해 나뭇가지 하나 걸리는 모습이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내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타인의 창이다. 아파트 정원과 길을 두고 제법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는 깜빡깜빡하는 불빛을 통해 나 아닌 어떤 존재가 저 맞은편에 살고 있음을 새삼 인식한다. 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존재론적 사유를,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을 통해서 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삶도 없고, 귀하지 않은 사람도 없다는 관용 정신마저 왕왕 샘솟는다. 멋진 풍경을 곁에 두고 살거나 아니거나, 결국 창밖 풍경은 우리 삶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지난 1년 동안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연락이 뜸했던 후배는 내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최근에 인터넷도, TV도, 뉴스도 모두 끊었어요.” 텔레비전이라는 창, 스마트폰이라는 창, 컴퓨터 모니터라는 창, 내 집 창밖을 보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에게 대단히 유혹적이며 더욱 절대적인 창, 나를 실재와 욕망의 경계 저편으로 아예 차원 이동시키는 창. 저 넓적한 새시 창보다도 훨씬 더 노골적으로 방대한 세상의 소식을 전하는 이 창들을 모두 닫은 그녀는 과연 어떤 창을 열었을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 창의 이면에서는 과연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까. 나는 그녀가 지난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보다 더 그녀를 만나고 싶어졌다.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100세인 알란은 돈 10만원 손에 쥐고 창문 넘어 도망친다. 복잡다단한 세계사를 고스란히 반영한 자신의 과거사까지 들추면서 간 곳은 다름 아닌 ‘창문을 넘어야 만날 수 있는 세상’인 동시에 ‘창문만 넘으면 만날 수 있는 세상’이었다. 온갖 핑계로 창틀을 부여잡고 사는 우리에게, 알란은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우연으로 가득 찬 곳일지 모른다고 속삭인다. 피터 팬과 라푼젤의 시절을 지나 소위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창 너머의 세상이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판타지가 아니라 겨우 프레임 하나로 나뉘어 있을 뿐임을 서서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창 너머를 지속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이자 급기야 창을 넘어 낯선 세계에 발을 내디뎌도 좋다는 명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창의 미학에서 배운 상상력을 인생에서 발휘할 때다. 헤르만 헤세의 책 제목 ‘창문 너머 밤이라는 나라’처럼 근사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