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 윈프리의 험난한 어린 시절

지난 7(현지 시각) 저녁 미국 LA에서 열린 75 골든 글로브 어워드. 미국의 방송인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죠. 오프라 윈프리가 흑인 여성 최초로 공로상에 해당하는 세실 B. 데밀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장에 있던 모든 배우와 감독, 관계자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오른 그녀. 8분에 걸친 인상적인 수상 소감을 남겼습니다.

BEVERLY HILLS, CA - JANUARY 07:  In this handout photo provided by NBCUniversal,  Oprah Winfrey accepts the 2018 Cecil B. DeMille Award   during the 75th Annual Golden Globe Awards at The Beverly Hilton Hotel on January 7, 2018 in Beverly Hills, California.  (Photo by Paul Drinkwater/NBCUniversal via Getty Images)

“1964, 제가 어린아이였을 밀워키(미국 위스콘신주에 있는 도시) 있는 엄마 집에 앉아 TV 36 아카데미 어워드를 보고 있었어요 밴크로프트가 남우주연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장면이었죠. 그녀는 이름이 적힌 봉투를 열고 그대로 역사에 남을 만한 다섯 단어를 말했습니다. The winner is Sidney Poitier(수상자는 시드니 포이티어입니다).”

“그때 제가 지금껏 세상에서 사람 가장 우아한 남자가 하얀 타이를 매고 무대 위로 올랐습니다. 그때까진 어떤 흑인 남성도 그런 방식으로 축하받는 모습을 적이 없었죠.  뒤로 저는 몇 번이고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처럼 허름한 방바닥에 앉아, 청소부 일을 마친 뼛속까지 지쳐 집에 돌아오는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에게 그런 순간이 어떤 의미를 가질  있지에 대해서 말이죠. (중략) 그리고 오늘, TV 통해 골든 글로브 역사상 처음으로 공로상을 받는 흑인 여성인 저를 바라보 어린 소녀들이 있을 겁니다. 소녀들과 순간을 함께할 있어 영광입니다.(중략)” 

본인의 커리어와 성공에 대해 이야기 하는 대신,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소녀들과 뜻깊은 순간을 공유한 그녀. 오프라의 이름 앞에 화려한 수식어가 붙기 전, 그녀 또한 최악의 환경에서 자란 어린 소녀 였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커리어와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소녀들과 뜻깊은 순간을 공유한 그녀. 오프라의 이름 앞에 화려한 수식어가 붙기 전, 그녀 또한 최악의 환경에서 자란 어린 소녀였기 때문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1954년, 미시시피 주 외곽의 한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감자 포대로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할 만큼 가난한 할머니 밑에서 유년기를 보냈죠.

오프라 윈프리는 1954년, 미시시피주 외곽의 한 시골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감자 포대로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할 만큼 가난한 할머니 밑에서 유년기를 보냈죠.

6살이 되던 해, 할머니의 건강 악화로 그녀는 엄마와 함께살기 위해 위스콘신 주 밀워키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어린 그녀에게 가난을 넘어서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죠. 어린 딸들을 책임지기 위해 청소부로 일하는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9살 어린 소녀였던 오프라는 사촌오빠, 친척, 엄마의 지인에게 까지 성적인 학대를 당하게 됩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할머니의 건강 악화로 그녀는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위스콘신주 밀워키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어린 그녀에게 가난을 넘어서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죠. 어린 딸들을 책임지기 위해 청소부로 일하는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아홉 살 어린 소녀였던 오프라는 사촌 오빠, 친척, 엄마의 지인에게까지 성적인 학대를 당하게 됩니다.

그녀는 이 끔찍한 일을 절대 엄마에게 털어놓지 못합니다. 대신 상처받은 마음을 견디지 못해 삐뚤어지기 시작하죠. 학교를 빠지고, 여러 남자를 만나거나, 돈을 훔치기까지 합니다. 결국 세 자녀를 홀로 키우며 엇나가는 딸까지 감당하기 힘들었던 오프라의 엄마는 딸을 친부가 살고있는 테네시 주의 내쉬빌로 보내게 됩니다. 이때 오프라의 나이는 14살. 안타깝게도 아빠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죠.  무려 7개월이 될 때까지 그녀는 부모에게 이 사실을 숨깁니다. 결국 조산으로 태어난 아기는 한달을 버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는 이 끔찍한 일을 절대 엄마에게 털어놓지 못합니다. 대신 상처받은 마음을 견디지 못해 삐뚤어지기 시작하죠. 학교를 결석하고, 여러 남자를 만나거나, 돈을 훔치기까지 합니다. 결국 세 자녀를 홀로 키우며 엇나가는 딸까지 감당하기 힘들었던 오프라의 엄마는 딸을 친부가 살고 있는 테네시주의 내슈빌로 보내게 됩니다. 이때 오프라의 나이는 열네 살. 안타깝게도 아빠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죠. 무려 7개월이 될 때까지 그녀는 부모에게 이 사실을 숨깁니다. 결국 조산으로 태어난 아기는 한 달을 버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납니다.

오프라 윈프리와 그녀의 아빠는 이대로 어린 소녀를 포기했을까요? 아니요. 그녀의 친부는 상처받은 어린 딸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딸의 교육에 매진합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고, 목표를 설계할 수 있도록 정신적,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죠.

오프라 윈프리와 그녀의 아빠는 이대로 어린 소녀를 포기했을까요? 아니요, 그녀의 친부는 상처받은 어린 딸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딸의 교육에 매진합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고, 목표를 설계할 수 있도록 정신적,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죠.

결정적인 터닝포인트가 찾아온 건 16살. 당시 고등학생 이었던 오프라 윈프리는 마야 앤젤루의 를 읽게 됩니다. 그리고 본인의 존재를 인정받는 듯한 큰 위로를 받게 되죠. 미국 문학 사상 최고의 자서전이라고 평가받는 이 책은, 인종차별, 가난,  그리고 성적 학대를 극복해 저널리스트와 작가로 성공한 마야 안젤루의 인생을 바탕으로 한 자서전입니다.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 건 열여섯 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오프라 윈프리는 마야 안젤루의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를 읽게 됩니다. 그리고 본인의 존재를 인정받는 듯한 큰 위로를 받게 되죠. 미국 문학 사상 최고의 자서전이라고 평가받는 이 책은 인종차별, 가난, 성적 학대를 극복해 저널리스트와 작가로 성공한 마야 안젤루의 자서전입니다.

이 때부터 오프라는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말’과 ‘미디어’의 힘에 매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학업에 집중하며, 방과후 활동으로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일을 시작하죠. 또한 연설 대회에서 상까지 받으며, 테네시 주 4년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장학금을 받기도 합니다.

이때부터 오프라는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말’과 ‘미디어’의 힘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학업에 집중하며, 방과 후 활동으로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일을 시작하죠. 또한 연설 대회에서 상까지 받으며, 테네시주에 있는 4년제 대학에 다닐 수 있는 장학금을 받기도 합니다.

당당하게 장학금을 받아 입학한 대학. 여유로운 캠퍼스 생활을 즐기는 대신, 오프라는 곧장 방송국에 입사합니다. 볼티모어의 WJZ-TV에서 공동 앵커 자리를 제안받게 되죠. 이때부터 그녀의 커리어에 승승장구가 시작된 걸까요? 아니요. 오프라는 ‘티비에 맞지 않는 인물’이라는 평을 들으며 앵커 자리에서 해고당하게 됩니다.

당당하게 장학금을 받아 입학한 대학. 여유로운 캠퍼스 생활을 즐기는 대신, 오프라는 곧장 방송국에 입사합니다. 볼티모어의 WJZ-TV에서 공동 앵커 자리를 제안받게 되죠. 이때부터 그녀의 커리어가 승승장구하게 된 걸까요? 아니요, 오프라는 “TV에 맞지 않는 인물”이라는 평을 들으며 앵커 자리에서 해고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장점. 토크쇼 진행자 자리로 좌천 당했지만 당시 맡은 프로그램을 시청률 바닥에서 1위로 성공시키며 방송계에서 그녀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탁월한 공감능력이 토크쇼 진행자로서 빛을 보게 된 것이죠. 백인 남성 진행자 뿐이었던 방송계에서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녀. 1986년, 드디어 본인의 이름을 건 ‘오프라 윈프리 쇼’를 진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장점. 토크쇼 진행자 자리로 좌천당했지만 당시 맡은 프로그램을 시청률 바닥에서 1위로 성공시키며 방송계에서 그녀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탁월한 공감 능력이 토크쇼 진행자로서 빛을 발하게 된 것이죠. 백인 남성 진행자뿐이었던 방송계에서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녀. 1986년, 드디어 본인의 이름을 건 <오프라 윈프리 쇼>를 진행하게 됩니다.

2011년 고별 방송을 진행하기 전까지 25년동안 약 5,000여 회가 방영된 ‘오프라 윈프리 쇼’. 전세계 140여개의 국가에서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그녀의 방송에 열광했습니다. 20년 넘게 낮 시간대 TV 토크쇼 시청률 1위를 고수한 역사적인 프로그램이 되었죠.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오프라 윈프리는요?

2011년 고별 방송을 진행하기 전까지 25년 동안 약 5,000여 회가 방영된 <오프라 윈프리 쇼>. 전 세계 140여 개국에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그녀의 방송에 열광했습니다. 20년 넘게 낮 시간대 TV 토크쇼 시청률 1위를 고수한 역사적인 프로그램이 되었죠.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오프라 윈프리는요?

본인의 쇼에 출연했던 수 많은 게스트와 시청자들로부터 공감을 사며 ‘오프라피케이션’, ‘오프라히제이션’, ‘오프라히즘’ 등과 같은 신조어까지 만들어냅니다. 특히 ‘오프라히즘’은 ‘인생의 성공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달렸다’는 뜻으로 그녀의 성공 스토리와도 일맥상통하죠.

본인의 쇼에 출연했던 수많은 게스트와 시청자들로부터 공감을 사며 ‘오프라피케이션’, ‘오프라히제이션’, ‘오프라히즘’ 등과 같은 신조어까지 만들어냅니다. 특히 ‘오프라히즘’은 ‘인생의 성공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달렸다’는 뜻으로 그녀의 성공 스토리와도 일맥상통하죠.

 ‘미국 최고의 방송인’, ‘가장 부유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셀러브리티’ 등 온갖 수식어가 모자랄 만큼 영향력 있는 방송인이자 프로듀서, 그리고 기업인으로 거듭나게 된 오프라 윈프리. 굴곡진 성장과정을 이겨낸 의지와 노력이 있었습니다.
‘미국 최고의 방송인’, ‘가장 부유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셀러브리티’ 등 온갖 수식어가 모자랄 만큼 영향력 있는 방송인이자 프로듀서, 기업인으로 거듭난 오프라 윈프리. 화려한 성공 뒤에는 굴곡진 성장 과정을 이겨낸 의지와 노력이 있었습니다.

“Turn your wounds into wisdom.”

“상처를 지혜의 초석으로 삼으라”는 그녀의 명언. 본인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나 봅니다.